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18.12.12 수 15:03
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칼럼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
[연재]마사다에서 유대사람들의 성격을 엿보다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이스라엘
  • 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 승인 2018.04.14 09:20
  • 최종 수정 2018.04.14 09:20
  • 댓글 0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동유럽에 이어 이번에는 이스라엘-요르단을 찾았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일정에 없는 쿰란동굴 구경을 따로 한 10명의 일탈자들은 찾아온 인솔자의 채근을 받으면서 버스를 탔다. 마다사로 출발한 것은 1시 15분이었으니 자유 시간을 고려하면 그리 늦은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버스를 타고 기다렸던 다른 일행들이 불편했던 모양으로, 뒷날 예루살렘에서의 갈등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쿰란에서 마사다는 가까웠다. 마사다에서는 입장하자마자 먼저 동영상을 보면서 요새에 대한 윤곽을 정리하였다.

마사다는 히브리어로 요새를 의미하는 마사다(מצדה‎)에서 왔다. 마사다의 절벽은 동쪽이 가장 높아서 400m에 이르며 서쪽이 가장 낮아서 90m정도 높이이다. 절벽의 정상은 비교적 편평한 마름모꼴로 남북이 550m 동서로 270m정도 크기이다. 절벽 가를 따라 세워진 성곽의 둘레는 1,300m에 달하고, 곳곳에 사방을 감시탑이 서 있다. 마사다는 동쪽과 서쪽에서 각각 걸어서 올라갈 수 있다. 동쪽은 본래 있던 뱀길(Snake Path)이라고 하는 이리저리 휘돌아가는 길이다. 서쪽은 로마군이 마사다 공략에 쓰기 위하여 건설한 길이다. 케이블카는 마사다의 동쪽 절벽에 설치되어 있다.

마사다로 올라가는 케이블카. 케이블카가 지나는 길 아래 뱀길이 가파른 마사다로 향한다.

여행 안내소에서 출발하는 케이블카는 깎아지른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의지하고 있는 곳까지 한참을 올라갔다.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보면 뱀길(Snake path)라는 이름의 좁은 길이 구불구불 뱀이 기어가듯 케이블카가 있는 쪽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절벽을 따라서 놓인 통로를 따라서 뱀문(Snake gate)을 통해 마사다 정상으로 올라섰다. 다시 북쪽으로 오르막 경사가 있고, 그 위에 쇠락한 요새가 있다. 쇠락했다고는 하지만, 꽤 높은 돌담이 있고 돌담 안에는 바위벽돌을 쌓아 만든 수많은 방들이 이어진다. 요새 안에는 저장실, 병영, 병기고 등이 있고, 궁전 및 빗물을 담아두던 수조가 있다.(1)

뱀문에 들어서면 북쪽 언덕 위로 성곽이 있고(좌) 그 안에는 엄청난 규모의 저장시설과 병기고, 병영등의 방들이 들어서 있다.(우)

마사다에 관한 이야기는 1세기 유대계 로마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가 쓴 <유대전쟁사>에 기록되어 있다. 요세푸스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당시 갈릴리지역의 유대장수였지만 뒷날 로마에 투항하여 역사가로 활동했다. 마사다에 주거시설을 처음 만든 사람은 하스몬가의 대제사장 요나단이다. 헤롯대왕은 부왕의 서거 후 권력투쟁과정을 겪으면서 피난처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실제로 하스몬가의 안티고누스가 파르티아의 지원을 받아 헤롯을 공격했을 때 가족과 함께 마사다로 피신하여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기원전 37-31년 사이에 마사다의 정상에 궁궐 짓고 요새화하였다. 마사다 정상을 빙 둘러 성벽을 쌓고 38개의 감시탑을 세웠다. 성벽 안에는 110개의 방을 지었다. 요새의 규모는 1만 명의 병력을 무장시킬 수 있는 병기와 함께 수십 년 먹을 곡물 및 과일도 저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헤롯대왕이 죽은 뒤 마사다는 로마군에게 넘어갔다.

서기 40년 헤롯왕이 죽었을 때, 로마제국은 분봉왕을 다시 세우지 않고 로마군 장교를 총독으로 임명하여 직접 통치하게 되었다. 총독은 부임하자마자 세금을 걷을 목적으로 인구조사를 실시했고, 이에 반발한 유대백성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내 진압되고 말았다. 서기 66년 새로 부임한 총독은 유대교 대제사장을 제복을 압수하고 돈을 요구한데 이어, 예루살렘의 성전 마당에 황제의 동상을 세웠다. 이에 격분한 유대백성들이 동상을 부수는 등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다.(2) 이때 유대 젤럿당(zélə, 성경에서는 열심당이라고 하는 유대민족주의자들로 서기 6년 대규모 독립운동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바 있다)의 분파인 시카리(Sicarii, 단검을 지닌 남자라는 의미의 라틴어 Sicarius의 복수형으로 암살자를 의미한다) 집단이 로마군을 물리치고 마사다를 점령했다. 이어서 서기 70년에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진압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가 이끄는 젤럿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탈출하여 마사다에 들어갔다. 남녀노소를 모두 합쳐 천명이 안되었지만, 그들은 마사다를 근거로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로마군을 괴롭혔다.

오른쪽 절벽 위에 정방형으로 구획된 곳이 로마군의 병영이 있던 곳이다(좌) 로마군이 건설한 경사로가 병영 부근에서 마사다 서쪽 성벽으로 이어진다.(우)

로마총독 루시우스 플라비우스 실바는 로마 10군단(9천명의 전투원과 6천명의 젊은 유대포로 노역자로 구성됨)을 이끌고 마사다로 향했다. 실바는 마사다 전체를 에워싸고 동쪽 통로로 마사다에 진입하려 했으나,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산등성이를 오르는 로마 군사들은 까마득한 성벽 위에서 내려쏘는 화살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15배가 넘는 병력으로 2년을 공략했지만 마사다의 성벽 아래에도 올라보지 못했다. 창고에 쌓인 양식과 물이 넉넉한 마사다와는 달리 로마군은 식수와 먹을 것을 조달하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실바장군은 결국 마사다 서쪽 바위산에 마사다를 굽어볼 수 있는 높이로 토산을 쌓고 서쪽 성벽으로 가는 경사로를 쌓기로 했다. 처음에 로마병사를 공사에 투입하였을 때는 커다란 돌과 뜨거운 물을 쏟아붓던 유대사람들은 유대포로들이 공사에 투입되자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토산이 완성된 다음, 로마군이 투석기로 20-25kg의 돌을 날려 성벽을 무너트리자, 마사다에서는 나무기둥을 세우고 흙으로 성벽을 보강하였지만, 이번에는 불화살로 공격하여 성벽이 무너지고 말았다.

로마군의 총공격을 앞두고 마사다 안에 있던 967명의 유대인들은 옥쇄를 결정하였다. 이들의 지도자 야이르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로마와 맞서 싸운 마지막 용사들입니다. 새벽이 오면 우리는 저들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유로우므로 부끄럽지 않게 죽을 기회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치욕을 당하고 노예로 끌려가지 않도록 아내와 자식들을 우리 손으로 죽이고, 우리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입니다. 자! 노예가 되기보다 자유라는 이름의 수의(Shroud)를 입읍시다!”라고 외쳤다. 남자들은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아이들을 죽였다. 다시 모인 남자들은 제비를 뽑아 10명을 정하고, 나머지 남자들은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 곁에 누웠다. 열 명의 남자는 집집을 돌며 남자들을 죽였다. 남은 열 명은 다시 한명을 뽑아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마지막 한 명은 성안에 살아있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불을 놓은 다음 자결했다.(3) 식량창고의 일부는 불태우지 않고 남겼다고 한다. 식량이 떨어져 옥쇄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마사다에 얽힌 슬픈 역사가 밝혀지고, 이곳은 유대인들의 결사항전의 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훈련을 마치고 퇴소할 때 마사다 정상에 와서 "마사다는 다시 함락되지 않으리라!"(שניתמצדהלאתיפולשנית)고 외치면서 전의를 다진다고 한다.(4)

공중에서 내려다 본 북쪽 궁전(좌, Wikipedia에서 인용함) 상단테라스에서 내려다보면 중간 테라스에 있는 원형 리셉션홀이 보이고, 그 아래로 하단 테라스의 궁전이 보인다(우)

먹을 것이나 일용품 등을 보관하던 엄청난 규모의 창고를 지나면 헤롯왕의 북쪽궁전에 이른다. 기원전 25년부터 시작한 2단계 공사에서 지은 북쪽 궁전 지역에는 대형 저장창고단지와 그 북쪽으로 절벽 위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계단식으로 배열된 3개의 북쪽 궁전이 있다. 상단 테라스에는 왕을 위한 거실과 반원형 포르티코가 있고, 서쪽에 있는 계단을 통하여 중간 테라스로 내려갈 수 있다. 중간 테라스에는 원형으로 된 리셉션 홀이 있다. 낮은 테라스에서는 역시 연회를 할 수 있는 리셉션 홀이 있다. 상단테라스에서 절벽 아래 있는 중간 테라스와 낮은 테라스를 굽어보면 순간 아찔한 느낌이 든다.

북쪽 테라스 부근에 있는 수조(좌) 마사다가 빗물을 모으는 방법을 설명하는 모형(우)

서쪽으로 돌아가면 수조가 있고, 성 밖의 서쪽 산등성이에서 빗물이 흘러드는 모습을 재현한 모형을 볼 수 있다. 마사다 지역은 석회암지대로 비가 내려도 땅으로 스며들지 않기 때문에 빗물이 흐르는 길을 막아 물을 모을 수 있다. 마사다 곳곳에 마련된 수조에는 총 750만 리터의 물을 저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식수는 말할 것도 없고 목욕탕과 사우나를 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물이 풍족했다.(4) 더 돌아가면 유대회당(synagogue)이 있고, 조금 더 가면 비둘기집이 있다. 마사다에서는 비둘기를 전서구로 이용했다고 하는데, 현지가이드는 단백질 공급원으로 잡아먹기 위하여 키웠다고 설명했다.

시나고그의 파노라마 사진

비둘기장을 지나면 성벽 밖으로 나가는 작은 문이 있다. 비잔틴문이다. 문 위쪽으로 있는 건물들은 서양궁전으로 마사다 1단계 공사에서 지은 것이다. 일행들이 모두 내려갈 때까지 기다려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다시 마사다의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보니 요새 안 어디에서도 쏟아지는 햇빛을 피할 나무 한 그루가 없다. 뙤약볕 아래에서 무너진 건물과 성벽을 구경하는 것이 고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 한 바퀴 돌아보고는 미련 없이 케이블카를 타고 말았다. 케이블카를 타러가면서 뱀문 가까이 있는 샘터에서 마사다 샘물을 맛보았다. 시원한 느낌은 드는데 뒷맛이 조금 찝찔하다. 사해 부근이라서 지하를 흘러내리는 빗물에 소금기가 녹아들어가는 모양이다.

비둘기장(좌) 비둘기장 맞은편에 있는 비잔틴교회(중, Wikipedia에서 인용함), 비잔틴 문, 위로 보이는 건물들이 서양궁전이다 (우)

3시에 마사다를 떠나 다음 일정으로 사해체험을 하기 위해 북사해로 출발했다. 동서로 18km 남북으로는 67km 크기의 사해는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에 위치한다. ‘소금바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얌 하멜라흐(ים המלח)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성서에는 ‘아라바의 바다’ 또는 ‘동해’ 등으로 기록된다. 사해는 북으로부터 갈릴리호수를 경유하는 요르단강과 그 지류를 통해서 흘러드는 매일 500만톤의 물이 유입되지만, 흘러나가는 강은 없다. 사해는 수면이 해수면보다 421미터나 낮아 지구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호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수위가 높아지지 않는 것은 이 지역이 워낙 건조하고 더운 탓에 유입되는 만큼의 물이 증발하기 때문이다.

사해는 동아프리카로 지어지는 대지구대의 북쪽에 위치한다. 해수면보다 낮은 협곡이 만들어진 과정을 판구조론으로 설명한다. 판구조론에 따르면 지표의 암석은 고온으로 녹아있는 지구 중심에 지각과 상부맨틀이 떠있는 상태로 7-8개의 주요 격판덥개와 많은 단판으로 구성된다. 판들은 지구의 운동과 관련된 힘을 받게 되므로 경계에서 변환, 발산, 수렴 등 3가지 유형의 상대적 움직임이 나타난다. 변환은 두 판이 서로 미끄러져 어긋나는 현상이며, 발산은 두 판이 멀어지면서 그 사이로 마그마가 올라와 채우는 현상이고, 수렴은 두 판이 서로 충돌하면서 하나의 판이 다른 판을 올라타는 현상이다.(5)

지각을 구성하는 판들의 분포와 경계에서 보이는 힘의 방향 (Wikipedia에서 인용함)

사해는 아라비아판과 아프리카만의 경계에 위치한다. 두 판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아라비아판이 아프리카판보다 조금 빨리 밀려 올라가면서 방향이 틀어져 두 판 사이가 멀어진 것이다. 북쪽에 있는 유라시아판과의 경계에서 아라비아판쪽이 파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아카바만에서 터키까지 1,200km에 이르는 함몰지형을 만들었다. 사해의 물, 아니 소금은 기본적으로 지중해에서 유입된 바닷물에 녹아있던 것이다. 400만 년 전의 기후변화로 해수면이 상승한 지중해로부터 바닷물이 흘러들었다. 7만 년 전의 빙하기에 해수면이 내려가면서 225km길이의 거대한 호수가 형성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지역이 건조하고 무더운 기후대에 들어가게 되고, 물이 증발하면서 호수면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북쪽의 갈릴리호수와 남쪽의 사해로 나뉘게 되었는데, 북쪽의 갈릴리호수는 북쪽의 고지대로부터 빗물이 흘러들면서 담수화되었지만, 사해는 빠져나가는 물이 없어 염분이 유지된 것이다. 사해의 염도는 34.2%이다. 리터당 275g의 소금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염분은 사해의 물은 물론이고, 주변의 암석에도 들어있다.

참고자료:

(1) Wikipedia. Masada.

(2) 김종철 지음.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이스라엘 258-267쪽, 베드로서원 펴냄, 2008년

(3) 하은교회 자료실. 마사다 (Masada).

(4) 나무 위키. 마사다.

(5) Wikipedia. Plate tectonics.

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yang412@hiramail.net

<저작권자 © 청년의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카드뉴스
  • [카드뉴스] 다발성골수종 치료 대세는 '3제 병용요법'
  • [카드뉴스] 프레디 머큐리는 '살아있는' 전설이 될 수 있었다?
  • [카드뉴스] '심혈관질환 위험 감소' 허가받은 유일한 'PCSK9억제제'
여백
쇼피알 / 라디오
  • 1
  • 2
  • 3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