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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십자가의 길을 따라 골고다에 오르다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이스라엘
  • 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 승인 2018.05.12 12:19
  • 최종 수정 2018.05.12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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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동유럽에 이어 이번에는 이스라엘-요르단을 찾았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헤로디온의 지하 수조(좌), 헤롯왕묘의 기념탑(우위), 헤롯왕의 묘 옆에 있는 왕실극장(우아래)

요새에 남아있던 강회장님 일행과 함께 요새의 지하통로를 통해서 헤롯대왕의 묘소를 찾아 나섰다. 지하통로의 입구는 요새의 서쪽 건물 아래편에 있다. 요새의 지하에서는 대형 수조를 볼 수 있었다. 요새의 지하에는 모두 3개의 대형 수조가 건설되었다. 요새가 산꼭대기에 있는 만큼 물을 저장해둘 수조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헤로디온에서 필요한 물은 예루살렘의 솔로몬연못에서 끌어왔다고 한다.(1) 지하통로를 한참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밖으로 나가는 문에 이르게 된다. 문밖으로 나서면 요새의 중턱이 거칠게 파헤쳐있고, 그리 크지 않은 하얀 탑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곳이 바로 헤롯대왕의 묘소이다.

헤브류대학 고고학과의 에후드 네체르(Ehud Netzer)교수팀은 2007년 5월 헤로디온 언덕 중간에서 헤롯의 무덤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2) “아르켈라우스(Archelaus)는 고인을 기리는 절차에 사용될 왕의 장식들을 모두 가져왔다. 시신은 자주색 예복으로 감싸 황금의 관대 위에 눕혔다. 머리에는 황금왕관을 쓰고, 오른손으로는 왕홀을 쥐었다. 헤롯의 아들들을 비롯한 친척들이 관대 주변에 섰고, 그 주변으로 완전 무장한 근위병이 둘러쌌다. 무장한 병사들이 행렬을 선도하였고, 행렬의 뒤로는 500여명의 노예와 자유민들이 향료를 들고 뒤따랐다. 헤롯의 유해는 200펄롱(로마시대의 거리단위로 8분의 1마일에 해당한다) 떨어진 헤로디온까지 운구되어 그곳에 안장되었다. 그것으로 헤롯의 통치가 끝났다.(유태인 전쟁, 1,23,9)”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가 기록한 헤롯대왕의 장례모습이다.

요세푸스의 기록을 믿은 네체르교수는 1972년부터 헤롯대왕을 무덤을 찾기 위하여 헤로디온을 뒤져온 것이었다. 2008년에 그는 드디어 헤롯대왕의 것으로 믿어지는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석관을 발견했다. 석관에는 오직 왕의 관에서만 볼 수 있는 장식이 새겨져 있었다. 무덤 가까이에는 작은 규모의 원형극장이 있는데, 450석 규모의 이 극장은 왕실전용 극장이었다고 한다.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성 밖 도로(좌), 소박한 모습의 가게들이 이어진다(우)

헤롯왕의 무덤을 구경하느라 시간이 꽤 걸렸던 모양이다. 요새에서 바로 내려와 버스틀 탔던 다른 일행들이 기다리면서 불평을 했던 모양이다. 일행들이 통제되지 않는다는 불만이 나왔음직하다. 어떻든 헤로디온을 출발한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이동했다. 예루살렘의 구시가지에 들어서자 도로는 차로 넘쳐나고 도로변에는 기념품점 혹은 먹을 것들을 파는 가게들이 이어진다.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에워싸고 있는 성곽을 따라가다가 감람산 맞은편에 있는 사자문(Lion‘s gate)을 통하여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예루살렘(Jerusalem)은 히브리어로 ‘평화의 마을’을 의미하는 예루샬라임( יְרוּשָׁלַיִם)이라 부른다. 가나안지방의 고대신앙에 등장하는 평화의 신, 샬림(Shalim)을 모시는 사원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아랍어로는 ’신성한 도시‘를 의미하는 알쿠드스( القدس)라고 부르는데, 9세기 무렵 무슬림 세력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서 등장했다. 이곳은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 등 세계 3대 유일신 종교의 성지이다.

기원전 4,500~3,500년 사이에 기혼샘 근처에 사람들이 정착한 흔적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다. 기원전 1,550~1,400년 사이에는 이집트 신왕조의 아모스 1 세 (Ahmose I) 와 투트모스 1세(Thutmose I) 시절에는 이집트의 가신이 되었다. 기원전 12세기 무렵 이집트 왕조가 쇠퇴하면서 독립왕국이 생겨났다. 기원전 1,000년 무렵 유대의 다윗왕이 ‘시온의 성’이라 부르던 도시를 점령하고 ‘다윗의 성’이라 부르게 하였다. 유다왕국과 이스라엘왕국을 통합하여 통일왕국을 이룬 다윗왕은 이곳을 수도로 정하였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왕 시절에 왕궁과 신전, 성채를 건설하였는데, 언약궤를 신전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솔로몬왕이 죽고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분할되었고, 예루살렘은 남조 유다왕국 400여년 동안 수도가 되었다. 기원전 587년 신바빌로니아의 네브카드네자르2세가 쳐들어와 예루살렘이 파괴되었고, 유대인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포로생활을 했다. 기원전 537년 페루시아의 키루스2세 시절에 석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성전을 재건하였다. 알렉산더대왕의 페르시아 정복 이후 예루살렘은 프톨레마이오스왕국의 지배를 거쳐 셀레우코스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167년 마카비 반란 이후에는 유대의 하스모니안 왕국이 들어서면서 예루살렘은 다시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기원전 37년 로마제국은 이 지역을 점령하였는데, 유대인-로마전쟁 당시 예루살렘에 진주한 로마군은 성전을 포함한 예루살렘의 대부분을 파괴하였다. 서기 130년 예루살렘을 방문한 하드리아누스는 도시의 재건을 명하였다. 유피테르에게 바치는 신전을 짓고 유대인들의 종교활동을 제한하여 서기 135년의 유대인 반란의 원인이 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50만명의 유대인을 살해하면서 반란을 진압하고, 유대인들을 도시 밖으로 추방하였다.

638년 아랍의 칼리파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로, 우마이야왕조와 압바스왕조 기간에 예루살렘은 번영하였다. 이곳은 특히 이슬람을 창시한 무함마드가 승천한 곳으로 성지가 되었다. 이슬람 왕국은 기독교의 성지를 존중하였지만, 서기 690년 우마이야왕조의 아브드 알 말리크는 당시 폐허상태이던 솔로몬의 성전 터에 오늘날 황금빛 사원으로 불리는 바위의 돔을 지었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을 무차별 학살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다. 1187년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1260년 훌라구의 몽골군이 예루살렘 근방까지 육박했으나 바이바르스가 이들을 몰아냄으로써 맘루크 왕조의 성지 관할권이 확립되었다. 1516년에는 오스만제국의 슐레이만대제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래 400여 년 동안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이 점령하여 위임통치하면서 유대인들의 대대적인 이주가 이루어졌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요르단이 지배하는 동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이 지배하는 서예루살렘으로 분리되었다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이 점령하여 통합하였다.(3)

0.9㎢ 넓이의 예루살렘 구시가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오스만제국의 슐레이만 1세 시절 다시 지은 것이다. 모두 11개의 성문이 있고, 그 중 7개가 개방되어 있다. 장방형에 가까운 구시가의 동남쪽 끝부분에는 장방형의 성전산 지역이 있다. 성전산은 히브리어로 하르 하바이트(הַר הַבַּיִת‎, Har HaBáyit), 무슬림들은 하람 에쉬 샤리프(Haram esh-Sharif)라고 하는데, 이슬람의 성지인 바위의 돔, 알 아크사 사원, 이슬람 박물관이 있다. 나머지 지역을 4분하여 북서쪽은 기독교인 구역, 가장 넓은 북동쪽 구역은 무슬림구역, 남동쪽은 유대인구역, 남서쪽은 아르메니아인 구역으로 각각 나뉘어있다. 워낙은 성전산 구역의 서쪽 벽과 유대인 구역 사이에 모로코인 구역이 있었는데, 6일 전쟁 기간 중에 이스라엘정부가 모두 정리해서 통곡의 광장을 만들었다.

무슬림구역 동쪽에 있는 사자문. 성문의 지키는 병사들의 근무자세가 철저하다.(좌), 성안의 도로는 차 한 대가 지나기도 버겁다(우)

우리가 이용한 사자문(Lion's gate)는 무슬림구역의 동쪽에 있다. 성문을 지키기 위한 목적인 듯 성문밖 도로와 성문안 도로가 반듯하게 연결되지 않고 성문을 경계로 하여 어슷하게 연결되고, 도로 역시 차 한 대도 겨우 지날 정도로 좁다. 성문은 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데, 오가는 사람들은 삼엄한 눈길로 지켜보고 있어 공연히 몸이 움츠러든다. 역시 이곳은 준전시상태의 나라였다. 사자문에서 50m 정도 들어가면 성모 마리아가 탄생했다는 집이 나오고, 그 옆으로 성 안나교회(St. Anne Church)가 있다.

성모 마리아가 탄생했다는 집(좌), 성 안나교회(우)

이 교회는 1140년 십자군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선이 굵고 벽이 두꺼워 마치 요새처럼 느껴지는 교회는 비대칭인 것이 특징인데, 좌우의 기둥의 크기가 다르고 창문 역시 모두 크기가 다르며 부벽의 두께와 높이도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부의 음향처리가 놀라워서, 작은 합창단의 노랫소리도 커다란 성당에서 울리는 것처럼 들린다. 교회의 지하실에서는 십자군들이 마리아가 태어났다고 믿었던 동굴을 볼 수 있다. 교회의 안뜰에는 숲이 우거지고 꽃이 있어 아름답다. 교회 앞을 지나면 베데스타 연못(Pool of Bethesda )이라고 하는 폐허가 있는데, 예수가 이곳에서 병든 자를 고쳤다고 전한다.(4)

성 안나교회의 내부(좌), 예수가 병든 자를 고쳤다는 베데스타 연못.(우)

성모탄생지를 떠나 예수가 십자가를 매고 걸어 골고다의 언덕 위의 처형장에 이르렀다는 길을 따라갔다. 골고다(Golgota)는 ‘해골’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gulgolet’ 혹은 아람어 ‘gulgulta’에서 온 것이다. 골고다가 오늘날 어디인지는 전하는 바가 분명치 않으나 예루살렘에서 성벽의 내부에 있는 성묘 교회 자리라는 설과 골돈의 갈보리라고 하는 다마스커스 문의 북동쪽 229m 지점에 있는 예레미야의 굴이 있는 구릉이라는 설이 있다. 예수는 사형판결이 내려진 빌라도의 법정에서부터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까지 800여m를 걸어갔다고 전한다. 예수가 걸어간 길을 ‘슬픔의 길’ 혹은 ‘고난의 길’이라고 옮기는 라틴어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고 한다(5) 가톨릭교회에서는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은 곳에서부터 무덤에 묻힌 곳에 이르기까지 14처에 해당하는 기도를 올리는 기도가 있다. 14세기 무렵 프란체스코회가 체계화하였고, 클레멘스 12세에 의하여 확정되었다.(6)

비아 돌로로사의 표지(좌), 좌측부터 II, III, IV, V, VI, VIII, IX처(우)

현재 골고다로 지목하고 있는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er)는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1세의 어머니 헬레나에 의하여 325년에 확인된 장소에 지은 것이다. 이 장소에는 하드리아누스황제가 세운 아프로디테신전이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성묘교회의 지하에서 아프로디테신전이 있던 시기에 순례자들이 남겨진 것으로 보이는 배의 모습 초기 기독교의 문양의 낙서와 ‘주님, 우리가 갔습니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DOMINVS IVIMVS’의 식각을 발견했다.(7)

비아 돌로로사의 좁은 길 양편으로는 크고 작은 가게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고, 오가는 사람들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도 쉽지 않다(좌, 우)

십자가의 길은 장터로 변해서 다양한 상품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이어지고 있어, 십자가의 길에서 말하는 사건이 일어난 장소들을 확인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첫 번째는 어딘지도 모르게 건너뛰었고 두 번째부터 아홉 번째까지는 그럭저럭 따라 갔지만 그 나머지는 분명치 않다. 인간의 고통을 모두 어깨에 메고 걸었을 예수의 심경이 어땠을까 궁금하다. 변함이 없는 인간들에 대한 실망으로 마음이 아팠을까? 아니면 하느님의 뜻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을 기뻐했을까?

성묘교회의 입구(좌), 성모교회의 2층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중)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우)

골고다의 언턱에 있는 성묘교회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특히 2층에 있다는 제단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는데다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 앞에서는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바치는 모양으로 줄어들지 않았다. 성묘교회를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길 따라가기를 마치고 일행은 통곡의 벽으로 이동했다.

십자가에서 예수를 끌어내려, (좌), 널에 눕히는 모습을 그렸다.(중) 염을 마친 예수를 동굴로 모시고 있다. (우)

참고자료:

(1) 이요엘 지음. 이스라엘 디스커버리 160쪽, 홍성사, 2015년.

(2) 이스라엘 외무부 2007년 5월 8일자 보도자료. “Tomb of King Herod discovered at Herodium”

(3) Wikipedia. History of Jerusalem.

(4) seetheholyland.net. Church of St. Anne.

(5) 크리스찬저널. 2009년 3월 5일자 기사. “골고다로 가는 길”

(6) 위키백과. 십자가의 길.

(7) Wikipedia. Calvary.

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yang412@hira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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