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 임상시험 면제 규정 합헌 판결에도 논란은 여전

의학과 한의학으로 이원화된 의료체제 때문에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있다. 임상시험을 거쳐 의약품으로 개발되지 못한 ‘신약 후보물질’도 한의사가 처방·조제하면 한약이 된다. 한의학에만 존재하는 ‘비방(祕方)’ 때문이다. 물론 의학에서 신약 후보물질은 약이 아니기에 환자들에게 처방할 수 없다.

현행 ‘한약(생약)제제 등의 품목허가·신고에 관한 규정’은 동의보감, 향약집성방, 본초강목 등 한약서에 수재된 처방에 해당하는 품목은 안전성·유효성 심사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이 규정으로 인해 한약은 임상시험이 면제되고 한의사들은 저마다 비방을 갖고 환자를 진료한다.

한약에 대한 임상시험을 면제한 이 규정이 국민 건강권을 침해한다는 지적은 꾸준히 있었다. 그리고 지난 2015년 12월 과학중심의학연구원 강석하 원장 등 3명은 이 규정에 대한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지난 5월 31일 관련 고시가 헌법에 위배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안전성·유효성 심사 대상에서 제외되는 한약제제는 안전성·유효성이 확인되고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제제로 한정돼 있다”며 합법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현장은 헌재의 판단처럼 ‘이상’적이지 않다. 오히려 한약으로는 환자들에게 처방되지만 안전성·유효성 검증이 되지 않아 의약품으로는 개발되지 못하는 일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방항암제로 알려진 ‘넥시아(NEXIA)’가 그랬다. 넥시아 개발자인 최원철 박사(한의사)는 ‘넥시아(NEXIA)’를 의약품으로 개발하기 위해 ‘아징스75(AZINX75)’에 대한 2상 임상시험을 두 차례 진행했지만 모두 조기 종료됐다. 최 박사가 넥시아를 연구하고 말기암 환자들을 진료하던 단국대 융합의료센터(넥시아글로벌센터) 내 엔지씨의원과 엔지씨한의원도 지난 2016년 6월 문을 닫았다. 넥시아의 효능에 대해서는 의료계는 물론 환자단체도 의문을 제기하며 검증을 요구했었다.

이보다 앞서 논란이 됐던 게 ‘천지산’이다. 1996년 ‘기적의 항암제’로 알려진 천지산이 항암 효과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청년의사 보도(‘사이비의료에 멍드는 한국의료’, 1996년 6월 28호)로 알려졌다. 결국 천지산을 판매한 배모씨는 징역 2년, 벌금 1,000만원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던 천지산이 ‘테트라스(TetraAs)’라는 항암제로 개발되고 있다. 천지산을 판매했던 배모씨가 설립한 바이오기업이 신약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1상 임상시험만 마친 상태다.

이 업체 관계자는 “2상 임상시험이 2개 대학병원에서 진행됐지만 환자 모집이 되지 않아 중단됐다”며 “해외에서 1상부터 다시 진행할 계획이다. 국내에서는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서 해외에서 진행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아직 항암제로 개발되지 않은 신약 후보물질이 일부 한의원에서 ‘한방천지산’이라는 이름으로 지난해까지 암 환자들에게 처방됐다. 서울과 인천, 광주 등 6개 지역에 있는 7개 한의원은 ‘한방천지산한의원네트워크’를 형성해 암 환자들에게 한방천지산을 처방해 왔다. 당시 네트워크 본점 원장(한의사)은 “개발자가 만들었던 방법대로 천지산을 만들어서 처방하고 있다. 천지산 개발자와 공동으로 만들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현재 이들 한의원은 아예 이름을 바꾸고 다른 진료를 하거나 기존 한의원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전해 사실상 한방천지산한의원네트워크는 사라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선에서는 뇌수종을 고치는 한약, 눈 피로 한방 안약 등이 여전히 비방으로 처방되고 있다.

정부가 뒤늦게 한의학 표준화에 나섰지만 의료계는 회의적이다. 보건복지부는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개발사업단과 함께 오는 2020년까지 총 30개 주요 질환에 대한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을 개발할 계획이다. 또 한방의료기관이 보유한 한의약기술(비방)을 객관적으로 검증해 제도권에 진입시킬 방침이다(관련 기사: 한방의료기관에 숨겨진 ‘비방’ 찾기 나선 복지부).

하지만 의료계는 한약에 대한 검증 체계를 갖춰 안전성과 유효성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대한의사협회 방상혁 상근부회장은 “의학에서 약을 하나 만들려면 동물실험에 1·2·3상 임상시험까지 거쳐서 유해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검증한 다음에 환자들에게 처방한다”며 “한약만 임상시험 등 아무런 검증절차 없이 환자들에게 처방하는 제도를 운영한다는 건 정부가 국민 건강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방 부회장은 “세계 어디에도 이런 일이 벌이지는 곳은 없다. 오직 대한민국이 유일하다”며 “민족마다 전통의학이 다 있지만 현대의학이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소멸하거나 민간요법으로 남았다. 그런데 유독 한국만 건강보험재정까지 투입하면서 시대 흐름에 역행하고 있다”며 “잘못된 국가 보건의료체계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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