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천대 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배승민 교수

평범한 봄날의 오후였다.

진료실 벽면의 창문으로 나른한 햇살이 느릿느릿 들어오고, 공기마저 나른하여 대기실에 환자들 뿐 아니라 나 역시 하품을 참기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외래에 틀어진 음악마저 잔잔한 클래식이라 그날따라 참으로 조용하고도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진료 시작 전 타온 커피는 그 느릿한 흐름에 맞춰 어느새 식어빠져 씁쓸하기만 해서, 이 진료만 끝나면 식은 커피대신 새로 물을 담아와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OOO님, O번 진료실 들어가세요.”

오른 편의 커피잔을 보다가 열리는 진료실 문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순간, 육중한 체격의 환자가 모니터 뒤의 나에게 주먹을 날렸다. 미처 고개를 다 돌리기도 전이라 다행히 주먹은 얼굴이 아니라 내 왼쪽 어깨에 꽂혔다. 느와르 영화처럼 비정상적으로 느리게 전개되던 시간은, 환자의 살기어린 눈빛에 이어 보호자들의 당황한 표정에 내 시선이 꽂히던 순간, 환자가 나에게 몸을 날리느라 바닥에 내동댕이친 핸드폰의 시끄러운 파열음에 현실로 돌아왔다. 정신이 들자 나는 나도 모르게 순간 몸을 웅크렸지만 웅크려진 어깨와 팔에 퍽 퍽 소리와 함께 환자의 주먹이 계속 꽂혔다. 내 진료실은 어린 아이들의 진료가 많다보니 소음의 불편을 줄이기 위해 외래의 가장 끝에 있었다. 아직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탓에 의사 가운 안에 겹쳐 입었던 가디건이 소음을 흡수했던 것인지, 밖의 음악 소리 때문인지 아무도 나를 도우러 오질 않았다. 예상치 못한 충격에 비명도 못 지르며 온 몸으로 충격을 받아들이다가, 어쩐지 환자의 부모마저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무렵, 환자의 아버지가 책상 안쪽으로 몸을 뻗어, 날 때리고 있던 아들의 팔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맞은 왼쪽의 어깨와 팔 뿐 아니라 온 전신이 가늘게 떨렸다. 맞은 팔은 아무리 애를 써도 움직여지지 않았고, 맞지 않은 반대편 팔로 전화기를 잡으려 해도 손이 덜덜 떨려 닿지 않았다. 만일의 이런 상황에 대비해 진료실 책상 아래에 분명히 비상벨이 있었건만 충격으로 온 정신이 흔들린 상태로는 그게 어디 있었는지조차 그 순간엔 떠오르지 않았다. 어렵게 외래 메신저로 간호사들에게 지금 나간 환자가 나를 때렸고, 밖에서도 위험할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두 줄의 문장을 써보냈다. 그리고 다시 진료실은 공백의 순간이 되었다. 진료실의 햇살과 온기는 변하지 않았고, 식어버린 커피의 쌉싸름한 향도 그대로였으나 나의 귀는 내 심장박동소리와 거친 숨소리로 작은 진료실 안이 터질 것 같았다. 맞은 어깨와 팔의 충격은 처음에는 느껴지지 않았건만 시간이 갈수록 내 팔이 바로 거기에 있음을, 통증이 타고 올라오고 있음이 절절히 온 신경에 파고들어왔다. 고통과 충격에 내 뇌는 아직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데 작은 똑똑 소리와 함께 환자의 어머니가 들어왔다.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들어온 그녀에게 나 역시 어떤 표정으로 대해야할지 몰랐다. 6년간의 의대 시절과 전공의와 전임의 수련동안, 그리고 적다면 적지 않은 환자들을 보아왔던 전문의 시절 내내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난 생각해본 적도 배워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조심스레 내 쪽으로 와서 바닥에 나동댕이쳐진 환자의 핸드폰을 조심스레 들어올리며 말했다.

“우리 애가 원래 저런 애가 아닌데좋아하는 운동을 여기 오느라고 못가서 화가 나서 그랬나봐요.”

가느다란 그녀의 말투에 나는 더욱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바짝 메마른 입술을 달짝일 뿐 아무런 답을 할 수 없었다. 어깨를 움켜쥔 채로 당황스레 쳐다보던 나를 더욱 경악하게 만들었던 건 그녀의 다음 문장이었다.

“저기… 우리 애가 길 가던 사람을 그렇게 때려서 좀 문제가 되고 있는데요, 선생님이 얘가 정신병으로 그런 거라 치료가 필요한 거지 처벌 받을 일이 아니라고 진단서 좀 써주시면 안돼요?”

영화 ‘식스센스’가 기억난다. 당시 숨막히는 시나리오, 예상치 못한 공포와 잘 짜여진 전개로 유명했지만, 내 직업이 바로 주인공의 그것이었기에 이 일의 숨겨진 위험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던 영화이기도 하다. 카우치에 누운 환자에게 조용히 상담을 하거나 최근 영화나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동료들과 진지하게 토론하며 탐구하는 하얀 가운의 의사가 위험이라니. 피와 사건, 알람 소리가 뱅뱅 도는 응급의학과나 수술을 다루는 과와 정반대로 느껴지는 정신과와 위험은 당최 안 어울리는 조합 같았다.

하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 벌어진 일련의 묻지마 폭력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많은 정신과 환자들과 의사들은 억울함에 시달렸다. 통념과 달리, 정신과 환자들은 대다수 오히려 사람들을 피하고 두려워하거나 불편해하여 오히려 타인에게 피해를 입을지언정 아프다는 소리도 내지 못해 속병이 난 사람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치료받지 못한 정신 질환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양날의 검처럼 위험할 수 있다. 병원 밖의 환자들, 치료받지 못하거나 치료를 벗어난 사람들이 바로 논란의 중심에 서야할 상황일 것이다.

그 봄날의 오후, 나는 간신히 허리를 세우며 여전히 덜덜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분명히 치료가 필요하지만, 이에 대한 평가 없이 벌을 받지 않아야 한다라는 내용의 진단서는 써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약의 효과가 충분하지 않은 듯한데 처방을 변경해가시지요.”

간신히 한마디한마디 쥐어짜며 나오는 내 음성이 너무도 낯설었다. 내 대답에 보호자의 얼굴은 순간 차갑게 굳더니 아무 대꾸 없이 진료실을 일어섰다.

“남 뿐 아니라 본인도 위험할 수 있으니 치료 꼭 받으셔야 해요.”

서둘러 말을 덧붙였지만 진료실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그날 이후 안전과 보안 장치가 몇 가지 외래에 추가되었고 나는 전치 4주의 진단을 받았지만 집중적인 치료 덕분에 팔은 곧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날 이후로도 한동안의 그 나른한 봄날 진료는 변함 없었다. 가끔 진료실문이 드르륵 열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하거나, 비슷한 환자의 이름에 멈칫 하게 되는 정도의 변화는 생겼지만, 병원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온하게 하루하루 지나갔다. 하지만 나는 한동안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입원시절의 그 환자는, 퇴원 무렵 눈에 띄게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이었다. 약의 부작용도 없이 증상은 잘 조절되어 만족스럽게 퇴원했던 아이였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수줍게 웃으며 인사하던 아이와, 그날 벌겋게 핏발선 눈으로 달려들던 아이는 도저히 동일인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퇴원한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그 사이에 그 아이에게 대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러던 어느 날, 외래 접수를 받던 간호사가 나에게 띵동, 메세지를 보냈다.

“교수님, 지금 나오지 마세요.”

“왜요? 무슨 일 있나요?”

“..그 환자가 지금 외래로 오고 있대요.”

이미 병원은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조용히 보안요원이 동행한 상태였다. 겉으로는 아무런 일이 없는 듯 보였지만 외래진은 모두가 신경을 팽팽히 곤두세우고 있었다. 접수는 같은 시간 진료 중이던 다른 의사에게 배정되었다. 건장한 남자 선생님이고 위험 가능성을 모두 알고 있을테니 별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심장이 쿵쾅거려 온 신경을 옆옆 방에서 나오는 작은 위험의 신호라도 감지하려고 귀를 기울였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큰 고함이나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조차도. 환자와 보호자는 아무 소란 없이 곧 외래를 떠났다. 지난번과 동일한 진단서 부탁을 하러 내원했었고, 나와 동일한 원칙을 설명하자 다시 그냥 자리를 떴다는 것이었다. 어쨋든 아무런 위험없이 진료가 끝났다는 말에 안심하던 차에 그 선생님이 나에게 따로 말을 건넸다.

“그 환자, 예전 입원 치료중일 때가 저도 기억나는데…퇴원 즈음엔 온순하고 별 문제가 없었던 것 같아요, 맞지요? 그런데 이번에 보니…지난 번 진료왔을 때에도 아무래도 보호자들이 정신과 약이라고, 처방약을 안 먹이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순간 나는, 나른한 그 날 오후의 폭풍같던 통증이 느껴져 눈을 질끈 감았다.

최근 사회적 뉴스로 폭력 사건이 자주 오르내립니다. 그럴 경우 가해자에 대한 많은 여론이 ‘정신과 환자일 것이다’, 또는 ‘강제로 치료해야한다’는 말들입니다. 각각의 사건들은 하나하나 다양한 사연으로 벌어졌을 것이고,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경우도, 치료보다는 사회적 정의가 앞서야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간혹 치료받지 못해 비극에 휩싸인 사례들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하지만 사건 당시의 여론과 달리, 치료를 거부하는 환자분들을 보호자 동의나 기준에 따라 환자분의 의사에 반해서라도 치료를 하려고 하면, 각종 규제와 법으로 저희과 의사들의 손발이 묶여있는 상황에 좌절을 반복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제가 쓴 사연은 환자 한 분만을 떠올리며 쓴 글은 아닙니다. 더 열심히 일하시는 많은 동료 선후배들에게 비할 바 안되지만, 진료 중에 제가 다치는 일은 예전부터 간혹 있어왔습니다. 그런 경험들은 제가 의사로서 소중히 하고 배워야 할 기회이며, 이를 폄하하거나 환자분을 비난하고자 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여러 사건을 종합하고 일부 정보는 각색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특정 환자를 비난하는 글로 이 글이 읽히는 것이 아닐까, 이번 글을 쓰면서 매우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럼에도 망설이던 끝에 글을 낸 것은, 처벌하거나 격리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진지한 치료가 너무도 필요한 환자분들이 여러 이유로 치료받지 못하는 현실이 의사로서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정신과 약을, 그것도 오랫동안 먹인다는 것에 대한 부모로서의 불안과 자책감, 정신과 치료라는 것에 대한 터부, 경제적 어려움, 아이의 앞날에 정신과 치료가 미칠 지도 모를 위협에 대한 소문과 주변의 시선 등등 너무도 많은 이유가 우리 사회에서 환자분들의 치료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하나하나 살피지 못한 의료인의 책임도 분명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만, 어떻게든 치료를 받지 못하는 분들이 겪을, 그로 인한 고통도 알리고 싶었습니다.

절 때린 환아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른을 때리는 경험, 게다가 자신을 돌보던 주치의를 때린 경험은 그 아이에게 그 자체로도 엄청난 트라우마였을 것입니다. 조절이 안되는 증상으로 인해 타인을 공격하면서, 그 아이 내부의 무언가도 깨어져나가지는 않았을지, 그전의 선하던 아이의 표정을 떠올리면, 맞았던 고통보다도 묵직한 아픔이 느껴집니다.

환자나 보호자가 협조하지 않거나 거부하는 데도 치료해야할 권리가 의사나 사회에게 있을까요? 있다면 어느 선이 필요할까요? 왜 우리 사회는 전문가를 이다지도 믿지 못할 상황까지 온 걸까요? 글을 쓰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지만, 이 무거운 글이 한 명이라도 치료받지 못하고 있는 분을 도울 수 있는 작은 기회가 되길 바랬습니다.

언젠가 제가 현실을 모르고 꿈만 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은 진정 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이런 제 헛되어 보이는 꿈이 단 한명에게라도 가 닿는 날이 오길 꿈꿉니다. 그리고 그 허약한 꿈에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신 청년의사와 한미약품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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