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장

오래전, 서울대 법대 교수 출신인 이수성 전 총리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분은 강의 첫머리에 이런 예화를 들었다.

“아름다운 호숫가 벤치에 젊은 남녀 둘이 앉아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연인들 앞에서 한 아이가 물에 빠졌습니다. 연인들은 못 본 체 그 자리를 떠나야 하나, 아니면 적극적으로 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못 본 체 떠나기로 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아이는 결국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아이를 구하는 것을 외면하여 아이를 사망에 이르게 한 이들 연인에게는 과연 법적 책임이 있을까요?”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장

대다수 사람들이 “윤리적 책임은 있겠지만 법적 책임은 물을 수 없다”고 답했다. 이수성 전 총리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많은 선진국을 비롯한 적지 않은 나라들이 이들에게 형사적인 법적 책임을 묻습니다”고 말했다.

어느 젊은 여성이 한의원에서 봉침(벌침)을 맞은 후 아나필락시스 쇼크를 일으켜 사망했다. 사망하기 직전, 한의사는 가정의학과 의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가정의학과 의사의 처치에도 불구하고 환자는 숨졌다.

그러자 환자의 가족이 한의사와 가정의학과 의사를 상대로 9억원대의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청년의사 기사에 따르면 이 소송을 담당한 신현호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현장에) 오지 않았다면 몰라도 응급 상황에 갔다면 보증인적 지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직접적인 불법 행위자가 아니더라도 한의사를 도와주러 갔다면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를 해야 한다.”

즉 신현호 변호사의 주장은 "한의사의 도움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면 모르되, 응했다면 그 순간부터 적어도 민사적 책임은 져야 한다"는 뜻이다.

대한의사협회는 보건복지부와 법무부에 다음과 같이 질의해야 한다.

"한의사의 긴급한 도움 요청이 있을 경우, 의사는 이 요청에 응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는가?"

그리고 그 답변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선언해야 한다.

"대한민국 모든 의사는, 사안의 긴급성과 무관하게 한방진료로 인해 발생하는 그 어떤 상황에도 절대로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이른바 '한방사고 무개입' 선언이다.

아이가 눈앞에서 물에 빠져 죽어도, 이를 외면하고 자리를 피하는 연인들의 자세를 이제는 우리 의사들도 배워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닌, 악한 대한민국 의사를 이 사회가 원하고 있으니 마땅히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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