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준 제3야전군사령부

“전이는 피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른 이에게 영향을 줍니다. 왜 환자-의사 관계에서는 그것을 원치 않지요?” (영화 ‘패치 아담스’ 中)

의사들이 전이(transference: 정신분석학에서는 보통 환자가 이전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경험했던 생각 혹은 감정이 치료자와의 관계로 전치되는 현상을 의미하나, 여기에서는 환자와 의사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감정 이입을 의미한다)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것이 환자에 대한 임상적 판단을 흐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는 환자의 치료 과정 중 언제나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환자에게 나의 감정이 이입되는 순간 환자는 의학적인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그 치료의 여부가 나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며, 그때부터 의사는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감정에 이끌린 치료 방침을 택하게 된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의사의 계명 중 하나인 ‘절대로 내 가족을 직접 치료해서는 안 된다’는 지침은 바로 이 전이에 의한 판단 교란을 막고자 했던 수없이 많은 선배 의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이 의사들이 학교와 병원에서 배우는 전이에 관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과연 옳은가? 아니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기 전에, 영화 ‘패치 아담스’의 주인공의 말처럼 환자를 진료하며 그에게 나의 감정이 이입되지 않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의사들은 자신의 이름 앞으로 배정된 환자를 만나면서부터 ‘전이를 주의하라’는 가르침을 시험하고, 그로부터 고뇌하기 시작한다. 청명한 하늘 아래 있던 의대생 시절엔 ‘나는 저렇게 냉랭한 의사가 되지 말아야지’ 다짐했었지만, 의사가 된 후 수없이 많은 죽음을 눈앞에서 보면서 그에 무뎌진 나머지 의사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공감 능력이 사라진 것은 아닌지 두렵게 되는 것이다.

박재영은 <문학 속의 의학>에서 의사들의 고뇌를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환자와 의사의 거리는 과연 어느 정도가 적정한가?…과연 의사되기의 첫 발은 환자에 대한 개인적 관심을 제거하고, 환자를 ‘질병을 보유한 객체’로 보는 시선을 배우는 것으로 시작되는가?”

이는 비단 아직 경험이 부족한 청년 시절 의사의 고민만이 아니다. 남궁인의 저서 <지독한 하루>의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가슴 저미는 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고락을 함께 한 젊은 제자 외과 전공의가 위암으로 진단되어 그의 수술을 집도하게 된 외과 교수는, 그의 배를 열자마자 이미 복강 내에 퍼질 대로 퍼진 암 덩어리들이 발견되어 절제 수술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진 순간,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을 느낀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암 덩어리를 떼어내는, 의학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대수술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무도 그를 말릴 수 없었으며, 아무도 이를 잘못된 전이에 의한 쓸모없는 몸부림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수련 과정의 가장 힘든 시간을 지나보낸 의사는 어느 순간 객관성과 공감 능력이 균형을 이루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여러 스승과 동료의 가르침과 진료의 경험으로 길러진 의사로서의 객관성이 그의 인생 전체를 들여 쌓아올린 공감 능력과 조화를 이루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것이 전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깨닫는 순간이며, 앞으로 평생 환자를 대하면서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순간이다. 나는 이 순간을 위해 세 번의 눈물이 필요했다.

그 첫 번째 눈물을 흘렸던 당시 나는 이제 막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한 내과계 중환자실 인턴이었다. 중환자실 인턴의 임무는 일렬로 누워 있는 환자들의 피를 뽑고 욕창을 소독하고 소변줄을 가는 등 ‘의사의 잡일’을 하는 것이다.

일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한 할아버지 환자의 죽음을 보게 되었다. 나는 이 환자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가족은 있는지, 심지어 무슨 병으로 중환자실에 누워 있게 되었는지도 잘 몰랐다. 할아버지는 의식이 있어 보였지만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어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런데 왜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던 걸까?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 날 중환자실 한가운데서 텅 빈 공간으로 터져나간 나의 눈물을 이해할 수 없다. 뜻밖에 울고 있는 인턴을 발견한 중환자실 간호사가 나에게 티슈를 한가득 뽑아 가져다주었지만 나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인턴이 해야 할 일감이 밀려 있는 중환자실의 간호사는 이 불쌍한 풋내기 인턴을 차마 직접 부르지 못하고, 뻔히 보이는 중환자실 저 쪽 구석에서 아직도 울고 있는 인턴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서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어투로 밀린 일감을 상기시켜 주어 내 눈물을 멎게 했다. 나에게 그 전화는 ‘환자와 적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가르침의 의미로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기에는 아직 가르침과 경험이 더 필요했다. 두 번째로 눈물을 보였던 그 날 햇병아리 내과 주치의였던 나는 순환기내과 병동에서 일하고 있었다. 병동에는 이미 심장의 기능이 다해 가는 할머니 환자가 있었다. 할머니는 생의 마지막 시간을 이 병동에서 보내게 될 운명이었다. 할머니 심장의 마지막을 알려주는 부정맥이 일어났을 때 나는 부정맥을 제거하는 전기 충격을 지시했다. 그러나 역할을 다한 할머니의 심장이 꿈틀거리는 것도 잠시뿐, 할머니는 모든 가족이 지켜보는 앞에서 결국 숨을 거두었다. 막 마지막 숨이 꺼진 할머니와 가족들을 뒤로 하고 복도로 나온 나의 눈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똑같았다. 눈물은 멈출 기세가 없었다.

그러나 주치의를 시작한 나의 각오는 인턴일 때와 달랐다. 나는 이제 내과 주치의가 아닌가. 환자는 나를 신뢰하고 모든 의학적 판단을 나에게 맡길 텐데, 언제까지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리면서 다 죽어가는 환자의 가슴에 아무런 쓸모도 없는 전기 충격기를 들이댈 건가? 나는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어떤 환자나 의료진도 주치의의 눈물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병동 안쪽의 주치의 자리로 돌아왔다. 더 이상 나는 감정에 휘둘리는 햇병아리 주치의가 아니었다.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내과 전공의로 병동, 응급실, 그리고 중환자실에서 환자들의 목숨을 떠메고 미친 듯이 일했다. 아름다운 마무리와 비참한 마지막을 보고 또 보았다. 내과의 수련 과정은 나에게 전이를 주의하라는 가르침을 주는 데 더하여, 너무 많은 끔찍한 장면들을 본 나머지 그 어떤 상황을 만나도 감정이 움직이지 않는 냉랭함을 선사해 주었다. 드디어 나는 30분 간격으로 환자들의 사망을 선언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는 내과 주치의가 되었다. 의사로서의 객관성은 나의 공감 능력을 압도해서 전이와 같은 현상이 전혀 발붙일 수 없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환자들이 원하는 의사는 과연 이런 모습일까? 환자의 치료 과정 중 일어나는 수많은 변수들을 맞대하며 ‘그러면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와 같은 정확한 판단만을 내려주는 인공지능과 같은 의사를 환자는 신뢰하고 자신의 몸을 내맡기게 될까?

마지막 눈물로부터 2년이 훌쩍 지나 산전수전 다 겪은 내과 전공의 3년차가 되었던 해의 어느 날, 나는 암 병동에서 한 환자를 만났다. 유방암 4기라고 보기에는 전신 상태가 나쁘지 않은 50대 아주머니였다. 이제 4년차를 향해 가는 경험이 쌓여 어느 정도 여유를 부리는 주치의였던 나는 회진 때마다 아주머니와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여러 차례의 항암제 치료 결과 아주머니의 유방암은 소강 상태였다. 이번에 아주머니가 다시 입원하게 된 이유는 원인 모를 복막염이 생겼기 때문인데, 복수 천자 결과 염증 세포를 검출할 수는 있었지만 그 염증의 원인균은 확인되지 않았다. 나는 원인균이 불확실한 자발성 세균성 복막염에 대한 치료 지침을 그대로 아주머니에게 적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 후 재차 시행된 복수 천자에서 복막염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글쎄요. 아직도 원인은 불확실한데, 지금까지 썼던 항생제에 별로 반응이 없네요. 항생제를 다른 종류로 교체해볼 때가 된 것 같아요.”

“아유, 그러면 그렇게 해야죠. 선생님, 아직은 별로 힘들지 않아요. 선생님께 다 맡길 테니 잘 치료해 주세요.”

그러나 세 번째 복수 천자에서도 복막염은 호전될 기미가 없었다. 대체 호전되지 않는 이유가 뭘까? 거듭된 항생제 교체에도 반응하지 않는 복막염을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는 지침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이대로 놔두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을까? 그랬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염증이 환자를 집어삼킬 것이다. 교수님과 나는 아주머니의 유방암 현재 상태를 다시 평가해보기로 했다. 다음날 촬영된 복부 CT 영상은 왜 아주머니의 복막염이 항생제에 이토록 반응하지 않았는지를 기막히게 보여주었다. 복강 전체에서 이전에 없던 전이암 결절들이 하얀 조영제를 먹고 반짝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때로는 환자의 병세가 극적으로 악화되기도 한다. 내가 환자에게 검사 결과를 설명할 겨를도 없이 아주머니의 혈압이 갑자기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병동은 난리가 났다. 뛰어 들어간 병실에서 숨을 몰아쉬던 아주머니는 내 얼굴을 보고 힘겹게 입을 달싹였다.

“선생님……그동안……잘 치료해 주셔서……감사했어요.”

나는 지난 2년간 눈물을 억지로 참고 있었던 것일까? 수없이 목격한 온갖 모습의 죽음 앞에서 이젠 나도 무뎌졌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을까? 환자의 ‘마지막 인사’를 듣는 순간 내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이럴 수가. 이제 환자와의 거리를 완벽하게 유지하는 냉철한 내과 의사가 된 줄 알았는데.

“그런 얘기는 다 낫고 나서 하세요!”

뛰어 들어갈 때처럼 병실 밖으로 뛰어나온 나는 혈압을 올리는 승압제 사용을 지시했다. 이 또한 이미 죽음으로 한 발짝 들어간 환자를 잠시 이승에 붙들어두는 의미밖에 없는 행위였지만, 나는 시간을 벌어야 했다. 아주머니의 아들이 병사로 군 복무 중이었기 때문이다. 연락을 받은 아들은 날듯이 달려 병원에 도착했다. 아주머니의 아들을 포함한 가족들은 그 날 오후 어머니의 평안한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 내가 죽음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아주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정확히 거기까지였다.

나는 아주머니의 임종을 더 힘들게 만들 수 있는 전기 충격과 같은 의미 없는 처치를 지시하지 않으면서도 환자의 마음과 함께하며 이 시간 환자에게 가장 필요한 ‘돌봄’을 줄 수 있었다. 이제 서야 나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환자의 마음에 충분히 공감하는 의사로서, 환자의 편에 서서 환자와 한 팀이 되어 질병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전이에 의한 잘못된 판단을 막기 위해서는 환자가 아닌 환자의 질병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의사가 환자와 다른 편에 서 있다는 뜻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의사는 환자의 편에 서서 환자의 어깨에 한 손을 얹고 환자와 함께 질병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 날 평안한 가족들의 반응처럼 돌아서서 병실을 나오는 나의 마음도 평안하였다.

의사 인생을 살며 앞으로 나와 함께 할 환자들이 너무나 많다. 그 중 어떤 환자들은 중요한 분기점에 서서 의사의 객관적인 판단을 원할 것이고, 어떤 환자들은 그런 것보다 자신의 상황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주기를 원하겠지만, 어떤 환자든 자신을 진료하는 의사가 따뜻한 손으로 진료하며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동시에 신뢰감을 주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할 것이다. 이제 나는 전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언제 다시 터져 나올지 모르는 나의 눈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기꺼이 눈물 흘리는 의사가 되어 흔들림 없는 자세로 나를 필요로 하는 환자와 함께할 것이다.

첫 응모에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이 수필의 내용은 저의 전공의 생활을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인 '눈물'을 소재로 한 것입니다.

전문의 취득 및 군의관 생활을 마치고 다시 필드로 돌아가 전임의가 되어 의사로서의 또다른 여로를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의 문학상 수상은 저에게 내과 전문의를 취득하기까지의 과정 중 나의 의사로서의 자세가 남들 앞에 부끄럽지 않았다는 격려의 의미로 다가옵니다.

앞으로도 의사의 길을 걷는 중 운 좋게 발견하는 작은 들꽃이 있다면 이러한 수필의 형태로 표현해보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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