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이스라엘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동유럽에 이어 이번에는 이스라엘-요르단을 찾았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여행 5일째 아침이다. 두어날 쯤 부글거리는 속을 컵라면으로 달래기로 했다. 숙소에서 컵라면을 먹고 나니 속이 차분해지는 느낌이다. 방안에 밴 냄새를 내보내려고 창문을 열었는데 고장이 났는지 잠기기 않는다. 프런트에 내려가 고쳐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식당에 가서는 야채와 달걀, 그리고 후식과 커피를 들었더니 포만감이 든다.

암만성채 주변의 스카이 뷰(좌, Wikipedia에서 인용함), 성채의 안내도(우)

오늘의 첫 번째 일정은 암만성이다. 1.7k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암만성은 암만의 도심을 이루는 일곱 개의 언덕 가운데 해발 850m의 자발 알 칼에이(Jabal al-Qal'a)의 L자형으로 된 꼭대기에 위치한다. 신석기 시대의 유물인 토기가 발견된 것을 보면 신석기시대부터 우마이야왕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우마이야 시대 이후 1878년까지는 베두인사람들이나 농부들이 한철을 보내는 정도로 잊혀진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시대의 헤라클레스신전, 비잔틴교회, 우마이야 시대의 왕궁 등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오랜 역사를 통하여 위대한 문명이 깃든 장소임이 틀림없다. 1920년대부터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요르단의 고고학자들이 발굴작업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상당부분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중기 청동기시대(1650-1550 BC)의 무덤에서는 도자기와 왕쇠똥구리 모양의 인감이 발견되었다. 철기시대 무렵 세운 것으로 보이는 비문에는 초기 페니키아 사람들의 글자가 기록되어 있다.(1)

암만성채 성벽이 만만치 않다. 성벽 아래 어디에선가 우리야 장군이 전사했을 것이다. (좌), 성벽에서 내려다본 암만 도심의 모습(우)

암만성은 통일 이스라엘의 2대 왕 다윗이 부하 장군 우리야의 부인 밧세바와 저지른 불륜을 감추기 위하여 암만성 전투에 투입하여 전사케 하였다는 바로 그곳이다. 유대 12지파 가운데 유다지파에 속하는 다윗은 베냐민 지파 출신 사울왕에 이어 2대 왕에 올랐다.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죽이면서 사람들의 신망을 얻은 그를 죽이려는 사울왕을 피해 달아났을 때 만난 헷(히타이트)족인 우리야 장군은 다윗을 섬겼다. 다윗은 오랜 방랑 끝에 사울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세 아들과 함께 전사한 뒤에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다윗은 이웃 암몬왕국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사울에 쫓길 때 나하스왕이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암몬왕국과 전쟁이 벌어진 것은 나하스왕이 죽었을 때, 다윗왕이 보낸 조문사절을 새 왕 하눈이 욕보였기 때문이다. “조문하러 온 게 아니라 정탐하러 온 거다”라는 신하들의 말에 하눈왕은 사신들의 수염을 반만 깎고 바지의 엉덩이 부분을 도려내어 돌려보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3만 3천여 군사를 출동시켜 도발하기까지 했다.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려는 다윗왕을 부하들이 말려 가나안에 머물게 되었다. 어느 날 다윗이 왕궁을 산책하다가 궁밖에 있는 집 마당에서 목욕을 하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궁으로 불러들여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암만성으로 출정한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Bathsheba)였다. 그날의 관계로 밧세바는 임신을 하였고, 임신사실을 알게 된 다윗왕은 우리야를 불러들여 집에 가서 쉬라고 명한다. 밧세바의 임신을 감추려는 계책이었다. 하지만 우리야장군은 고생하는 부하들을 두고 집에서 편히 쉴 수 없다면서 군막을 지켰다.

결국 다윗은 암만성 전투의 총사령관 요압장군에서 밀명을 내려 우리야를 선봉에 세워 적과 싸우다 죽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야의 장례가 끝나자 밧세바를 궁으로 불러들여 첩으로 삼았다. 여호와는 선지자 나단을 보내 다윗왕을 꾸짖고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죽을 운명임을 예고한다. 그제서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고, 침식을 금하면서 여호와께 기도했지만, 예언은 바뀌지 않았다. 아이가 죽은 뒤에도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하여 다시 아들을 얻었으니 그 아들이 솔로몬이다.(2)

솔로몬왕의 출생과 왕위계승이 하늘의 뜻으로 정해진 것이라고 암시하려는 의도인지, “밧세바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암의 딸이며, 아히도벨의 사랑스런 손녀다. 그녀는 여호와 신앙으로 무장된 신실한 인격과 더불어 외모마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사무엘 하 11:2-3)”라고 기록되어 있다. ‘밧세바’는 딸을 뜻하는 ‘바트’와 맹세를 뜻하는 ‘세바’의 합성어로서, ‘맹약의 여자’ 또는 ‘맹세의 딸’을 의미한다.(3)

십계명에도 ‘간음하지 말라’고 명시되어 있었음에도 부하의 아내를 유혹한 다윗과, 그 유혹에 넘어간 밧세바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백제의 개루왕 때의 도미 부부의 설화와는 너무 대조된다고 생각했다. 평민인 도미부인으로서는 왕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정조를 지켰다는 도미 부부의 설화와는 달리 다윗왕은 자신을 보좌해온 충절한 부하장수의 아내를 유혹했을 뿐 아니라, 그 아내인 밧세바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다윗왕의 유혹에 응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밧세바가 왕궁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알몸으로 목욕을 한 것 자체가 왕을 유혹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암만성채에서 내려다 본 시가 모습. 건너편 언덕을 기대어 로마 원형극장이 있고 그 아래로 로마광장이 있다. 원형극장 위로 있는 언덕에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이 있었다고 한다.(좌), 원형극장 근처에 있다는 님페움신전(우)

암몬성에 입장해서는 성 주변에 대한 설명을 먼저 들었다. 성벽 아래를 지나는 도로는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던 길이다. 건너편 언덕 아래에는 로마시대에 지은 6,000석 규모의 원형극장이 있고, 그 앞에는 로마 광장이 있다. 언덕기슭은 6일 전쟁 때 흘러든 팔레스타인사람들이 기거하던 난민촌이 있던 곳으로 이제는 번듯한 집들이 들어서 있다.

암만성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원형극장에서 200m 떨어진 곳, 수크 알크드라(Souq Al Khudra)와 하셈가(Hashem Street) 사이에 암만 님페움(Ammal Nymphaeum)이 있다. 요르단에 오던 날 제라시에서 본 님페움과 같은 성격의 신전이다. 제라시의 님페움보다는 섬세하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손상이 심하지 않은 암만 님페움은 높이 20m, 너비 68m의 반육각형구조로 2세기 후반에 건설되어 2,000년 이상 이 지역에 거주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아름다운 유적이다.

헬레니즘 양식의 영향을 받은 로마의 건축술로 물이 흐르는 동굴 위에 건설된 님페움은 신화적 존재인 님프에게 헌정된 신성한 장소로 믿어왔다. 님페움은 도시의 급수시설의 핵심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고 도시의 건강을 상징하는 장소였다. 서기 747년에 있었던 지진으로 손상을 입어 지금은 절반 정도 남아 있지만, 12m가 넘는 코린트양식의 기둥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인상적일 것이다.(4) 이렇게 상세하게 적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지는 못했다. 인원이 많아서 통제가 어렵다는 인솔자의 고백이다.

암만성채에서 처음 만나는 유적. 헤라클레스 신전(좌), 기둥반대편에 얹혀있는 헤라클레스의 손가락(우, Wikipedia에서 인용함)

암만성채의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가다가 보면 헤라클레스 신전을 먼저 만나게 된다. 헤라클레스신전은 게미니우스 마르시아누스(Geminius Marcianus)가 아라비아 속주의 총독을 지내던, 서기 162-166년 사이에 언덕 아래 보이는 원형극장과 같이 건축되었다. 121 x 72m의 터에 길이 약 30m, 폭 24m 규모였을 것으로 보이는 신전은 약 10m 높이의 기둥 6개만 남았다. 신전에 봉안된 헤라클레스상은 키가 12m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역시 지진으로 파괴되어 세 손가락과 팔꿈치만 남았다. 신전의 대리석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비잔틴교회를 세우는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전 안에는 바닥 위로 튀어나온 초석이 있다. 아마도 예루살렘에 있는 바위돔(Dome of the Rock; 구시가에 있는 사원산의 이슬람 사원) 아래에 있는 바위에 비견되는 신성한 돌일 것이다. 신전의 바닥에서 암몬왕국 시절의 구조가 발견되었다. 아마도 언덕 아래에 있는 강에서 보기에는 가장 높은 곳으로 보이는 이곳에 밀콤 신전(temple to Milcom)이 있었을 것이다.(5)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밀곰이라고 옮기는 밀콤은 몰렉(Molech), 혹은 말캠(Malcam)이라고도 하는데, 암몬족 사람들의 신으로 일부에서는 왕의 칭호라고도 한다.(6)

그런 이유로 이곳을 밀곰 신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듯하다. 하지만 현존하는 유적은 로마시대에 건축된 헤라클레스 신전이 맞다. 헤라클레스신전을 암몬족 신전의 유적 위에 세운 것은 이전에 이곳을 지배하던 사람들을 지키던 힘의 원천을 부정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이런 경향은 현대의 일부 집단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정권이 바뀌면 새로 들어선 정권이 전 정권이 벌였던 일을 전면 부정하거나, 새로 부임한 조직의 장(長)이 자신의 철학을 담은 정책을 새로 추진하는 것도 이와 다름이 아니다. 아무래도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려면 많은 노력이 투입되어야 하는 일이므로, 큰 문제가 없다면 앞서 벌여놓은 일들을 잘 수습하고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불필요한 힘의 낭비를 막는 일일 수 있다.

헤라클레스신전 가까이 있는 비잔틴 성당 유적. 앱스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헤라클레스 신전에서 북쪽으로 100m 정도 가면 비잔틴 성당 유적이 있다. 비잔틴 성당은 5-6세기에 건축되었다. 현존하는 터로 보아서는 수십 명의 신자만이 한 번에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규모의 교회이다. 본당에는 코린트양식으로 장식된 기둥이 두 줄로 늘어서 있고, 북쪽으로 반원형 애프스(apse)가 있고 출입구는 동쪽으로 나있다. 교회는 아마도 이슬람세력이 암만을 장악한 7세기 무렵부터 방치되었을 것이다. 유적발굴과정에서 주두에 얹혀 중앙의 돔을 지지하던 대리석 원반이 발견되어 제자리를 찾았다.

우마이야궁전 터에 있는 ‘비르카’라고 부르던 수조

비잔틴교회를 지나면 우마이야궁전 터가 있고, 그 오른 쪽에 비르카(Birka)라고 부르던 커다란 수조가 있다. 서기 728년 경에 건설된 수조는 두께 2.5m, 직경이 17.5m, 깊이가 6m에 달해 최대 1,300㎥의 물을 저장할 수 있어, 암만성의 중요한 상수도원이었다. 암만성채에는 비가 오면 요새에 떨어지는 빗물을 모아 이 수조로 보내는 집수체계가 갖추어져 있었다. 집수관을 통해 들어오는 물은 서쪽에 있는 침전조에서 걸러져 수조로 유입되었다. 수조의 벽과 바닥은 물속에서 굳는 회반죽을 두텁게 발라 누수를 방지하였다. 수조 내부에는 저수량을 측정하는 기둥과 계단이 벽에 붙어있다. 계단은 우기에 대비하여 수조를 청소하거나 바닥에 가라앉은 것들을 치우기 위하여 수조에 들어갈 필요가 있을 때 이용하였다. 수조의 북쪽에 있는 깊은 우물은 수조 서쪽에 있는 목욕시설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었다.(7) 아랍문명의 물관리 기술은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건조한 지역에서 살아남으려는 치열한 노력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우마이야 궁전의 키오스크(좌상), 키오스크의 내부에서 올려본 돔(좌하), 키오스크의 내부 양쪽으로 있는 아치(우)

수조 옆에는 목욕탕 터가 있고, 그 옆에 우마이야 궁전의 출입구에 해당하는 “키오스크(kiosk)”또는 “기념비적 인 출입구(monumental gateway)”로 알려진 돔형 건물이 있다. 우마이야왕조시절(서기 661-750) 알 카스르(al-Qasr)라고 했던 궁전을 요새 안에 지었다. 8세기 상반기에 지은 궁전은 행정시설이거나 관리의 주거시설이었을 것이다. 궁전은 비잔틴양식으로 지어졌을 것으로 보는데, 대부분의 궁전건물이 폐허가 되었지만, 유일하게 복원된 키오스크가 그리스 십자가형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기존에 있던 비잔틴 건물을 활용하였을 수도 있다. 키오스크의 내부는 반원형 아치를 양쪽으로 내었고, 벽은 섬세한 문양을 새긴 돌을 쌓았다. 천정의 돔은 나무로 엮어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키오스크를 나서면 복원을 기다리는 궁성 터가 남아 있다.

참고자료:

(1) Wikipedia. Amman Citadel.

(2) 나무위키. 다윗.

(3) 크리스쳔투데이 2010년 12월 19일자 기사. [송태흔 칼럼] 다윗의 아내가 된 밧세바(Bathsheba).

(4) Amman New. 2010년 5월 15일자 기사. Amman Nymphaeum - a monument to the sanctity of water.

(5) NET(near East Tourist Agency). Aman. Philadepphia.

(6) Wikipedia. Moloch.

(7) Discover Islamic Art. Citadel of Amman (Water Reserv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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