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찬 에스웰빙의원

피천득 선생님은 수필 <인연>에서 “아사코(朝子)와 세 번 만났는데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고 했지만 내게는 세 번째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따르릉’ 전화 소리에 냉커피를 마시려다가 전화를 받았다. 시간은 9시가 갓 지나고 있었다. 진료 시작이 9시 30분부터여서 직원들은 출근을 아직 안했지만, 나는 개업한 지 얼마 안 되서 정리할 것이 많아 일찍 출근했다. 시원한 커피한잔 하면서 더위 좀 식히고 정리 하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계속 울려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OOOO 의원입니다.”

“저기요, 엊그제 토요일 거기서 코에 필러(filler)¹를 맞았는데요, 어제 자고 일어나니 노랗게 고름이 잡혔어요. 그래서 혹시 받나 싶어서 어제도 전화 몇 번 했었고, 오늘은 8시 30분부터 계속 전화를 하고 있는데 드디어 받으시네요.”

나는 엄청 당황하면서 “예? 뭐라고요? 고름이요? 고름이 얼마나 심한데요?” 그녀는 코 전체에 고름이 잡혀있어서 너무 보기 싫고 무섭다고 했다. 어디 사는지 물으니 병원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산다고 했으며, 코가 이래서 출근도 못하고 급작스럽게 병가를 하루 냈다고 한다. 그래서 빨리 병원으로 오라고 하니, 5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마스크를 쓰고 왔다.

처치실에서 관찰을 하니, 쌀알 절반 정도 크기의 농포가 코 전체에 짝 깔려 있었다. 수많은 농포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머릿속이 깨끗해지면서 ‘이것을 터트려야 하나?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고 멍해져서 10초 정도 염증 부위를 보고만 있었다. 이제 갓 한 달된 초자배기 개원 의사인데, 이런 심한 염증을 보니 어떻게 할지 몰라 그저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린 후에, 나는 “진료의뢰서 써 줄 테니 큰 병원 가서 진료 한번 받아 보세요” 했더니 그녀는 “이 병원에서 토요일 필러 맞고 이렇게 됐는데 혼자서 큰 병원으로 가라는 게 말이 되나요?” 한다. 이 말을 들으니 누군가가 내 머리에 ‘전기충격파’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 말이 옳다. 내가 한 시술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고, 그녀는 지금 고름 잡힌 것이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르는데, 그녀 혼자서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하니, 그녀 입장에서는 황당하겠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공보의 말년 휴가부터 개원 전까지 여러 가지 개원가에서 하는 시술을 보고 배운 원장님에게 전화를 했다. 환자 상황을 설명하니 병원으로 모시고 오라고 한다.

‘병원이 어디였지? 어느 길로 가야 하지?’ 아무리 생각을 해도 평상시 자주 갔던 길인데도, 가는 길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도 멍하고, 가슴은 두근두근해서 운전하면 도저히 안전하게 가지 못 할 것 같아 둘이 택시를 타고 그 병원에 갔다.

진료 시작한 지 얼마 안됐지만 잘되는 병원이라 환자가 대기실에 많이 있었다. 접수 직원에게 원장님께 연락하고 왔다고 하니, 그녀를 처치실로 옮기고 원장님을 모시고 왔다. 원장님은 상태를 확인하면서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며 그녀를 먼저 안심 시키고, “이전에 어떤 시술이나 수술 받은 적이 있으세요?” 그리고 “혹시 다른 질환이나 복용하는 약물은 있으세요?” 등의 질문을 하신다. 그녀는 1~2년 전에 다른 병원에서 코에 필러를 맞은 적이 있다고 했고, 먹는 약은 없지만, 지금 생리기간이라고 했다. 그 선생님은 다른 병원에서 맞은 필러가 조금 남아 있거나 혹은 생리기간이라 평상시보다는 출혈 성향이 약간 높은 상태에서 코에 필러를 맞아 국소 염증이 생긴 것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 앞으로 한 달 정도 소독을 받으면서 항생제 주사와 약을 복용하면 흉터 없이 치유가 될 것이니 걱정 말고 소독을 잘 받으라 하셨다.

그녀를 대기실에 잠깐 기다리게 한 후에, 나한테는 어떤 방법으로 소독을 하는지, 코 염증에는 어떤 균 종류가 많으니 항생제는 어떤 약이 적합한지, 흉터가 안 생기게 매일 소독을 해야 하고, 그리고 환자를 안심시키면서 정성껏 치료를 해주라고 당부하셨다. 그러면서 코 부분이 다른 부위보다 쉽게 염증이 생기고, 생기면 치료가 잘 안 되고, 그리고 염증이 오래가면 패인 흉터가 남을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하셨다.

같이 택시를 타고 오면서 더운 여름인데도 어쩔 수 없이 마스크를 쓰고 있는 그녀에게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지하철로 30분쯤 걸리는 회사에 다녔으며, 9시까지 출근한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은 소독을 했으니, 내일부터 8시 20분에 소독 받고 출근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이유가 뭐든 간에 내 시술로 염증이 생겨 죄송하다고 다시 한 번 사과했다.

그녀를 보내고 종일 진료를 어떻게 했는지 모를 정도로 하루가 지나갔다. 개원한 지 한 달 되어 병원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날씨가 더워 사람들이 많이 내원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천천히 생각을 해봤다. 먼저 그녀의 ‘병력 청취’를 잘못한 것 같았다. 전에 다른 병원에서 어떤 수술이나 시술을 받았는지 묻지 않고 곧바로 시술을 했으며, 출혈을 일으킬 수 있는 약 복용이나 몸 상태도 확인을 못한 것이다. 여성들 생리기간에는 기전은 확실히 모르지만 평상시 보다는 출혈경향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것을 미리 확인했다면, 시술을 생리후로 미뤘거나 아니면 염증 예방을 강하게 했어야 했는데 그런 조치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시술 부위에 대한 의학 지식이 부족했다. 큰 혈관이나 신경, 주요 구조물 등 해부학적인 면은 잘 알고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코 끝 부위는 염증이 잘 생기는 부위라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피부가 괴사(壞死)²에 이르지 않았고, 표피에 단순 염증만 생긴 거라서 치료를 하면 좋아진다는 것이다. 만약 피부가 괴사 됐다면 이식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얼굴 정 중앙에 큰 흉터가 남을 수 있는데, 그렇게까지 되지 않은 것이 경험이 미천했던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다음날 아침 8시 20분에 그녀는 더운 여름인데도 마스크를 한 채로 병원에 왔다. 그녀 한명 소독을 위해서 직원을 일찍 출근시키지는 못하고, 혼자서 소독을 하게 되었다. 소독은 혼자 충분히 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근육주사였다. 지금같이 경험이 충분했으면 예방주사처럼 어깨 근육에 주었겠지만, 그때는 경험도 미천하고 부작용 때문에 당황하여 관례대로 엉덩이에만 줘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염증이 빨리 좋아지려면 약과 함께 주사도 맞는 게 좋다고 설명하면서 남자의사인데 근육주사 맞아도 괜찮은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어제도 주사를 맞았고, 빨리 좋아져야 부작용이 안 생기는 것도 들어서 알기에, 주사를 나보고 주라고 한다. 지금은 성희롱에 휘말릴 수가 있어서 모든 시술이나 처치 할 때 직원을 대동하고 하는데, 그때는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소독, 근육 주사를 했다.

‘일요일은 쉬자고 할까?’ 하다가도 나 때문에 생긴 부작용인데, 힘들다고 소독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일요일도 시간을 정해 병원 문을 열고 소독했다.

1주일 정도 아침마다 소독을 하고 주사를 주니 염증이 조금씩 잡히는 것이 보였다.

어떤 날은 “오늘 사람들 많은 곳에서 발표를 하는데 마스크 쓰고 해야 한다"면서 불평도 했다. 발표 다음날, “발표 잘 했어요?” 물어보니, 사람들이 발표 내용보다는 더운 여름에 감기도 아닌데, 왜 마스크를 쓰는지에 더 궁금했다고 한다. 그래서 미용시술 받고 부작용이 났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상처가 생겨 마스크를 했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일주일 이상 근육주사도 맞고, 소독을 매일 2주 정도 하니 이제는 염증이 많이 잡혔다.

2주가 지나니 좁쌀같이 고름이 가득 차있던 농포가 거의 사라지고 코 부위에 빨갛게 염증 소견만 남았다. 그녀는 처음에 불평을 많이 했지만, 매일 소독을 받고, 상처도 좋아지니 불평하는 일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중간에 상처 확인 및 경과 관찰을 위해서 같이 그 병원에 다시 갔었다. 원장님은 “많이 좋아졌고, 계속 좋아질 것이니 지금처럼 1~2주만 더 하면 완벽히 좋아진다”고 하셨다.

3주가 지나니 코 부위에 빨간 염증도 많이 사라지고 멀리서 보면 거의 안보일 정도로 상처가 좋아졌다.

4주가 지나고 한참 심했던 무더위도 꺾일 쯤에 그녀는 드디어 마스크에서 해방이 되었다. 그리고 정말 다행인 것은 내 정성이 통해서인지 몰라도, 아무 흉터 없이 상처가 깨끗하게 치유가 되었다.

나는 아침 일찍 소독하는 일이 끝났다. 그녀는 어떤 보상이나 심지어 맞았던 필러 값 환불도 요구하지 않았다.

이렇게 그녀와의 첫 번째 만남은 끝이 났으며, 나는 그녀를 점점 잊어가고 있었다.

그녀와의 두 번째 만남도 긴장과 걱정으로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개원 2년차 봄이 올 무렵에, 전자차트 진료 대기명단에 갑자기 그녀 이름이 뜬 것이다. 그녀 이름을 보자마자 ‘드물지만 몇 개월 후에 생기는 지연염증 때문에 온 것인가? 만약 그 것 때문에 온 것이라면, 큰일인데 진짜로 큰일....지연염증으로 염증세포가 딱딱하게 굳어 흉터가 생겨서 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치유가 잘 안되는데....’ 하면서 엄청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웃고 들어오는 것이다. 아무리 오랜만에 와서 반갑더라도 ‘부작용 때문에 왔는데 나를 비웃는 건가?’ 하면서 엄청 긴장을 하고 있는데, 다행히 부작용이 아니라 이번에는 점을 빼러 왔다고 한다. 나는 ‘휴.... 휴....’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접수한 OO씨는 남자친구인데 같이 점을 빼러 왔다고 했다. 함께 온 이유를 물으니 곧 결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코는 그 이후로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코에 부작용이 생겨 더운 여름에 한 달 정도 고생을 했는데, 시술한 나를 욕하지 않고 결혼할 남자랑 같이 점을 빼러 오다니, 나는 매우 기뻤다. 이번에는 더 정성을 다해서 치료 해줬다. 그리고 그녀는 결혼을 해서 이 동네를 떠났다.

그로부터 2~3년 뒤에, 점을 빼고 난 후에 빨간 흉터가 생겼다면서 거의 매일 와서 불평하는 사람이 있었다. 빨간 것은 흉이 아니고 피부 재생이 아직 덜 된 것이어서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고 몇 번 이나 말했지만, 그 사람은 나를 믿지 못했다. 그래서 더운 여름에 묵묵히 마스크까지 쓰면서 한 달 동안 고생했던 그녀가 생각나고 고마워서 문자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몇 년 전에 코 필러 때문에 고생하셨던 OOOO 의원 원장입니다. 그동안 잘 계셨는지요? 혹시 코에 지연염증이나 부작용이 생기지 않았는지 걱정 되고 궁금해서 문자 보냅니다” 했더니 그녀는 “그때 엄청 당황하시던 선생님이 생각나요. 정성껏 치료를 해줘서 지금은 괜찮고, 다음에 친정 가면 한번 방문할께요” 했다. 그런데 아직까지 병원에 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와의 세 번째 만남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녀 시술 이후로 모든 시술을 할 때 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 격언을 마음에 속삭이면서 시술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 이후 10년 동안 큰 부작용은 없었다.

만약 그녀가 불평을 하면서 “당신이 이렇게 만들어서 난 당신을 믿지 못하니 다른 병원에 가겠다”고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모든 시술에 자신감이 없어지고 점점 위축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초짜 개원 의사인 나에게 무엇보다도 ‘병력 청취’가 중요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려준 ‘고마운 사람’이다. 나를 믿고 한 달 동안 고생했던 그녀를 생각해서 그 이후에는 항상 ‘조심, 또 조심’하면서 시술 및 처지를 하고 있다.

그때부터 개원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녀를 소독해줄 때처럼 아침 일찍 출근을 하고 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시간에 전날 일을 돌아보고 오늘 할 일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 지금은 그러지 않지만, 한동안은 아침 일찍 전화벨이 울리면 ‘또 무슨 부작용 생겼나?’ 걱정과 긴장을 하면서 전화를 받았었다.

와이프에게 그때 한 달 동안 매일 일대일로 만나 소독했었는데 혹시 딴마음 가졌다면 의사와 환자 관계를 넘어서 지금 내 옆에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하니 “아이고, 그러세요?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좋은 사람 있으면 가세요” 이런다. 와이프의 그런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필러(filler)¹: 이름처럼 채워주는 물질로, 인체에 무해한 성분을 주름이 깊은 곳 (예를 들어 팔자주름)이나 낮은 콧대에 채워서 예쁘게 할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 성분에 따라 1~3년 정도 지속됨.

괴사(壞死)²: 생체 내의 조직이나 세포가 부분적으로 죽는 일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 한미약품과 청년의사, 그리고 제 졸작을 읽어주시고 상까지 주신 심사위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먼저 전합니다.

수상소감을 어떻게 쓰지? 하면서 고민을 하니 4학년인 둘째가 "부족한 저에게 이런 훌륭한 상을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하면 된다고 하네요. 동감합니다.

“스튜~핏”, "브로큰 센텐스”, "주어하고 술어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빨간 펜 선생님이 되어 주신 우리 집 제일 높으신 분(와이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두 딸이 올해도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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