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관리정책 패러다임 바꾸자②…호주는 어떻게 수혈량을 줄였나
국가차원에서 PBM 도입…도입 후 입원환자 사망률·재원일수 모두 감소

혈액 수급난 때문이 아닌 환자 건강을 위해 수혈을 최소화하는 ‘환자혈액관리(Patient Blood Management, PBM)’ 시스템을 국가 차원에서 도입한 나라가 있다. 수혈가이드라인까지 PBM가이드라인으로 바꾼 호주다. 호주에 있는 의료기관들은 대부분 PBM을 적용하고 있다. PBM을 도입한 후 호주의 수혈량은 미국의 50% 수준으로 줄었다.

무엇보다 PBM을 표준 치료 방식으로 적용한 이후 환자들의 건강 상태가 좋아졌다. 지난 2008년부터 보건의료시스템에 PBM을 적용한 서호주 지역에서 실시한 연구 결과로 2017년 6월 발표됐다. PBM을 도입한 서호주 지역 3차 의료기관 4곳에 입원한 환자 60만5,046명을 2008년 7월부터 2014년 6월까지 6년 동안 추적 관찰한 결과, 입원 1건당 적혈구, 신선동결혈장(fresh-frozen plasma, FFP), 혈소판제제 사용량이 41%나 줄었다. 또 PBM을 적용한 환자는 입원 중 사망률이 28% 줄었고, 병원 내 감염 건수는 21%, 뇌졸중 발병률은 31% 감소했다. 평균 재원 일수도 15%나 줄었다.

한국도 PBM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그 근거로 호주의 사례를 제시한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이나 영국 등 다른 나라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의료현장에 PBM이 표준 치료로 보편화된 유일한 나라가 호주다. 호주가 PBM을 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문가 중 한명이 서호주대 악셀 호프만(Axel Hofmann) 교수다.

호프만 교수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비용을 줄이면서 환자의 치료 결과를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잡아야 한다”며 PBM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 PBM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

서호주대 악셀 호프만은 청년의사와 인터뷰에서 수혈을 최소화하는 환자혈액관리(PBM)은 환자의 치료 결과도 향상시킨다고 말했다(사진제공 : 대한환자혈액관리학회)

2003년경 화학요법으로 인한 빈혈 환자, 수술 전후 환자, 신장질환자 등의 빈혈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의사들이 적혈구 생성 촉진 인자인 ‘에리스로포이에틴(erythropoietin, EPO)’를 치료제로 선호했다. 당시 수혈이 ‘무료’이므로 표준 빈혈 치료법으로 남아야 한다는 주장도 많았다.

하지만 수혈은 수많은 자원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와 생각을 같이 하는 동료들은 수혈 비용을 조사했고 혈액 1유닛(unit)을 수혈하는 데 드는 비용이 500~1,200달러라는 결과를 도출했다. 무엇보다 당시 시행된 수혈의 대부분이 불필요해 보였고 환자의 상태와 사망률 등이 수혈량과 연관돼 있었다. 그 이후로 환자의 빈혈과 출혈을 관리하고 기존 치료 방식을 재평가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게 분명해 졌다.

그러던 중 프라하에 있는 호텔에서 유명한 호주 혈액학자인 제임스 이스비스터(James Isbister) 교수를 만나 새로운 표준 치료 방식을 설명할 적절한 용어가 무엇인지 논의했다. 당시 우리는 혈액관리의학회(Medical Society for Blood Management) 이사회 참석차 모였다. 그 자리에서 이스비스터 교수는 ‘환자혈액관리(Patient Blood Management, PBM)라는 용어를 제안했다.

이스비스터 교수는 PBM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헌혈자의 혈액을 관리하는 것과 별개로 수혈이 필요한 환자들을 위한 혈액 관리에도 초점을 맞출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스비스터 교수는 2007년 PBM 용어 채택을 학회에 공식 제안했다.

- PBM이 왜 필요한가.

비용을 줄이면서 환자의 치료 결과를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잡아야 한다. 그게 바로 임상적, 경제적, 윤리적, 의학적인 필요성이다.

- 세계적으로 PBM이 보편화돼 있는 나라는 호주가 유일하다고 들었다. PBM이 의료 현장에 빠르게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주요 이해관계자들이 한 배에 탄 처지였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 서호주 지역 작은 사립병원에서 섀넌 파머(Shannon Farmer)와 그의 동료들이 세계 최초로 혈액관리프로그램인 ‘Blood Conservation Programs’을 시작했다. 섀넌 파머는 PBM 분야에서 잘 알려진 전문가이다. 섀넌 파머팀은 이 프로그램으로 환자들의 치료에도 좋은 결과를 도출했다. 이 프로그램은 서호주 전체에 영향을 미쳐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낮은 수혈률을 달성했다.

이후 광범위한 임상 결과가 발표됐고 전문가들은 물론 보건 당국도 관심을 보였다. 몇 년 후 서호주 보건부에서 임상적인 근거로 바탕으로 PBM 프로젝트를 실시했고 많은 임상 의사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특히 호주 적십자 혈액 서비스(Australian Red Cross Blood Service)와 국립혈액원(National Blood Authority)이 PBM을 호주에서 자리 잡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호주 보건의료 품질 및 안전위원회(Australian Commission on Quality and Safety in Health Care)는 PBM을 우선 추진해야 하는 과제로 정했으며 National Safety and Quality Health Service 기준에도 PBM이 포함됐다.

호주에서 PBM이 기반을 확고히 할 수 있었던 건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전폭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 PBM을 도입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PBM 프로그램을 의료 현장에 적용하려면 그에 맞춰 보건의료체계를 재구성해야 한다. 병원마다 다학제팀들이 서비스 체계를 PBM에 맞추는 노력을 했다. 전문가들 대부분이 신속하게 이를 받아들여 임상에 적용했기 때문에 호주는 서구에서도 가장 낮은 수혈률을 기록할 수 있었다.

변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다. 그러나 의료 전문가라면 환자에게 근거를 기반으로 한 최선의 진료를 해야 한다.

- 호주는 수혈가이드라인도 PBM가이드라인으로 변경했는데.

국립혈액원이 2008년 의학적인 근거에 기반한 혈액관리 가이드라인 개발을 시작했다. 국립혈액원은 가이드라인을 개발하기 위해 전문가그룹을 구성했고 여기서 세계 최초로 PBM 가이드라인을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전문가그룹은 2008년부터 2016년까지 출혈, 수술, 중환자 관리, 산과 및 출산, 신생아 및 소아과 등 6가지 모듈을 개발했다. 이 과정에서 2,000개가 넘는 논문을 참고했다.

- 호주 외에 PBM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나라가 있는가.

뉴질랜드가 적극적으로 PBM 도입 계획을 수립해 추진하고 있으며 아시아에서는 홍콩과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이 정부 차원에서 PBM 도입 논의를 시작했다. 미국에도 PBM을 도입한 병원이 수백개에 달하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은 뉴저지 주에 있는 잉글우드병원(Englewood Hospital and Medical Center)이다.

또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는 최근 PBM을 표준 치료 기준으로 정하기 위해 병원과 보건당국을 위한 두 가지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유럽 내에서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 발 빠르게 대처한 국가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포르투갈이다.

- 한국에서는 PBM은 아직 낯선 개념이다.

모든 것은 정보와 교육에서 나온다. 의학교육 과정에 PBM을 넣는 것을 권한다. 또한 PBM이 환자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 결과를 임상 의사들에게 제공하는 게 효과적이다. PBM이 환자의 건강을 어떻게 향상시키는지 알게 되면 PBM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이다.

저작권자 © 청년의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