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이스라엘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동유럽에 이어 이번에는 이스라엘-요르단을 찾았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이번 여행길에서 3번째 맞는 아침이다. 첫날은 텔아비브를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둘째 날은 이스라엘 갈릴리호수에서, 그리고 이날은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아침을 맞았으니 정말 바쁜 여정이 아닐 수 없다. 잠에서 깨어나 생각해보니 자다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것 같다. 알고 보니 침대받침이 매트보다 작았는지 매트가 기울어 잠자리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이날은 일정이 빠듯한 듯, 5시에 일어나 7시에 숙소를 출발하였다. 암만의 숙소를 떠나 사막고속도로를 타고 페트라로 향했다. 요르단에는 사막고속도로를 비롯해서 왕의대로, 사해고속도로 등 3개의 도로가 남북을 연결하고 있다. 왕의대로나 사해고속도로는 도로 주변 풍경이 아름다운데 그래서인지 차가 많이 다녀 밀리는 편이라고 한다. 사막고속도로는 우마이야 왕조 시절 메카로 성지순례를 다니던 길이라고 한다. 사막고속도로를 따라서 송수관이 묻혀있다고 한다. 저녁에 가게 될 와디럼에서 발견된 지하수를 끌어와 수도 암만에 공급하는 중요한 시설이다.

암만은 요르단의 수도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면적 1,680km2에 4,007,526명(2016년 기준)이 살고 있다. 신석기 시대의 유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사람이 거주해온 것으로 보인다. 암몬족이 이 지역을 지배할 무렵 ‘국왕의 숙소’라는 의미의 라바스 암몬(Rabbath Ammon)으로 불리던 것이 암몬만이 남았다가 서서히 암만(Ammam)으로 변하게 되었다. 기원전 283년부터 246년까지 이 지역을 지배한 프톨레마아오스 왕국 시절에는 국왕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푸스의 이름에서 유래한 필라델피아로 개칭하였다. ‘형제애의 사랑’이라는 의미다.

가이드에 따르면 암만은 7개의 산봉우리에 세운 도시라고 했다. 집을 지으려면 반석 위에 지으라는 성경말씀에 따른 것이다. 지금은 19개가 넘는 언덕을 포함하게 되었는데, 중동전쟁 이후 팔레스타인난민들이 들어와 세운 거대한 캠프촌이 도시화하면서 생긴 변화이다.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는 언덕을 자발(Jabal)이라하고, 계곡을 와디(Wadi)라고 하는데, 비가 오면 산 아래는 홍수로 범람한다고 하니 기후와 지형을 고려하여 세운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암만의 동쪽은 주로 문화와 관련된 사적지가 많고, 서쪽은 현대적 도시로 경제의 중심이 되고 있다. 요르단을 다스리는 하심왕은 민생의 기본이 되는 빵, 물, 전기가격을 통제해서 기본적으로는 적은 비용으로 생활이 가능하지만, 누진가격을 적용하기 때문에 많이 쓸수록 부담이 늘어난다.

사막고속도로의 주변 풍경. 멀리 메마른 언덕 사이로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였다. 고속도로 진입도로에 차선이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가끔 요철을 만나기 때문에 버스가 속도를 줄여야 한다. 아카바에서 암만으로 물류를 옮기는 대형화물차가 다니는데 속도를 낼 수 없도록 만든 것이라 한다. 군데군데 도로를 네모나게 땜질한 모양을 보면 초창기 경부고속도로가 생각난다. 대체로 보면 도로에 차선이 없는 것 같다. 차선 없는 도로를 운전하다 마주 오는 차를 만나면 부담스러운데, 특히 대형화물차라도 만나면 엄청 긴장하게 될 것 같다. 이윽고 버스가 광야로 나서자 메마른 벌판이 하늘 끝 지평선까지 이어지고 있어 그야말로 광막해 보인다는 표현이 딱 맞다. 그런데 이 무렵에는 삭막해 보이는 도로변이지만 밀을 수확하는 시기에는 황금벌판으로 변한다.

마른 땅 곳곳에는 유목민들의 천막이 보이고, 천막 주변에는 꽤 많아 보이는 양들이 흩어져있다. 주변 풍경만 보면 유목민들의 삶이 팍팍할 듯 보이는데 사실은 이 사람들이 알부자들이란다, 한 마리에 300불정도 하는 양을 수백에서 수천마리 키운다고 보면 10만불에서 100만불의 재산을 가졌으니 말이다. 벌판에 사는 유목민도 시간이 되면 예배당에 가는 듯 벌판 한 모퉁이에 모스크가 있고 모스크 주변에는 올리브나무를 심은 정원이 있다.

암만을 떠나 두 시간 정도 버스를 달려 도착하는 카락성이 오늘의 첫 번째 일정이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을 촬영한 곳이라는, 카락(Kerak, Al-karak)은 암만에서 남쪽으로 140km 떨어져 해발 1,000m의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다. 삼면이 계곡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이며, 마을에서는 사해를 볼 수 있다. 성서에 나오는 고대 모압족의 수도 길하레셋(Kir-Hareseth)이 오늘날의 카락(Kerak)이다. 이 지역은 기원전 아시리아제국(기원전25세기에서 기원전 612년까지 중동지방을 지배한 제국)의 지배를 거쳐 나바테아왕국(기원전 2세기부터 페트라를 중심으로 한 왕국으로 기원전 63년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가 106년 멸망)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에는 비잔틴제국의 지배를 거쳐 이슬람제국의 지배를 받았다.(1)

계곡 건너편에서 바라본 케락성

이곳에 있는 케락성은 1140년 십자군이 건설한 것이다. 고원의 남쪽에 지은 케락성은 서유럽, 비잔틴, 아랍의 건축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모습이다. 1176년 성주 험프리3세의 미망인과 결혼한 레이놀드(Raynold)는 케락성의 새 주인이 되면서 낙타대상을 괴롭히다가 결국은 메카의 공격에 나서게 되었다. 이에 살라딘(Saladin)이 이끄는 아유비왕조의 이슬람군은 케락성 포위에 나섰다가 종국에는 1189년 함락시키고 말았다.(2) 1264년 아유비왕조를 몰아낸 맘룩크왕조의 술탄 베이블스는 카락성을 보강하였으나, 1293년 지진으로 성이 파괴되면서 유배지로 사용하는 등, 성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고 말았다.(3)

이런 역사를 가진 카락성 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계곡 건너편에서 조망하는 선에서 만족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카락성으로 들어가게 되면 열악한 성내도로 사정 때문에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대신 페트라에서 자유 시간을 넉넉하게 갖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해 있었던 테러사건으로 조금 찜찜하던 참이라서 쉽게 인솔자의 제안에 동의했다. 2016년 12월 18일 카락성에서 미확인 무장세력의 공격으로 13명의 요르단인과 1명의 캐나다 관광객이 사망하는 테러사건이 발생했다. IS는 배교자 요르단 보안군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아 IS가 배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버스에서 내려 굳은 몸을 푸는 정도의 시간에 계곡 건너 카락성을 구경하고는 바로 페트라로 출발했다. 카락에서 ‘모세의 계곡’이라는 의미의 와디 무사(Wadi Musa)까지는 3시간 정도 걸려, 정오 무렵에 도착했다. 이곳은 페트라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로, 관광객을 위한 호텔과 레스토랑이 많이 있다. 와디 무사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는 페트라로 가는 길에 ‘모세의 샘(Ain Musa)’과 모세의 형 아론의 무덤이 있다는 호르(Hor) 산이 보이는 곳에 잠시 머물렀다.

와디 무사 마을 초입 길가에 모세의 셈이 들어있는 건물이 서 있다.(좌; 강대출님 제공), 모세가 내려쳤다는 바위가 있고, 그 아래에서 물이 흘러내린다(우)

와디 무사 마을의 초입 길가에는 3개의 흰색 돔을 지붕에 얹고 있는 허름해 보이는 건물이 있다. 이 건물 안에 ‘모세의 샘’이라고 하는 아인 무사(Ain Musa)가 있다. 이스라엘백성들을 이끌고 홍해를 건넌 모세가 왕의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이동할 때, 이곳에 이르렀다. 어디에서도 물을 찾을 수 없어 고통 받던 백성들이 불평을 하자 모세는 “패역한 자들이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하고 화를 내면서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내리치자 물이 솟아났다고 전한다(민 20장 11~12절) 사실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반석에 명하여 물을 내라’라고 했던 것인데, 두 사람은 여호와의 명을 거역한 것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벌을 받게 되었다.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이 사건이 와디 무사에서 일어났다고 보기 어렵다는 설명도 있다고 한다. 이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석회암이 비가 내릴 때 물을 품고 있다가 내보내는 것으로, 바위 아래서 물이 넉넉하게 흘러내리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모세의 기적을 되새기기 위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라는 설명이 더 그럴 듯하다. 한편 비가 거의 내리지 않고, 샘도 없는 페트라에 수도를 정한 나바테아왕국은 1.5km 떨어진 와디 무사 주변에 흩어져 있는 샘들을 수로로 연결하여 페트라까지 끌어들여 사용하였다고 한다.(4) 이런 이유로 와디 무사를 “페트라의 수호자”라고 하는 것 같다.

우리 일행이 모세의 샘에 들어갔을 때는 마침 아무도 없어 바위 아래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떠 마시고 손을 씻는 분도 있었다. 방문객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실내를 정비한 것은 좋은데, 흐르는 물이 위생적으로 처리되어 있지는 않아서 조금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모세의 샘을 떠난 버스가 계곡을 끼고 달리다가 섰다. 버스에서 내려보니, 멀리 검은색 돌로 된 산 위에 하얀 점 하나가 보일 듯 말 듯 하다. 모세의 형 아론의 무덤이 있다는 호르산이다. 요르단왕이 직접 찾아 참배를 한 적이 있다는 이슬람 성지이다.

와디 무사. 계곡에는 나무들이 꽤 무성해서 멀리 메마른 땅과는 비교된다(좌), 아론의 묘소가 있다는 호르산(우; 강대출님 제공)

기원전 14세기 무렵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곳에 이르렀을 때, 페트라 근처에는 야곱(Jacob)의 형제 에서(Esau)의 후손인 에돔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집트를 떠나 40년 가까운 세월을 광야에서 지나오면서 나이가 많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죽어 사라지고 없었다. 페트라에 도착했을 때 모세의 누나 미리엄(Miriam)이 아론의 눈앞에서 죽었다. 모세는 그녀를 계곡의 높은 곳에 묻었다. 알데일 수도원(Al Deir Monastry) 부근으로 짐작된다. 아론이 이곳에서 죽었다는 증거는 없으나 그의 사후에 페트라로 옮겨와 미리엄이 묻힌 곳 근처에 있는 ‘아론의 산’이라는 의미의 자발 하룬(Jabal Haroun)의 꼭대기에 묻었다.(5) 모세 오경에는 아론의 무덤이 있는 위치에 대하여 몇 가지 설이 있으나 이슬람에서는 페트라의 호르(Hor)산 정상에 있다고 믿는다.

참고자료:

(1) Wikipedia. Al-Karak.

(2) Wikipedia. Kerak Castle.

(3) 남상학의 시솔길. <성지순례-51> 카락성(길하레셋 성)

(4) 배성수성지사랑 블로그. 모세의 샘(Moses’s Well/Petra/Wadi Mousa/Jordan).

(5) The Complete Pilgrim. MOUNT HOR & TOMB OF AA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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