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이스라엘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동유럽에 이어 이번에는 이스라엘-요르단을 찾았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서쪽담 광장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좌), 통곡의 벽 아래에 유대교인들의 행사가 있는 듯 모여 있다. 앞쪽에 있는 깃발을 기준으로 왼쪽은 남성을, 오른쪽은 여성을 위한 공간이다. 두 공간 사이에는 담이 쳐있다.(우)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니 점점 사람들이 많아진다. 그리고는 섰다. 알고 보니 통곡의 벽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검문검색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장막절을 맞아 기도회가 열리는 듯 유대인들이 끊임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당연히 유대인들이 들어가는 통로와 우리와 같은 방문자가 들어가는 통로는 달랐지만 일단 입구까지는 같이 가야 하기 때문에 밀렸던 것입니다. 검색은 까다롭지는 않았다. 검문을 마치고 통곡의 벽 앞 광장으로 내려가다 보니, 벽 아래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의자를 늘어놓았고, 검은 옷을 입은 유대인들이 모여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통곡의 벽에 가까이 가려면 키파(Kippah)라고 부르는 유대인의 빵떡모자를 써야 한다. 유대 남성들은 ‘위에 계신 분의 권위에 순종하는 의미’로 머리에 무언가를 쓴다. 정통유대주의 남성은 항상 키파를 쓰고, 세속주의 유대남성은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하는 동안만 키파를 쓴다. 이디쉬어로는 키파를 야르물케(Yarmulke)라고 하는데, 히브리어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라는 의미의 ‘야레-메-엘로힘’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1)

통곡의 벽을 짚고 기도드리는 모사장님(좌)과 강회장님. 두분은 무엇을 빌었을까 궁금하다. (강대출 회장님 제공)

필자 역시 키파를 하나 얻어서 머리에 얹고는 통곡의 벽으로 향했다. 의자가 놓여있는데다가 의자 사이의 공간에는 유대인들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서 들어가는 게 쉽지 않았다. 야이기를 방해받는 것이 싫어서인지, 아니면 외지인이 끼어드는 것이 불편했는지 길을 내주지 않았다. 어렵사리 벽에 다가가 손을 짚었는데, 순간 당황했다. 기독교도나 유대교도들은 통곡의 벽에 손을 짚고 간절한 모습으로 무언가를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무엇을 빌어야 하나? 그냥 돌아설 수는 없었다. 그래서 순간 돌아가신 부모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이곳까지 올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는 서쪽담은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있는 석회석으로 만든 담이다. 이 담은 헤롯대왕이 두 번째 유대인 성전을 확장하면서 세워졌다. 본래 성전산 서쪽 측면을 이루는 서쪽담은 488m인데 성전산 남서쪽 귀퉁이 가까운 유대인광장을 면하고 있고, 나머지는 8m를 제외하고는 무슬림구역에 있는 구조물에 숨어있다. 담은 기초부터 벽까지 높이가 32m인데 노출된 부분은 19m이다. 담은 석회암을 45줄로 쌓아올렸는데, 지하에 17줄이 지상에는 28줄이 있다.

원래 로마제국이 유대반란을 진압하고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내쫓았을 때, 유대인들이 성전파괴를 슬퍼하던 장소는 동쪽 올리브산과 그 아래 키드론계곡에 있었다. 20세기 초에 시온주의 운동이 등장하면서 서쪽 담 지역은 유대인과 무슬림 공동체 사이에 갈등이 상존하였다.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이곳을 점령한 뒤, 모로코 쿼터를 밀어내고 광장을 만들어 서쪽담을 확장한 것이다.

성전산에는 기원전 957년 솔로몬이 유대성전을 처음 세웠는데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의 침공으로 파괴되었다. 기원전 516년 두 번째 성전이 다시 세워졌다. 기원전 19년에 헤롯대왕이 대규모 확장공사를 시작하여 그의 증손자 아그립바2세 시절 완공되었다. 헤롯이 확장한 두 번째 성전은 서기 70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기간 중에 파괴되었다. 서기 135년 유대인들의 바 코크바(Bar Kokhba) 반란을 제압한 로마제국은 2~5세기 동안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하였다.(2)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성전산에 있는 바위돔(Wikipedia에서 인용함)

황금사원이라고 부르는 바위돔(The Dome of the Rock)은 예루살렘의 구시가지에 있는 성전산 가운데 서 있다. 바위돔은 우마이야왕조의 아브드 알 말리크 칼리프에 의하여 서기 691년 완공되었다. 바위돔이 서 있는 장소는 솔로몬의 성전이 있던 자리로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의 명에 의하여 세워진 유피테르신전이 있던 장소이기도 하다. 서기 132-136년 바 코크바 반란이라고도 하는 제3차 유대-로마 전쟁의 원인이 된 것도 하드리아누스가 유대성전 터에 이교신인 유피테르신전을 짓고 예루살렘을 없애고 아리아 카피톨리나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한 때문이었다.

한편 성전산이 솔로몬의 성전이 있던 장소로 유대인의 성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무슬림들에게도 제3의 성지이기도 하다. 성전산에는 바위돔과 알 아크사 모스크(Al-Aqsa Mosque) 등 이슬람 성전이 있다. 이곳을 이슬람 3대 성지라고 하는 것은 무함마드의 야간여행(Isra, 이스라)과 승천(Mi’raj, 미라즈)와 연관이 있다. 메카에 머물고 있던 무함마드는 밤에 카바에 가길 좋아했다. 621년 어느 날 밤 카바에서 기도를 하다가 잠들었는데,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그를 알 부라크(al-Buraq)라고 하는 동물에 태워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였다. 바로 성전산이었다. 이곳에 도착한 무함마드는 아브라함, 모세 등과 함께 기도를 하다가 하늘로 올라 알라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이다.(3) 바위돔의 직경은 20.20m이고 높이는 20.48m로 기본 구조는 팔각형이다. 원래의 돔은 1015년 지진으로 무너져 1022-23년에 재건되었다. 현존하는 바위의 돔은 가장 오래된 이슬람 건축 가운데 하나이다.(4)

성전산 서쪽 담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는 것은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유대-로마전쟁 당시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면서 많은 유대인들을 죽였는데, 이를 지켜본 성벽이 밤이 되면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서쪽 담에 모여든 유대인들이 파괴된 성전 터를 바라보며 통곡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5) 아마도 두 번째 이야기가 현실적인 듯하다. 유대인들이 통곡의 벽에 모여 눈물로 기도를 바치는 것은 솔로몬의 성전을 다시 세우기를 기원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그래도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이 생각을 모아 현명한 선택을 하게 되기를 기원한다.

14세기 초 아랍의 저명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바위돔을 이렇게 묘사했다. “바위돔은 참말로 기이한 구조물로서 견고하면서도 이채로운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 대부분 도금을 하여 눈부시게 반짝이며, 보는 사람마다 황홀해지니, 이 모든 것을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다. 바로 한 가운데에 유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성스러운 바위돔이 있다. 선지자-그에게 평화를-께서는 바로 이 돔을 발판으로 승천하였던 것이다.(6)”

통곡의 벽 위로 알 아크사 모스크의 돔 부분이 보이고 그 위로 추석 보름달이 떠있다(좌). 광장에서 내려오면 이슬람 박물관과 알 아크사 모스크의 돔이 조명을 받아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우)

통곡의 벽에서 기도를 마치고는 다시 사람들을 헤치고 광장으로 돌아왔다. 마침 통곡의 벽 위로 황금사원의 둥근 돔이 달처럼 떠올라 있다. 약속시간에 모여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데 일행 가운데 한 팀이 늦었다. 광장이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오가는 사람이 많아서 헷갈렸던 모양이다. 성 밖으로 나와 일행을 기다리는데 보니 사위가 어두운 가운데 한가위 둥근달이 휘황하다. 8시가 조금 넘어 숙소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고 쉬었다. 요르단-이스라엘 여행의 구경 일정은 모두 마무리한 셈이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세상을 갈등을 빚고 있어서 한가위 둥근달은 모두에게 휘황한 빛을 내려준다.(좌). 높다란 예루살렘성벽이 위압적으로 느껴진다. (우)

여행 8일째 마지막 날이다. 12시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7시에 숙소를 나섰다. 베들레헴에 있는 숙소에서 텔아비브공항까지는 40분 정도 소요된다는데 이렇게 일찍 나서는 이유는 공항의 검문검색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공항 밖에 체크포인트가 있어 버스에 대한 검색을 한다. 발권과정에서 보안요원이 혹시 어디에서 묵었느냐고 물으면 절대로 베들레헴에서 묵었다고 하지 말라고 가이드가 강조한다. 단체여행객임을 고려한 탓인지 인솔자만 붙들고 캐어묻는다. 몇 가지 대화가 오가더니 영어가 가능한 사람이 없느냐고 찾는다. 우리 인솔자도 영어를 꽤 잘하는 편인데 답변하기 곤란한 질문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나보다. 현지가이드가 와서 히브리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마무리했다.

베들레헴 숙소 밖의 아침 풍경. 이른 아침이라서 오가는 사람은 없어도 기다리는 버스를 타고 텔아비브 공항으로 향한다.

미리 좌석을 정할 수 있는 국내항공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항공사가 단체여행객에 대하여는 좌석을 멋대로 배정하기 때문에 불편하다. 텔아비브에서 타슈켄트, 다시 타슈켄트에서 인천까지 오는 비행편 모두 아내와 떨어진 자리를 배정받았는데, 통로쪽 좌석이고 해서 그냥 타고 왔다. 텔아비브 공항의 출국신고는 간단했다. 여권의 사진이 있는 곳을 펴서 스캔을 하면 출국 스탬프가 튀어나오고 이것을 탑승장으로 나가는 곳에서 다시 스캔을 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우크라이나항공으로 텔아비브에서 타슈켄트, 그리고 타슈켄트에서 인천까지의 여행은 평범했지만 그래도 인상에 남는 것은 있었다. 영화는커녕 음악도 없었다는 것과 기내식의 양이 엄청나다는 것, 그리고 타슈켄트 공항의 활주로에 착륙하는 순간 ‘쿵!’하고 충격이 올 정도였는데도 객실에는 박수소리가 넘치더라는 것이 특이했다.

8시11분 비행기가 무사히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시간이 이른 탓인지 입국수속도 수월하다. 짐을 찾아 긴 여행을 같이 한 강회장님 일행과 모사장님 부부와도 다음 여행을 약속하고 헤어지다. 9시 40분에 마치 비행기로 출근하는 느낌으로 공항을 나선다. 11시에 집에 도착해서 짐을 내려놓고 나니 잠이 쏟아진다. 아침도 거른 채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잠들다. 눈을 뜬 것은 오후 4시, 창밖이 어둡다. 구름이 몰려드는 품세가 여행을 떠나던 날과 분위가가 비슷하다. 생각해보니 여행하는 동안 비가 온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지중해가 낳은 괴짜 철학자’라는 별명을 가진 프랑스 철학자 장 루이 시아니는 여행의 출발을 ‘다시 태어나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무엇이든지 부정적인 것을 버리고 떠나기 때문이란다. 필자 생각으로는 오히려 여행으로부터 돌아오는 순간이 다시 태어나는 일이 아닐까 싶다. 떠나기 전에 마음속을 가득 채웠던 불만족 같은 것들이 여행을 통하여 정화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이 끝나면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내가 달라진 모습으로 현실을 마주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일이 아닐까 싶다. <끝>

참고자료:

(1) 하은교회 자료실. 유대인의 빵떡모자 (Kippah, Yarmulke)

(2) Wikipedia. Western Wall.

(3) Islamiccity homepage. The night journey.

(4) Wikipedia. Dome of the Rock.

(5) 오마이뉴스 2013년 2월 9일자 기사. 통곡의 벽, 왜 그렇게 불렀는지 봤더니....

(6) 이븐 바투타 지음. 이븐 바투타 여행기 1, 103쪽, 창비,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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