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심리학회 "정신과 전문의만 가능한 인지행동치료 문제 있다" 지적

정부가 정신질환자의 의료비 부담을 줄여 치료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인지·행동치료에 대해 건강보험 급여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치료를 중단하는 환자들이 늘어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정부가 급여화를 하는 대신 인지·행동치료에 대해 정신과(전공의 3년차 이상)와 신경과 전문의로 자격을 제한했기 때문인데, 임상심리학계 등 전문가들은 인지·행동치료가 그동안 일정기간 수련을 받은 정신과 전문의나 임상심리사, 특히 임상심리사들에 의해 주로 이뤄져 왔다는 점에서 자격제한이 오히려 환자들의 치료기회를 박탈하는 부작용으로 야기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더욱이 인지·행동치료 수가가 투입되는 시간에 비해 낮게 책정돼 있는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수가가 너무 낮다보니 정신과와 신경과 전문의들조차 인지·행동치료를 아예 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국임상심리학회는 지난 17일 성신여대 미아운정그린캠퍼스에서 ‘인지행동치료 건강보험 정책 개편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주제로 공청회를 개최했다.

“인지행동치료는 의료행위가 아니다...의사들도 못한다”

이날 고려대 심리학과 권정혜 교수는 “우리나라의 470만명이 지난 1년간 정신질환을 경험했지만 정신과 상담을 받은 비율은 22%에 불과하는 등 정신의료서비스의 이용률은 매우 저조하다”면서 “인지행동치료는 우울증, 불안장애 등 많은 정신장애에 약물치료와 동등한 치료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권 교수는 그러나 “인지행동치료를 정신건강의학과와 신경과 의사만 해서는 국민의 정신건강문제를 개선시킬 수 없다”면서 “인지행동치료에 대한 교육과 수련을 받은 정신건강의학과, 신경과 의사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에 비해 임상심리사들은 지난 20여년 간 정신보건 전문요원으로 활동해왔다. 이들을 현장에 투입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인지행동치료는 의학적 치료가 아닌 심리학적 이론에 기초한 심리치료로, 의사만 해야 할 이유가 없다며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정책을 수행하는 나라는 없다고 비판했다.

마음사랑인지행동치료센터 민병배 센터장은 인지행동치료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의료인이 하는 것이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민병배 센터장은 “정부가 OECD의 권고안에 따라 정신건강복지법을 전면 개정해 인지행동치료도 급여 항목으로 신설했다. 하지만 정신건강복지법에서는 인지행동치료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정신건강임상심리사를 배재하고 있다”면서 “결국 병원에서 (임상심리사들이)근무할 기반이 없어졌다. 이는 임상심리사들을 병원에서 떠나라는 소리”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날 공청회에서는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의사들도 인지행동치료를 하기 쉽지 않다는 지적도 나왔다. 급여 기준에서 개인·집단정신치료 등과 인지행동치료의 중복산정을 인정하지 않기로 했는데 중복산정 불가에 비해 인지행동치료의 수가가 턱없이 낮기 때문에 이를 하려고 하는 의료기관이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한양대 구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대호 교수는 “급여화가 시행되면 앞으로 대한민국 병원에서는 아무도 인지행동치료를 안할 것”이라며 “정신과학회와 복지부와의 최악의 딜로, 인지행동 치료자 입장에서는 최악의 결과가 나왔다”고 말했다.

김대호 교수는 “정부 입장에서는 비용은 줄이고 급여로 치료를 전환한다는 생색내기가 될 것이고, 학회는 다수의 개원의의 이익을 대변하게 된 것”이라며 “정신과학회 내에서도 인지행동치료의 이해가 너무 낮은 게 문제다. 아무나 프로토콜 두장을 읽어서 하는 것으로 아는 이들이 있는데 정신과 내에서 인지행동치료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안타까울 따름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정신과 내에서 인지행동치료를 해온 사람들의 절반은 안할 것이다. 수가가 낮은데 정신과 상담을 안하고 인지행동치료를 할 사람이 누가 있겠냐"며 "임상심리사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예 시행할 수 있는 인력도 없게 된다. 결국에는 아무도 인지행동치료를 안하게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가 배출한 전문인력을 활용하지 않고, 재정만 절감하려고 한다는 강도 높은 비판도 나왔다.

가톨릭대 심리학과 박기환 교수는 “인지행동치료 전문가는 일정시간 교육을 받고 실습과 훈련 등을 통해 학습한 자여야 하지만 이미 자격을 받은 이들을 활용하지 않고 배제하는 것은 국가적 낭비이고, 홍보용으로 전략을 짜놓은 사기일 뿐”이라고 했다.

메타의원 최영희 원장은 “인지행동치료는 ACT(Academy of Connitive Therapy)의 전문가 자격 심사에 지원해 인지행동치료 전문가 자격을 받거나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에서 발급하는 인지행동치료전문가 자격을 받은 후 치료를 하고 급여를 신청하도록 바꿔야 한다”면서 “정신과 전문의나 전공의들도 이러한 수련과정을 거쳐 전문가 자격을 획득한 후에 시행하도록 하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 대해 한국뇌전증학회 홍승봉(삼성서울병원 신경과) 회장은 “신경과에서도 정신보건 임상심리사가 포함돼야 한다고 의견을 냈지만 왜 이렇게 결과가 나왔는지 모르겠다”면서 “인지행동치료는 임상전문가뿐만 아니라 의사 등 모두가 알아야 하는 질환이며, 심리사만도 의사만도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협업을 해야하는 분야”라고 강조했다.

한편, 복지부는 지난 1월 31일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를 통해 인지·행동치료의 프로토콜을 표준화하고, 이에 맞게 시행된 ‘인지행동치료’에 대해서는 건강보험을 적용하기로 했다.

인지행동치료의 경우 의원급 의료기관 기준으로 인지치료는 개인(30분 이상)이 4만4,264원, 행동치료는 집단(8명 이내)으로 1만3,283원이며, 급여 인정은 12회까지만 가능하다. 개인·집단정신치료 등과 중복산정은 인정하지 않으며 정신과(3년차 이상 전공의)나 신경과 전문의로 자격이 제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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