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이스라엘
점심을 먹고는 제라시에 있는 고대 로마유적의 구경에 나섰다. 제라시는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북쪽으로 48km 떨어진 곳이다. 2015년 요르단대학의 고고학발굴팀은 신석기 시대로 추정되는 시기에 거주한 것으로 보이는 유골을 발굴했으며, 청동기시대(기원전 3200 ~ 1200년)에 사람들이 거주한 유적도 발견된 것을 보면 이 지역에 인간이 거주한 것은 꽤나 오래 된 듯하다. 이 무렵 이곳에 살던 아랍/셈족들은 가르슈(Garshu)라고 불렀다. 로마시대에는 거라사(Gerasa)라고 불렀고, 이슬람이 지배할 때는 제라시(Jerash)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스-로마 시절에는 이곳을 황금강에 있는 안티옥(Antioch)이라고 했다.
도시에서 발견된 비문과 문헌에서는 기원전 331년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 혹은 그의 부하 페르디카스(Perdiccas) 장군이 도시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라시는 그리스-로마시대, 10개의 위성도시 가운데 하나로 보석, 비단, 상아 등을 유통시키던 사막대상들이 지나는 경유지였다. 기원전 63년 로마제국은 이곳을 정복하고 시리아속주에 편입시켰다가 서기 90년에는 영토를 확장하면서 아라비아속주에 편입시켰다. 이 무렵 산술을 기하학에서 독립시켜 다룬 <산술론(Arithmetike eisagoge)>을 쓴 니코마코스(Nicomachus)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서기 106년 무렵 트라야누스황제는 이 지방에 도로를 건설하였고, 하드리아누스 황제도 재위기간에 이곳을 방문하였다. 그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하드리아누스 아치를 세웠다. 비잔틴시대에는 도시의 크기가 80만㎡에 이르렀는데, 서기 614년 페르시아의 침공 이후에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우마이야왕조가 성립되면서 도시는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된다. 이곳은 도자기산업의 중심이었으며, 제라시라는 이름이 새겨진 동전화폐가 발행되었다. 서기 749년 갈릴리 지진으로 도시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음에도 8세기 중반까지 번영을 이어갔지만, 서기 847년 다마스쿠스 지진으로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십자군전쟁 무렵인 12세기 초에 다마스쿠스의 부리드(Burid)왕조는 수비대를 파견하여 아르테미스사원을 요새화하였는데, 십자군이 세운 예루살렘왕국의 볼드윈2세는 요새를 점령하고 완전히 파괴하고 말았다. 맘루크왕조와 오스만제국 시절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06년 독일의 여행자 울리히 야스퍼 세첸(Ulrich Jasper Seetzen)이 이곳의 폐허를 발견한 이후 1925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진행되어 지진으로 땅에 묻혀있던 도시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런 이유로 중동의 폼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1)
제라시의 로마유적 구경은 남쪽에 서 있는 하드리안 아치에서 시작한다. 이는 서기 129-130년 로마제국의 하드리아누스황제가 제라시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아치는 아칸서스잎을 기반으로 하는 나바테아 양식을 적용한 비전통적 건축양식으로 추정된다. 2005년 복원이 시작되어 2007년 재건축이 완료된 하드리안 아치는 높이가 21m, 길이는 37.45m, 너비는 9.25m로 된 3중 아치형 관문으로 나무로 된 문이 있었다. 아치의 각 면에는 받침대와 4개의 맞물림 기둥이 서있다. 각 받침대는 높이 2.20m, 폭 2.25m, 너비 1.20m이다. 기둥은 코린트 양식의 주두로 장식되어 있다. 주 아치 양쪽에 있는 작은 아치 위로 각각 벽감을 두었다. 각각의 벽감은 작은 엔타블라쳐(entablature) 위에 세웠고, 양쪽으로 붙임 기둥이 있고, 주두를 얹었다.(2)
하드리아누스 아치를 통과하면 높다란 장벽이 왼편을 가로막는다, 조금 더 올라가면 통로가 나타나는데 통로에 들어서면 널따랗게 열리는 공터를 두고 관람석이 한 켠에 남아 있는 전차경기장이다. 길이 245m, 폭 52m나 되는 대규모 경기장에서는 전차경주 또는 다른 운동경기가 열렸는데, 1만5천명이 동시에 입장이 가능했다. 지금 남아있는 관중석의 30배가 넘는 규모이다. 최근의 발굴성과에 따르면 7세기 무렵 페르시아에서 침입해온 사산조 사람들이 폴로경기를 즐겼던 흔적도 있다. 이 경기장은 아마도 1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을 무릅쓰고 더 올라가다보면 왼쪽 언덕 위로 제우스 신전이 보이고, 병영과 서편 시장터를 지난다. 조금 더 가면 제라시 유적의 남문이 나타난다. 제라시에는 남문과 북문이 있다.
남문을 지나 좁아 보이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돌기둥이 반타원을 그리면서 서 있는 타원광장이 들어선다. 타원광장의 북쪽에서 열주의 거리가 시작된다. 왼쪽 언덕에 있는 제우스신전이나 원형극장에서 타원광장의 전체 모습을 잘 조망할 수 있다. 타원광장은 56개의 석주로 둘러싸인 널따란 공간이다. 각각의 돌기둥은 4개의 블록을 쌓아 올렸고, 각각의 기둥 위에 얹은 처마도리(architrave)로 이어진다. 광장은 일견해서는 개방된 무대처럼 보이나, 사실은 광장의 열린 공간이 열주거리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 타원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적절한 흐름으로 열주거리로 유입하도록 하는 구조가 아닐까 싶다. 남문과 북문을 연결하는 800m 길이의 카르도 막시무스(Cardo Maximus)는 남문과 북문 가까이에서 각각 동서로 진행하는 두 개의 도로와 만나는데, 도로 좌우로 기둥들이 열병하듯 늘어서 있어 열주도로라고 부른다. 타원광장에 늘어선 기둥들이 장식이 비교적 단순한 이오니아식으로 주두를 장식하고 있는데 반하여 열주도로에 서 있는 기둥들은 화려한 코린트식으로 주두를 장식하였다.
열주거리 주변으로는 무수하게 흩어져 있는 바위덩이를 볼 수 있다. 그 옛날 열주거리에 들어서 있던 건물들의 잔해로 언젠가는 완벽하게 복원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열주거리의 양편으로는 다양한 상점들이 들어서 있었다는데, 거리가 그리 길지 않았던 까닭에 상당한 배경이 없으면 입점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 옛날 만든 도로이지만, 오늘날의 대도시의 도로와 비교해도 부족한 점이 없는 대단한 시설이다. 우선 도로는 적당한 크기의 바위를 깔아서 마차가 통행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어 보인다. 도로의 양쪽으로는 인도가 설치되어 마차와 사람이 다니는 통로를 나누었고, 도로와 인도 사이에는 턱을 두어 구분되어 있다. 놀라운 것은 도로 아래로 하수시설을 두었는데, 도로 중간에 돌로 된 맨홀을 볼 수 있다. 열주거리의 도로에는 그 옛날 달렸을 마차가 남긴 바퀴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열주의 거리를 따라 올라가다 처음 발걸음을 멈추게 된 곳은 대성당이다. 제라시에 남아있는 유일한 교회다. 제라시에는 서기 368년부터 611년 사이의 비잔틴제국 시절에 지은 20개가 넘는 교회가 있었다. 이들 교회는 열주도로의 서쪽으로, 두 개의 가로길인 남쪽 데쿠마누스(Decumanus)와 북쪽 데쿠마누스(Decumanus) 사이에 흩어져 있었다. 그 가운데 대성당이 가장 오래된 교회로 디오뉘소스(Dionuysus) 신전 자리에 지은 것이다. 교회의 안마당에는 작은 웅덩이가 있는데, 요한복음이 전하는 예수가 행한 최초의 기적 - 갈릴리의 가나(Cana)의 결혼식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는 – 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웅덩이를 포도주로 채웠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교회의 동쪽으로는 성모와 미카엘, 가브리엘 대천사에게 헌정된 사원이 있었다.(3)
대성당 북쪽으로 님페움(Nymphaeum)이 있다. 이 사원은 샘의 림프에게 헌정된 것으로 서기 191년에 지었다. 열주도로에서 2개의 다리를 만날 수 있는데, 다리가 걸려있는 크리소로아스(Chrysorhoas)강은 열주도로의 남쪽으로 흐르면서 대중목욕탕은 물론 집과 가게 등에서 필요한 물을 공급한다. 열주도로에 님페움을 만든 이유를 알 듯하다. 샘은 아래쪽을 대리석으로 장식하였고, 윗면으로는 석고를 발랐으며, 반구형태의 지붕을 덮었는데, 여유 공간이 넉넉했던가 보다. 물은 7개의 사자머리 조각을 통하여 흘러내려 길가에 있는 작은 수반에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님페움에서 북쪽 사거리 가까이 걸어간 다음에 열주거리를 벗어나 왼쪽 언덕 위에 있는 아르테미스신전으로 이동한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제라시의 로마유적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뿐만 아니라 제라시의 고대 로마유적 가운데 가장 보존이 잘된 건축물이기도 하다. 제라시에는 제우스 신전도 있는데, 제우스 신전은 남문 가까운 낮은 언덕 위에 있는 걳이 흥미롭다. 제라시의 수호신은 제우스가 아니라 아르테미스였는데, 셈족은 제우스를 숭상했지만 제라시의 그리스-로마 사람들은 아르테미스를 숭상했기 때문이다. 아르테미스신전은 서기 150년 안토니우스 비오(Antoninus Pius) 황제 시절 완공되었다.
아르테미스신전은 12개의 기둥을 세운 6주식 현관을 두었는데, 11개의 기둥이 여전히 건재하며 코린트양식으로 꾸민 주두 역시 잘 보존되어 있다. 신전의 벽에 있는 3개의 입구에는 3개씩의 코린트 양식으로 장식된 3개의 붙임 기둥이 있다. 신상 안치소(cella)를 섬세한 대리석판으로 장식하고 이교적 조각상으로 채운 아르테미스신전은 그 옛날 제라시에서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성전이었다. 하지만 12세기 무렵 십자군원정대가 세운 예루살렘의 왕 볼드윈 2세가 이곳을 점령하고 신전을 불태우고 말았다. 신전은 1930년대 들어 클라렌스 스탠리 피셔에 의하여 발굴되었다.(4)
경사가 그리 가파르지 않은데도 아르테미스 신전에 오르는데 다소 힘이 들었던 것은 아마도 쏟아지는 햇볕을 피할 나무그늘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신전에 들어서니 그늘에 시원한 바람까지 더해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베두인 전통방식으로 만드는 홍차를 팔고 있었는데, 달지 않으면서도 띄워준 민트잎에서 느끼는 청량감이 피로를 가시게 한다. 가이드는 무서운 지진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라시의 로마유적의 기둥들이 비교적 멀쩡한 것은 내진구조 때문이라면서 기둥을 밀어 보인다.
아르테미스신전에서 한숨을 돌리고는 언덕을 따라 내려가 원형극장과 제우스 신전을 구경했다. 제라시에는 두 개의 원형극장이 있다. 제우스신전 옆의 남쪽 극장은 북쪽 극장보다 조금 오래된 서기 90-92년 도미티안황제 시절에 지은 것이다. 3,000명이 동시 입장이 가능한 극장은 탁월한 음향효과를 보일 수 있도록 건설되어 무대에서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해도 관중석에서 잘 들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태양의 밝기와 방향까지도 고려하여 청중이 햇빛으로 인한 불편을 최소화하였다. 우리가 남쪽 극장에 들어섰을 때, 3인조 밴드가 반겨준다. 백파이프와 북을 연주하는데, 청중석 맨 위까지 올라가 들어보아도 아주 잘 들렸다. 원형극장청중석의 맨 꼭대기에 올라서면 제라시 전체를 한 눈에 둘러볼 수 있다.
제우스신전은 제라시에서 매우 중요한 기념물 가운데 하나이다. 기원전 6세기 무렵까지는 아마도 동굴에서 제례를 올렸을 것이다. 로마제국 초기에는 ‘신성한 안뜰’이라는 의미의 테메노스(temenos)가 있는 성소가 세워졌으며 성소에 많은 변화가 생기면서 서기 2세기 무렵에는 지금의 제우스 사원이 건립되었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침식과 지진, 약탈 등으로 신전이 많이 손상을 입었지만, 장엄함은 여전하다. 1982년 이래 프랑스 외무부의 재정지원으로 사원의 발굴과 재건, 복원, 문서화와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는 테라스, 신상안치소, 작은 정원과 신성한 안뜰 등을 재건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5)
제우스신전을 끝으로 제라시의 로마유적 구경이 모두 끝났다. 제라시를 떠나 오늘 묵을 암만으로 출발하였다. 4시가 조금 넘어 숙소에 도착하였는데, 해외여행에 나서면서 가장 일찍 숙소에 든 날인 듯하다. 해가 중천에 있어서인지 숙소 주변 구경에 나섰는데, 변두리인 탓인지 별다르게 구경할 것도 없었다. 오후 내내 그 넓은 제라시유적을 걸은 탓인지 저녁을 먹고는 금세 잠자리에 들었다.
참고자료:
(1) Wikipedia. Jerash.
(2) Wikipedia. Arch of Hadrian (Jerash).
(3) SeetheHolyland.net. Jerashi.
(4) Wikipedia. Temple of Artemis, Jerash.
(5) World Monuments Fund. Temple of Ze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