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이스라엘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동유럽에 이어 이번에는 이스라엘-요르단을 찾았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이스라엘에서 처음 맞는 아침이다. 사실은 전날 아침을 비행기에서 맞았으니 이번 여행에서 두 번째로 맞는 아침인 셈이다. 전날 일찍 잠자리에 든 탓인지 4시 반에 일어났다. 모닝콜까지 1시간 정도 응접실에 앉아 어제 일정을 정리하다. 이 숙소는 나름 독특한 구조이다. 방문에 들어서면 화장실이 왼편으로 있고, 작은 탁자가 있는 응접실을 거쳐 침실이 있다. 침실 밖에는 갈릴리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꽤나 넓은 베란다가 있다. 잠을 잘 사람은 자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응접실 혹은 베란다를 이용할 수 있겠다.

여명 전 갈릴리호수. 멀리 호수가 집에 등불이 졸고, 고깃배가 밝힌 작은 불빛이 외롭다.

샤워를 하고는 베란다에 나가 아침의 여명을 감상하다. 멀리 호숫가 어느 집에선가 켜둔 등불이 깜박이고, 호수 위에는 조업에 나선 고깃배가 밝힌 작은 불빛이 외롭게 흔들린다. 어둠에 숨어있던 호수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난다. 베란다에서 해를 맞으려면 식사시간에 늦을 것 같아, 조금 일찍 식당에 내려간 덕분에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간단한 상차림으로 식사준비를 마치는 순간 호수 건너 골란고원 위로 해가 올라온다. 세상 어디에서든 해오름은 나름대로 장엄하지만, 갈릴리호수에서의 해오름은 특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곳이 갈릴리호수여서 더욱 그러하다. 해가 골란 고원 위로 완전하게 올라서자 호수에 길게 꼬리를 드리운다.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가 사이에 긴장관계는 여전할지라도 갈릴리호수는 평화로워 보인다.

해뜨기 전 골란고원이 밝아온다(좌) 이윽고 해가 얼굴을 내밀고(중), 고원위로 올라선 해가 호수에 길을 낸다(우)

7시 반에 출발하기로 했던 것인데 조금 늦게 숙소를 나섰다. 일행 가운데 늦은 사람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국경으로 향하는 도로가 한가하다. 대속죄일이기 때문이다. 오늘 2시 부터는 도로를 차단해 사람들의 이동을 금하게 된다. 아침부터 서둘러 요르단으로 향하는 까닭이다.

갈릴리호수를 왼편에 끼고 달리다보면 요르단강을 건너게 된다. 갈릴리호수에서 시작하는 남요르단강이다. ‘단지방에서 흘러내리다’라는 의미의 요르단강은 해발 2814m의 헤르몬산에서 기원한다. 헤르몬산에 쌓인 눈이 녹아 석회암반에 스며들었다가 나흐르 바니아스, 나흐르 엘 렛단, 나흐르 바레이그히트, 나흐르 하스바니 등, 네 개의 샘에서 분출하여 요르단강으로 흘러든다. 나흐르는 ‘시냇물, 개울, 수로’라는 뜻이다. 헤르몬산에서 시작한 요르단강은 갈릴리호수에 모였다가 사해까지 대략 260km를 흘러간다. 그 가운데 갈릴리호수에서 사해까지 105km나 되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엘 그호르(가라앉은 지역) 계곡을 흐른다. 갈릴리 호수가 해저 215m이고 사해는 더 낮아서 396m나 된다.

세례요한의 예수 세례 터(Qasr el Yahud) [(Wikipedia에서 인용함)

요르단강은 세례자 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푼 곳인데, 예수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장소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고 있는 다른 복음사가와는 달리 요한복음사가만이 베타니아 혹은 애논에서 받았다고 전한다. 애논은 우리가 향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출입국사무소가 있는 벳산에서 15km 남쪽에 있다.(1) 요르단에 속하고 국경지대에 있어 출입이 쉽지 않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이스라엘에서는 갈릴리호수 남쪽 남요르단강이 시작하는 곳 가까이에 있는 야르데닛(Yadernit)이라는 곳에 세례 터를 만들어 놓아 많은 순례자가 찾고 있다.(2)

8시 무렵 출입국 사무소가 있는 벳샨(Bet She'an)에 도착했는데 우리보다 더 서두른 사람들이 있는 듯 버스가 밀린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대속죄일이 시작되기 전에 이스라엘을 벗어나기 위해서 서둘렀을 것이다. 버스가 출입국관리구역에 들어서기도 전에 우리 가이드와 인솔자는 출국세를 내러가는 등 치밀하게 작전(?)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한술 더 떠서 출입국사무소에 들어가기도 전에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스라엘 출국수속까지는 무난하게 치렀는데, 요르단 입국절차가 또 만만치가 않았다. 먼저 이스라엘 출입국사무소에서 요르단 출입국관리사무소까지 타고 가는 버스를 타고 요르단으로 이동하는데도 한 세월이 걸렸다. 좌석을 다 채우고도 입석까지 버스가 가득 찰 때가지 무한정 기다려야 했다. 뿐만 아니라, 불과 200미터를 가는 데 무려 2불이나 되는 버스비를 내야한다.

요르단 입국심사장은 돗대기 시장 꼴이었다. 접수된 순서대로 한다더니 우리 앞에 접수했다는 중국팀 일행이 띄엄띄엄 도착하는 바람에 한 세월 걸렸고, 심지어는 우리 차례마저 다른 중국팀이 새치기하는 바람에 밀리고 말았다. 요르단 현지가이드가 분한 표정이지만, 관리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뭔가 짬짬이가 있는 느낌이다. 화를 낼 수도 없고 하니 대충 참고 넘어가고 말았다. 여행에 관록이 붙으면서 여유도 같이 늘어간다.

그래도 이스라엘과 요르단출입국관리사무소 입국심사장의 무질서는 짚어보자. 줄은 섰으되 혼잡한 느낌이 들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적지 않다. 실내금연에 대한 사회적 공감이 전혀 없는 모양이다. 화장실 흉도 보고 가야겠다. 국경에서 카메라는 아예 꺼내들지도 말라는 가이드의 엄포도 있어서 사진으로 남기지는 못했으나 요르단 화장실은 너무 했다. 소변기는 모두 망가져 바닥에 떨어져 있고, 대변기는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떨어져서 볼일을 보려니 자연 거리를 맞추기가 어려웠다. 이스라엘 화장실은 요르단보다는 나은 편이지만 썩 나은 수준도 아니다.

어떻든 입국허가를 받고 휴대물품검색을 받았다. 캡슐에 든 약과 충전기를 꼽아 쓰려고 가져간 멀티탭이 문제가 됐다. 특히 멀티탭을 처음 보는 듯 무기가 아니냐고 했다. 그럭저럭 설명을 해서 납득을 시키고 요르단에서 온 버스에 올라탔다. 입국수속이 끝나고 요르단에 들어선 것은 11시이다. 3시간이나 걸린 셈이다. 이스라엘에 입국하면서 여권에 스탬프를 찍지 않고 인쇄된 스탬프를 별도로 내주어서 다행이다 싶었기 때문에 벳샨에서 요르단으로 입국할 때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인데, 이게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벳샨에서 여권에 찍힌 요르단 입국 스탬프가 문제가 되어 아랍국가의 항공기를 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스라엘 체류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인데, 카타르항공의 경우 도하에서 환승하는 승객까지도 탑승을 거절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결국 여권을 새로 내야 하는 불편함이 따르게 될 것 같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베샨에서 입국 스탬프를 별도로 받았어야 했다.

요르단 강 유역은 그래도 비가 연중 500mm는 내리기 때문에 나무들도 자라지만 (좌) 고원으로 올라갈수록 척박해진다. 그런 환경에서도 양을 치는 베두윈 사람들(우)

갈릴리호수에서 기원하는 요단강 유역은 풍요로운 농업지역인데, 6일 전쟁 이후 요르단강 서안지역을 이스라엘에 빼앗긴 뒤에는 요르단강 동쪽의 기랏지역이 유일한 농업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창밖 풍경은 건조한 느낌이나 상수리나무가 숲을 이루고 올리브농장 등이 이어진다. 우리는 해발 -200m 수준의 벳샨에서 단숨에 해발 1,000m의 수준으로 올라서야 한다. 버스도 숨찬 듯 구절양장 산길을 천천히 올라간다. 덕분에 고도 차이를 별로 느끼지 못한 것 같다. 오르막인 도로가로는 거친 골짜기에 쳐놓은 텐트와 가축들이 흩어져있다. 베두인 사람들의 천막이란다. 근래 들어서는 사막에서 유랑하는 베두인 부족들도 대부분 정착했다는데, 일부 옛 풍습을 버리지 못하는 나이든 사람들은 여전히 유랑하는 삶을 놓지 못한다고 한다.

요르단(Jordan)은 입헌 군주국으로 공식적인 이름은 요르단 하심 왕국이다. 요르단강의 아랍어 이름 우르둔에서 유래하였다. 2017년 추산 10,011,820명의 인구에 수도는 암만이다. 국토의 면적은 89,341 km2이며, 북쪽으로는 시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동쪽의 일부는 이라크와 동남쪽은 사우디아라비아와 국경을 나눈다. 서쪽에는 이스라엘이 있다.

요르단의 국토는 표고 500에서 1,000m의 완만한 고원으로 된 암석 사막지대이나, 서쪽으로는 레바논과 안티레바논의 두 산맥의 연장이 남북으로 달리고 그 사이에는 폭 10~20km의 대지구대가 있다. 대지구대는 갈릴리호수에서 사해호수에 이르기까지 해수면보다 낮은 지형을 이루지만 사해부터는 높아지기 시작하여 10km 남쪽에 이르면 해수면의 고도에 이른다. 지구대는 아카바만을 거쳐 아프리카로 이어진다.

약 50만 년 전의 구석기 시대부터 요르단 지역에는 정착민이 등장했고, 기원전 8천 년경에는 인류 최고(最古)의 농업이 행하여졌다. 청동기 시대의 말기에는 암몬 , 모압 , 에돔 등 세 개의 안정된 왕국이 등장했고, 기원전 1세기 무렵 페트라유적을 남긴 나바테아 왕국이 지배하다가 1-2세기 무렵 로마 제국에 통합되었다. 7세기 무렵 등장한 이슬람세력을 통합한 우마이야왕조가 다마스쿠스에 자리하면서 이슬람세력의 중심에 섰지만, 우마이아왕조를 멸한 압바스왕조가 중심을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겨가면서 차츰 쇠퇴하였다.

요르단 왕국은 메카의 대족장이었던 후세인 빈 알리Hussein bin Ali)의 반란에서 비롯된다. 무함마드의 씨족인 하심 가문에 속한 후세인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다면 전후 그 대가로 통일 아랍국가를 만들어주겠다는 영국의 약속에 따라 1916년 반란을 일으켰지만, 전후 영국은 약속과 달리 프랑스와 함께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등을 나누어 가졌다. 후세인의 차남인 압둘라가 트란스요르단의, 삼남인 파이살 1세는 시리아와 이라크의 형식적인 국왕이 되었다. 압둘라의 트란스요르단왕국은 1921년 에미레이트왕국으로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1946년 트란스요르단의 하심왕국으로 독립을 이루었다.

인구의 95%가 수니파 무슬림인 요르단이지만 토착 기독교와 공존하는 안정된 사회이다. 독립 이후부터 주변국가의 사회적 갈등을 피해 탈출하는 난민들을 받아들였는데, 특히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서 온 난민은 각각 210 만 명과 140 만 명에 이른다. 그밖에도 이라크에서는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이 무슬림의 박해를 피해 요르단으로 이주해오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요르단을 난민국가라고 부르기도 한다.(3)

지금은 단층 슬라브건물이지만 언젠가는 2층을 올리려고 하는 가옥들

베샨에서 1시간 정도 버스를 달려 제라시에 도착했다. 창밖의 도로가에는 단층 슬라브 건물이 이어지는데, 많은 건물의 지붕에는 철근이 삐죽삐죽 서 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 증축을 위한 준비인 모양이다. 구매력기준 1인당 GDP가 11,124달러인 요르단 사회의 역동성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제라시의 로마유적 구경에 앞서 점심을 먼저 먹었다. 주차장에 대형버스들이 몰려있는 것을 보면 꽤나 유명한 식당인가보다. 뷔페식 점심이었는데, 식당 입구에서 전통방식으로 굽고 있는 난을 같이 제공하고 있었다. 난을 굽는 방법도 구경하고 또 그 맛도 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난 만들기. 밀가루반죽을 펴서 (좌; 강대출님 제공) 가마의 벽에 붙인다.(중) 가마불길에 익어간다.(우)

참고자료:

(1) 정양모 이영헌 지음. 이스라엘 성지, 어제와 오늘, 86-90쪽, 생활성서사 펴냄, 1988년

(2) 하은교회 자료실. 세례 요한의 요단강세례 터.

(3) Wikipedia. Jord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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