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부터 근로기준법 적용되지만 추가 수련 기준 등 대책은 없어

임신한 전공의의 수련시간 때문에 수련 현장이 ‘멘붕’에 빠졌다.

오는 3월부터 임신한 전공의는 근로기준법에 따라 수련시간이 주 40시간으로 제한되지만 그만큼 줄어든 수련시간에 대한 대책은 없는 상황이다.

보건복지부 수련환경평가위원회는 이같은 내용이 담긴 ‘전공의 수련규칙 표준안 개정안’을 마련해 오는 3월부터 시행한다며 각 학회에 추가 수련이 필요한 부분에 대한 의견을 요청했다.

수련규칙 개정안은 여성 전공의의 출산·임산부 보호 등에 관한 사항은 근로기준법을 따르도록 했다. 근로기준법은 임산부는 주 40시간 근무에 시간 외 근무도 금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발생하는 추가 수련은 수련평가위에서 정하는 바에 따르도록 했다.(관련 기사:임신 전공의의 추가수련 여부, 학회 판단에 달렸다)

현재 전공의들은 전공의법에 따라 주당 수련시간을 80시간으로 제한하고 있다. 여성 전공의의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는 근로기준법에 따라 출산 전후 휴가 3개월만 보장돼 있다.

임신한 전공의에 대해 근로기준법을 준용하도록 한 건 복지부가 고용노동부에 의뢰한 유권해석에 따른 조치였다. 문제는 시행을 이틀 앞둔 27일 현재도 추가 수련 규정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수련 현장에서는 의료의 특수성을 무시한 채 근로기준법을 일괄적으로 적용해 혼란을 키웠다는 비판이 거세다. 전공의들은 피교육자이면서 근로자이기에 수련시간 단축은 교육을 받을 기회 감소와 수련 교육의 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많다.

'전공의 수련규칙 표준안' 개정으로 오는 3월부터 임신한 전공의의 근무시간은 주40시간으로 제한된다.

전공의들 “무조건 추가 수련? 기준부터 만들어야”

전공의들은 줄어든 시간 만큼 무조건 추가 수련을 받아야 한다는데 부정적이다. 여성 전공의들 사이에서는 이번 조치로 전문의 자격 취득이 늦어지고 수련병원이 여성 전공의를 기피하는 현상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한국여자의사회에는 ‘임신한 전공의의 근무시간을 주 40시간으로 제한하면 여성들이 수련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을 뿐 아니라 전공의로 근무할 기회도 박탈될 수 있어 부당하다’는 민원이 접수되기도 했다.

서울 한 대형병원에서 근무하는 2년차 여성 전공의 A씨는 “임신한 여성 전공의들이 출산을 앞둔 마지막 달까지 당직을 서고 근무하면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유산이나 사산의 아픔을 경험하는 선배나 동료들도 봤다”며 “임신한 전공의의 근무시간을 주 40시간으로 제한하는 건 당연히 지켜져야 할 인권이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대체인력 충원 논의를 먼저 해야 한다”고 말했다.

A씨는 "주 40시간 근무에 반대하는 여성 전공의들도 있다. 앞으로 누가 여성 전공의를 뽑겠느냐는 문제도 있다. 다른 전공의들의 눈치가 보여서 차라리 주 80시간 그대로 근무하겠다는 사람도 많다”며 “일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납득할 만한 수련 목표와 내용을 마련하라는 것”이라고 했다.

서울 모 대학병원 내과 4년차인 여성 전공의 B씨는 “수련 목표를 구체적으로 정하고 이를 만족하지 못한 전공의는 추가 수련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이번 일로 수련병원에서 여성 전공의를 기피하거나 여성 전공의들이 임신을 기피하는 사례가 당연히 생길 것이다. 이런 차별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처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전공의협의회 안치현 회장(서울대병원 비뇨기과)은 “전문의가 되기 위해 필요한 역량이 무엇인지 학회별로 명확히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다른 전공의보다 일한 시간이 적다고 근거 없는 추가 수련을 산정하는 건 전공의를 착취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라며 “임신한 전공의만 대상이 아니라 전국 모든 전공의에 해당된다. 전문의가 되기 위해 충족해야 할 역량과 수련 프로그램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 회장은 “무조건 추가 수련을 반대하는 건 아니다. 정확한 기준이 마련된다면 추가 수련도 가능하다. 역량 중심의 기준을 마련해서 따르도록 하면 해결될 문제”라며 “여성 전공의가 주 40시간만 근무해서 배우지 못한 술기 등이 무엇이고 이를 충족하기 위해 얼마나 교육을 받아야 하는지를 정해서 추가 수련이 이뤄져야 한다. 단순히 주 80시간인데 주 40시간만 근무했으니 나머지 40시간을 채워야 한다는 논리로 접근하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차라리 전공의 뽑지 말자는 말까지 나온다”

수련평가위로부터 추가 수련 기준을 마련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학회들은 정확한 수련 시간 산출 자체가 불가능하다며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대안 없이 무조건 시행해서 분란만 일으킨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대한내과학회 엄중식 수련이사(가천대길병원)는 “학회 내부에서 실제 근무시간을 측정해 보자는 얘기까지 나왔지만 실측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서 머리가 아프다”며 “내과는 최대 80시간 수련하도록 돼 있다. 어디까지 필요한 수련이고 어디까지가 불필요한 근무인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엄 이사는 “수련시간을 줄이면 수련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내과 전문의의 숙련도나 완성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주 80시간 이하로 수련시간이 떨어지면 추가 수련은 필요하다는 게 학회 입장”이라고 했다.

대한흉부심장혈관외과학회 오태윤 이사장(강북삼성병원)은 “과연 이래서 제대로 된 수련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학회 수련위원회에서 방안을 마련하고 있지만 기본적인 수련 요건은 반드시 갖춰야 한다”며 “기본 수련 요건에는 전공의법에서 정한 시간 규정과 수술 및 보조에 얼마나 참여했는지를 평가하는 내용이 들어갈 것이다. 대한의학회에서 마련 중인 전공의 역량 평가에 발맞춰 우리 학회의 입장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 이사장은 “이렇게 전공의 교육이 힘들어지면 차라리 전공의를 받지 않고 펠로우를 강화하고 호스피탈리스트(입원전담전문의)나 PA를 채용하는 게 나을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며 “이 문제는 수련제도 전반으로 번질 수 있다. 진짜로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대한외과학회 이길연 수련이사(경희대병원)는 “학회가 혼자 해볼 수 있는 게 없다. 어떤 식으로든 큰 틀이 있어야 논의가 가능하다”며 “의학회 주도로 각 학회 수련이사들이 여러 번 만났지만 해결 방안이 나오지 않았다. 과마다 사정이 달라서 만나서 해결이 안된다”고 했다.

“주 40시간만으로 충분하다면 왜 임신부에 한정하나”

수련 현장에서는 임신한 전공의가 주 40시간만 근무하면 추가 수련은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많다.

한 대학병원 교수는 “임신한 전공의가 주 40시간만 수련을 받고 전공의 과정을 수료한 것으로 인정한다면 다른 전공의들은 그게 왜 안되는가. 그렇다면 전체 전공의의 주당 수련시간을 40시간으로 줄여야 한다”며 “지식을 외워서 시험을 보고 전문의가 될 수 있다면 수련이라는 과정 자체가 필요 없는 거다. 책에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상황들을 경험하고 공유하면서 배워가야 한다. 그게 주 40시간으로 가능한가. 불가능하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도 전공의 수련시간을 주 80시간 이하로 줄이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수련의 완성도, 숙련도라는 측면에서 일정 시간 투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교육자나 피교육자 모두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신현영 전 대한의사협회 대변인(명지병원 가정의학과)은 “미국은 주마다 다르긴 하지만 보통 주당 80시간 근무하면서 임신부한테 특별히 휴가를 주지 않는다”며 “1년에 공식적으로 쓸 수 있는 휴가 4주를 출산에 사용한다. 자연분만은 6주, 제왕절개 분만은 8주까지 쓸 수 있는데 추가로 더 쓰는 2~4주 만큼 전공의 수료가 늦어진다”고 설명했다.

신 전 대변인은 “우리나라 전문의 수련 환경에서 여성 전공의가 임신을 하면 대체인력이 없기에 다른 전공의들의 업무량이 늘 수밖에 없다. 그러면 오히려 여성 전공의들이 더 눈치를 보고 임신을 미루게 되고 여성 전공의를 기피하는 현상까지 생길 수 있다”며 “추가 수련을 반대할 논리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학회마다 입장을 다르게 정하면 과별 성비 불균형이 심화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충분한 논의를 거친 뒤 시행해야 할 문제를 이렇게 졸속으로 하면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당사자인 여성 전공의들의 의견도 듣고 설문조사나 연구용역, 공청회 등을 거쳐서 시행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복지부도 “풀기 어려운 문제”

복지부도 대안을 마련하기 쉽지 않다는데 공감했다.

복지부 의료자원정책과 관계자는 “모성보호를 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전공의는 근로자이면서 피교육자여서 수련병원에서 기피하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며 “모성보호만 하다가 질 낮은 전문의가 나와서는 안되지만 추가 수련은 전공의가 반대하고 있어 풀기 어려운 문제다. 복지부도 여러 안을 놓고 깊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수련평가위에서 논의해서 합리적인 방안을 마련하겠다. 모성과 태아도 보호하고 환자안전을 위해 충분한 수련도 이뤄지고, 여성 전공의 임용 시 불이익도 없어야 한다. 어느 하나 버릴 수 없다”며 “수련평가위에 대한병원협회, 의협, 전공의 등이 다 참여하니까 거기서 심도 있게 논의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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