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진 서울의원 소아청소년과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많은 연인들이 손잡고 거리를 거닐거나 예수님의 탄생을 축복하면서 선물을 주고받는 날. 그러나 당직 레지던트였던 나는 당직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콜이 없다니 드문 한 때였다. 대충 당직실 책장에서 집어든 책이 신생아 심폐소생술이었는데, 넘기다 보니 머릿글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껏 내가 생각해온 가장 아름다운 머릿글은 모든 의대생들이 읽는 기본중의 기본, 해부학 교과서 책 Ciba의 것인데, 그 책의 머릿글은 한 페이지 전체 흰 여백 가운데 ‘To my wife, Vera’라고 단 한 줄이 써 있다. 해부학 책 가장 앞쪽 한 페이지를 단지 부인을 위해 헌정하다니, 그 한 장을 나는 참 좋아했었다. 밥상머리에서도 해부학만 생각하고 사실 것 같은 NETTER박사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삶>이 있다는 것을 천명하는 그 한 장이, 그 뒤의 줄줄 외워야하는 <비인간적인> 빽빽한 페이지들을 읽기 전에 늘 내겐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신생아소생술 책 서론에서 맞닥뜨린 문장 역시 못지않게 나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말은 이와 같았다.

"Birth is beautiful, miraculous, and probably the single most dangeorus event that most of us will ever encounter in our life times."

- 탄생이라는 것은 아름답고, 기적적이며, 아마도 우리가 삶에서 맞닥뜨리는 가장 위험한 사건일 것이다.

누군가 책의 서론만 읽어도 책의 에센스는 다 아는 것이라고,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과연 너무 맞는 말이라서 ‘맞아, 정말 맞아’를 반복해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신생아 중환자실에 있는 모든 아이들은 이 말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다. 갓 태어난 아가들을 입원시킬 때 많은 부모들은 다들 같은 질문을 한다.

"왜 다들 아무 일 없이 태어나는데, 우리(딸/아들/손녀/손자)만 입원하게 되는 거죠?"

어떨 때는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냐고 죄책감을 담아, 어떨 때는 의료진의 잘못 아니냐며 의구심을 가지고, 왜 자신의 아이는 남과 같지 못했냐고 묻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이러하다. 내 아이만 왜 예외냐고 묻지만, 내 아이가 그 모든 위험의 가능성에서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인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은그리고 우리들은 너무나 기적적인 탄생을 했다. 사산할 위험이 가장 높았던 임신 초기를 거쳐, 태아의 입장에서는 어두컴컴하고 미래가 어떨지 예측할 수 없는 엄마의 자궁 속에서 온갖 위험에서 버텨내어 성장하고, 마침내 호흡부터 모든 신체 체계가 바뀌는 쓰나미 같은 변화를 겪으며 태어났다. 그 과정에서 이미 죽어버린 아가들도 많았다. 건강한 탄생은 너무도 운이 좋아서 일어나는 기적적인 일이다. 그 기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에 “왜 내 아이만 입원을 해야 하느냐”고 묻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대답한다.

“탄생은 너무나 힘든 일이에요. 그 힘든 과정을 견뎌낸 것만 해도 대견한 거에요. 태어남 자체가 물에서 건져내는 것이나 마찬가지거든요. 아가는 엄마아빠를 만나기까지, 아주 힘들게 이 길을 온 거에요”라고.

그리고 “입원한 아가들은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보이지 않아서 그랬을 뿐 사실은 아주 많답니다”라고.

그러면 자신과 자신의 아가만 고통에 빠져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슬픔에 빠져있는 부모님들은 조금은 위안을 받는다.

"Birth is beautiful, miraculous, and probably the single most dangeorus event that most of us will ever encounter in our life times."

그런 내게 누군가 교과서 맨 앞장에 <맞아요, 탄생이 정말 그렇답니다>하고 적어준 것 같아서, 이번엔 내가 이 문장에 위로를 받았다. 그리하여 크리스마스 이브에 맞닥뜨린,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이 말을 퍽 맘에 들어 하던 참이었다. 2시간 가량 호출 콜이 없어 새벽녘 눈을 붙이고 있었는데,

"지금 바로 분만실로 오시래요!"

하고 새벽 응급콜이 왔다. 우리 병원에는 처음 온 환자로, 갑자기 산통이 와서 응급실로 왔는데, 자궁이 이미 열려있고 태아의 상태가 좋지 않아 출산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기는 30주 정도라 했다. 미숙아들의 주수는 예후에 영향을 많이 미치는데, 30주 정도라면 20주에 비하면 좋은 예후를 예상한다. 그러나 수술실에 도착하여 보니 분만한 아가는 예상과는 달랐다. 아기는 산도에서 빼낸 이후에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CPR(심폐소생술)을 시도하다가 죽는 아기들도 처음부터 아프가점수 (Apgar score: 호흡, 심박, 움직임, 찡그림, 색깔 등을 평가하는 점수로, 아기가 후에 좋아질지의 예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출생후 1분, 5분에 평가하며 대부분의 정상 신생아들은 9/10 정도 나온다)가 0점인 적은 거의 없는데, 이 아기는 아무런 움직임도 호흡도 없다. 아기는 이미 자궁 속에서 사산된 상태로 병원으로 달려온 것일까?

바로 CPR을 시작했다. 아기의 가느다란 기관에 삽관을 하고 앰부를 짜고 약을 투여하며 손가락으로 가냘픈 가슴팍을 누르며 심장 마사지를 하였다.

'....이러려고 오늘 내가 신생아 심폐소생술 책을 읽고 있었나‘라는 생각이 순간 스쳐 지나간다. 아기는 심박도 뛰지 않고 호흡도 움직임도 전혀 없다. 아기는 그 위험한 탄생의 순간을 결국 건너지 못한 것인가. 아기는 검푸르렀고, 죽은 작은 새처럼 보였다. 나의 심장은 아무 반응이 없는 아기의 심장과는 달리 미친 듯 쿵쿵거렸다.

'이 추운 날, 왜 이렇게 급히 나왔니 아가야.'

울고 싶었다. 살 수 있을 주수에 아기가 죽는 것을 본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주수가 괜찮아도 아기의 탄생을 위협하는 요소들은 너무 많다. 출생이라는 관문자체가 pass or fail이다. 원인이 밝혀질 때도 있고 밝혀지지 않을 때도 있다. DNA의 문제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으며, 자궁 내 원인일 때도 아닐 때도 있다. 그러니 아기가 사산된 상태였다고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출생한 지 5분이 지나고도 CPR에 아무런 반응이 없다니, 이제 그만 죽었다고, 이미 죽어있었다고, 받아들여야하나 할 무렵, 갑자기 움찔하고 아주 작은 움직임, 그러니까 아기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 같은 떨림이 느껴졌다. 착각인가?

혹시나 하고 다시 청진하는 나의 귀에 아주 느리게 심장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미약하나 확실한 심장박동소리였다.

참 이상하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때, 포기해야하는지 의구심을 가질 때, 모든 바이탈 사인이 잡히지 않았었는데, 한숨을 쉬거나, 손가락을 움찔하며 살아나다니. 꼭 나쁜 꿈속에서 가위 눌린 것을 풀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이려고 애쓰는 것처럼 말이다.

그 작고 가녀린 손가락의 움직임. 아주 힘겹게 들리기 시작한 심장소리. 살아있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아기가 사력을 다해 보여 주였으니, 나 역시 가위눌림에서 풀려나야한다.

에피네프린도 한 번 더 주고, 앰부(AMBU: air mask bag unit-수동 인공호흡기)를 짜면서 살아난 이상 할 수 있는 일들을 모두 해야 한다. 기도삽관튜브(호흡유지관)로 들어간 산소가 이제야 아가에게 닿는 듯 까맣게 죽어있던 살갗이 불그스레 핏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 새벽 수술실에서 가슴을 쿵쿵거리던 우리 모두, 모든 의료진이 숨을 멈추고 있었던 것도 몰랐듯이 다시 숨을 토해내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이브 그 새벽의 아기의 출생은 몇 개의 랩과 아프가 스코어로 요약되었다.

APGAR 0점/6점. 출생 직후 0점. 그리고 5분 후, 6점.

다음날 아침 출근한 동기는 이를 보고

"리스마스이브 새벽에 죽다 살아나다니 자기가 예수님인줄 알았나봐“하며 농담을 했다.

정말 나도 어느덧, 크리스마스의 기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신생아 집중치료실보다 크리스마스의 선물을 필요로 하는 곳은 없을 테니까. 아가가 죽은 상태로도 맞이할 수 있었던 아침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서성이며 한없이 불안해하던 보호자에게 무거운 한숨과 눈물을 토해내게 해야 했겠지. 크리스마스에 밝게 웃는 사람들 틈에서 그 보호자는 더더욱 무거운 눈물을 흘렸을 게다.

그러나 대신에 아기는 힘들게 나왔지만 이제 안정되어가고 있다고, 보호자에게 말해줄 수 있는 아침이라니,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할 수 있는 아침이 감사했다. 이 아기가, 예전의 우리들이, 그리고 우리의 아기들이 그 모든 위험에서 빠져나온 기적을 살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게 해준 크리스마스라 다행이야.

"Birth is beautiful, miraculous, and probably the single most dangeorus event that most of us will ever encounter in our life times."

‘수필’ 특히 ‘의사로서의 수필’은 환자에게나 타인에게 누가 되지 않아야 된다는 생각에, 쓸 때도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마음이었습니다. 사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제가 썼던 글의 배경이 신생아 집중치료실이었던 것이 우연은 아닙니다. 그 곳은 저를 외롭게, 지치게, 절망하게, 그리고 희망을 갖게 만든 곳이었으며 저의 백퍼센트 이상을 요구했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최근에 일어난, 신생아 집중치료실에서의 신생아 사망 뉴스는 너무도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신생아 집중치료실에서 삶을 마감한 작은 아기들과 그 부모님의 심정이 어떠할지 너무나 잘 알지만, 그 아이들은 “살 수 있었다”는 안타까움이 더 그렇습니다. 그 아이들은 “인프라의 개선으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 열악한 신생아 집중치료실의 시스템에 관한 논의가 없이 “사람”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현실은 더더욱 암담하게 느껴집니다. 감염관리료 500원으로 모든 감염을, 나아가 사망을 막으라고 제시하기 전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할 터이니 생존율을 높여달라고 지원할 수는 없는 걸까요? “최소의 진료”를 하지 않으면 언제든 삭감하겠다는 위협대신 “최선의 진료”를 해달라고 등을 두드려 줄 수는 없었던 걸까요? 언제든 사고가 날 수밖에 없게끔 짜여진 시스템을 “사람”이 죽을동 살동 하면서 막아오던 그 사고는, 삼풍백화점사고나 성수대교가 무너진 것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생명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서, 생명을 살리라고 말하는 작금의 현실은 너무나 큰 모순이 있어 보입니다. 당선소감과는 무관한 글이 되어버렸나 싶으나 누군가가 죽고 사는 현실을 태평하게 모든 것이 다 괜찮았고 행복했던 것 같은 추억으로 포장할 수는 없다는 마음에, 외면할 수 없는 현실에, 그리하여 모든 아이들이 더 개선된 환경에서, “충분히 치료받기를” 애타게 바라며 글을 씁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런데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나는 들었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내가 미워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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