대한전공의협의회 손상호 부회장

‘기피과목’으로 더 잘 알려진 육성지원과목은 수련과정과 수련 이후의 근로 조건이 좋지 않아 전공의들이 지원을 하지 않는 과를 일컫는다. 정부는 지난 2005년부터 각 과별 전공의 충원율이 전체 전공의 평균 충원율에 미치지 못하는 과목을 육성지원과목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는데, 평균 충원율이라는 기준이 적절한지는 차치하더라도 이 제도만으로 전공의들의 기피과목 지원을 유도하거나 해당 과목을 육성하는데 충분한지 의문이다.

사실 기피과목에 대한 지원은 육성지원과목 제도 이전부터 ‘수련보조수당’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시행되고 있었다. 다만 대상이 국공립 수련기관에 근무 중인 전공의에 한정됐기 때문에 시작부터 반쪽짜리 대책이었고, 이마저도 매번 논란의 대상이 되다가 시나브로 폐지됐다. 폐지를 반대하는 전공의들의 목소리도 물론 있었지만 기피과목 전공의 수는 얼마 되지 않으니 못들은 척 기피하면 그만이었으리라.

이후 정부가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단기해외연수 지원사업이다. 기피과목 전공의가 1개월 이내의 해외 연수나 학회에 참석할 경우 수련기간 중 단 1회에 한해 비용을 일부 지원해주겠다는 것인데, 과거의 수련보조수당이 반쪽짜리였다면 이는 반의 반쪽만도 못한 사업이었다.

2018년 기준으로 육성지원과목 전공의는 총 10개과(가정의학과, 결핵과, 방사선종양학과, 병리과, 비뇨의학과, 예방의학과, 외과, 진단검사의학과, 핵의학과, 흉부외과)에 약 2,100명이 수련중인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전공의는 그 중 1%가 겨우 넘는 40명으로 고정돼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기피과목 지원사업은 매년 그래왔듯이 지난 8월 국회예산정책처가 발표한 ‘2017회계연도 결산 분석’에서 다시 논란이 됐다. 기피과목 전공의들의 1% 밖에 혜택을 받지 못한다거나, 혹은 수도권이나 대형 수련기관에 속한 전공의들만 선발되고 있으니 당장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 매번 문제를 삼는 이들의 요지다. 할당된 사업예산은 40명분뿐이고 애초에 전공의 지원자가 없어 그나마 수도권 대형 수련기관에라도 전공의가 있는 게 다행이라는 사실을 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잘 모를 수도 있겠거니 여겨보지만 그럼에도 아쉽고 서운한 마음을 감추기는 어렵다.

국민건강과 지역사회의 안전을 위해 필수가 아닌 의료는 없지만, 기피과목은 그 중에서도 존폐의 위기에 놓인 영역이며, 기피과목을 수련중인 전공의들은 이를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최후의 보루이다.

특히나 기피과목 중에서도 지원계로 분류되는 전공의들에게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조차 요원하다. 전공의를 구하지 못한 방사선종양학과는 전공의 1명이 과 전체를 책임져야 하므로 연차별 수련교과과정이 무너진 지 오래다. 병리학과 전공의들은 급한 슬라이드 제작과 판독을 위해 매일 밤을 새워 의국을 지키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당직이 없다는 이유로 초과근무수당을 지급받지 못하고 있다. 예방의학과 전공의들은 심지어 ‘의사’가 아닌 ‘계약직 행정 직원’으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전공의 표준수련규칙을 적용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정부는 기피과목 전공의들의 고충이 무엇인지, 수련환경이 어떠한지, 더욱 효과적으로 이들을 도울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단 한 차례도 고민하려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이를 질책해야할 위치에 있는 국회마저도 연간 72조원이나 되는 보건복지부 예산 중 고작 1억 원에 불과한 기피과목 지원예산을 두고 혈세가 낭비되고 있다며 이를 어떻게든 삭감하려고만 하니 기피과목 전공의들은 그야말로 고립무원인 셈이다.

기피과목 문제 해결은 국가 주도의 전문의 수급 계획 수립에서 시작돼야 한다. 급변하고 있는 인구구조 하에서 앞으로는 어떤 분야에 얼마나 많은 의사가 필요할지를 가능한 정확히 예측하고 이를 바탕으로 후속 세대 양성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이들은 전공의 시절 만성적인 인력 부족으로 인한 고된 수련과 높은 업무강도를, 수련을 마친 이후에는 전문성에 비해 현저히 부족한 보상을 감내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수련과정 뿐만 아니라 전문의로서 지역사회에 나아가서도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제도적·재정적 뒷받침을 마련해야 한다. 또 불확실성과 싸우는 외과계 기피과목에 대해서는 예측할 수 없는 위험으로부터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보호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아울러 연차별 수련교과과정을 역량 중심으로 전면 개편해 지역과 규모에 관계없이 어느 수련기관에서나 해당 과목의 영역에서 환자와 지역사회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는 우수한 의료 인력이 양성되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수련교과과정 개편은 전문성을 가진 개별 학회가 중심이 돼야 하겠지만, 이것이 현장에서 올바르게 작동할 수 있도록 개발과 평가의 전 과정에서는 보건복지부의 전향적인 예산 지원과 수련환경평가위원회를 위시한 책임 있는 기관의 관리 감독이 수반돼야 한다.

이와 동시에 기피과목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수련기관 통·폐합을 추진해야 한다. 비단 기피과목 뿐만 아니라 정원을 채우지 못해 전공의 1~2명으로 운영되는 의국에서 정상적인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사례는 지금도 너무나 많다. 이 문제가 특히 심각한 기피과목은 국공립 수련기관을 중심으로 통·폐합해 전공의 정원을 재분배하고, 동시에 권역·지역별 거점 기관, 모자기관 등의 체계를 구축하여 파견 및 순환근무를 활성화해 의료전달체계의 전 영역에 대한 수련이 고르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피과목 전공의에 대한 개별적인 지원 역시 더욱 확대돼야 한다. 정부는 수련보조수당을 폐지하면서 이를 질평가지원금에 추가하겠다고 했지만 이는 수련기관의 배를 불려줄 뿐 결코 전공의 개인에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현재 최대 1%의 전공의밖에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구조적인 한계를 가진 해외연수 지원사업은 대상인원과 지원 횟수를 대폭 확대해야 하며, 시나브로 폐지됐던 수련보조금 역시 기피과목을 수련중인 모든 전공의를 대상으로 재도입해 수련비용 국가지원의 당위성을 입증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특히 유념할 사실은 기피과목 10개 중 7개가 지원계 또는 내과계라는 점이다. 의료의 위기에 대한 많은 논의는 겉으로 쉽게 드러나는 면을 강조하기 위해 외과계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으나 모든 의료는 필수의료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외과계 뿐 아니라 지원계와 내과계를 포함한 모든 영역이 동일한 비중으로 다뤄져야 한다.

외상 전문의의 부족, 해외 유입 감염병 방어와 같은 공중보건학적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기피과목을 필수의료라 부르며 애타게 찾곤 하지만 그 때 뿐이며 매 번 같은 상황의 반복이다.

국민 건강과 지역사회의 의료 안보를 책임질 예비 의료인을 선발하고 교육수련 과정을 거쳐 전문가로서 활동하도록 하는 과정은 10년이 족히 넘는 큰 계획이다. 장기적인 안목과 인내심을 갖지 않고서는 해를 거듭할 때마다 성과를 내야 할 것만 같은 유혹에 시달릴 수밖에 없으며 이는 미봉책으로 점철되는 정책만을 양산할 뿐이다. 높은 가능성으로 올해 국정감사에서도 누군가는 기피과목 전공의 지원제도를 지적할 것이다.

다만 바라건대 올해의 주인공은 지금 이 순간에도 기피과목 전공의들이 무너져가는 의료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묵묵히 자리를 지키면서도 한편에는 그들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해 줄 이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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