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관리정책 패러다임 바꾸자① 수혈은 제한 없고, 대체치료법은 비급여
수혈 최소화 하자는 환자혈액관리(PBM), 대안으로 부상

흔히 수술실이라고 하면 ‘피’를 떠올린다. 수술을 하면 출혈이 생기니 수혈은 필수라고 인식돼 있다. 하지만 이 수혈에 대해 다시 고민해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수술 전 환자의 혈색소(헤모글로빈) 수치 등을 적정 수준으로 관리하고 수술 과정에서도 지혈을 잘해 수혈을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강조되는 개념이 환자혈액관리(Patient Blood Management, PBM)다. 환자혈액관리는 공급 중심으로 치우쳐 있는 혈액관리정책을 환자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혈로 인한 면역거부반응 등 환자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들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2010년 PBM을 적극 권장했다.

항상 부족한 혈액…혈액사용량은 일본의 2배

혈액관리정책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매번 반복되는 혈액 공급난 때문에 수면 위로 급부상했다. 21일 현재 대한적십자사가 보유하고 있는 적혈구제제는 4일분이다. 적정혈액보유량은 일평균 5일분 이상이다.

앞으로도 적정혈액보유량을 유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헌혈을 가장 많이 하는 10~20대 인구가 줄면서 전체적인 헌혈률도 하락세이기 때문이다.

적십자사가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전체 헌혈률은 2011년 6.9%에서 2014년, 2015년 7.9%까지 증가했지만 2016년 7.3%로 감소했다. 10~20대 헌혈률 감소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0~20대 헌혈률은 전체 헌혈자의 73.4%를 차지한다. 하지만 만 16~19세 헌혈률은 2015년 41.8%에서 2016년 37.7%로 급감했다. 만20~29세 헌혈률도 2015년 19.1%에서 2016년 15.8%로 감소했다.

헌혈자 수도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16~19세 헌혈자는 13만1,350명, 20대는 15만1,042명이나 감소했다. 적십자사는 2017년 대비 2030년에는 헌혈가능인구(만 16~69세)가 188만여명 감소하고 주요 헌혈연령인 10~20대 인구는 263만명 정도 감소할 것으로 예측했다.

헌혈을 많이 하는 10~20대 인구는 감소하고 수혈의 73%를 차지하는 50대 이상과 중증질환자는 증가하고 있는 게 한국 상황이다. 고령 환자들은 빈혈이 많고 혈관 상태 등이 약해 수혈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헌혈률 감소만 문제는 아니다. 선진국에 비해 한국은 수혈량이 너무 많다는 지적이다. 초고령화 사회인 일본보다 한국이 혈액을 2배 가량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적혈구제제 사용량이 한국은 인구 1,000명당 41유닛(unit)인 반면 일본은 26.3유닛을 사용했다. 호주는 인구 1,000명당 27유닛을 사용했다. 최근 5년간 수혈을 받은 환자 수가 증가해 적혈구 사용량도 2012년 191만 유닛에서 2016년 194만 유닛으로 늘었다.

출처 : 대한적십자사

혈액 사용에 관대한 제도

전문가들은 한국이 혈액을 많이 사용하는 데는 수혈을 권장하는 건강보험제도가 한 몫 한다고 지적한다. 적혈구제제는 급여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지만 수혈 대체 요법인 고용량 철분주사제는 급여 적용이 극히 제한적인 게 단적이 예다. 현재 급여인 철분주사제는 베노훼럼주 하나로, 혈액투석을 받는 환자에게 사용했을 때만 급여가 적용된다.

수술 전 2~3일 동안 철분주사제를 맞으면 환자의 헤모글로빈 수치가 올라가 수술 시 수혈을 할 필요성이 낮아진다. 수술 후에 생길 수 있는 빈혈도 철분주사제로 치료할 수 있다.

특히 빈혈이 많은 암 환자들은 수술 전 헤모글로빈 수치 관리가 중요하다. 경구형 철분제는 암 환자에게 거의 효과가 없어 헤모글로빈 수치를 올리기 위해서는 고용량 철분주사제 처방이 필요하다. 하지만 고용량 철분주사제는 비급여로 1회에 15만~20만원 정도로 환자 부담이 크다. 반면 급여인 혈액은 1유닛(400cc)에 5만원 정도로 환자는 이중 5%인 2,500원만 부담하면 된다.

혈액을 많이 사용했다고 해서 삭감되는 경우도 없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관계자는 “수혈량이나 횟수를 제한하지 않는다. 헤모글로빈 수치 10g/㎗ 미만이면서 이전보다 수치가 10% 이상 감소했다는 기준에만 부합하면 다 인정해주는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수술 중 환자가 흘린 혈액을 다시 모아 수혈하는 자가수혈기 ‘셀 세이버(Cell saver)’는 이 적용된다. 셀 세이버는 지난 2000년 11월부터 급여 대상에 포함됐으며 2015년 12월 적용 대상이 확대됐다. 셀 세이버를 사용하면 수혈량을 대폭 줄일 수 있다.

국립암센터 국제암대학원대학 김영우 교수는 “흔히 혈액이 싸다고 생각한다. 건강보험이 적용돼 환자는 2,500원만 내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설, 장비, 인력 등을 감안하면 혈액제제 1유닛을 만드는데 100만원 가까이 든다고 봐야 한다”며 “아주 귀중한 자원으로 꼭 필요한 환자에게만 사용돼야 하는데 현재 의료 현장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대한환자혈액관리학회장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제도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있다. 철분주사제를 사용할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여야 하는데 현재는 오히려 반대”라며 “특히 암 환자들은 위장관에 철분 흡수를 조절하는 물질의 수치가 많이 올라가 있어 철분 흡수가 잘 되지 않아 경구형 철분제는 효과가 없다. 주사제를 써야 하는데 건강보험 적용이 안된다”고 지적했다.

“꼭 필요한 수혈만 하자”

관행적으로 이뤄지는 수혈도 문제다. 질병관리본부와 대한수혈학회가 제정한 수혈가이드라인에는 환자의 혈액 내 헤모글로빈 수치가 7g/㎗ 이하일 때 수혈을 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헤모글로빈 수치가 10g/㎗만 돼도 대부분 수혈을 선택한다(정상은 13~14g/㎗). 1920년대 제시된 기준을 관행적으로 따르고 있는 셈이다.

이런 관행을 끊고 꼭 필요한 환자에게만 수혈을 하는 시스템을 만들자며 의료계 내에서 대안으로 제시되는 게 PBM이다. 수술 전 환자의 헤모글로빈 수치를 적정 수준으로 올리고 수술 과정에서 혈액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자는 것이다. 환자 치료 시 수혈을 최소화하는 치료법을 찾기 위해 다학제적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이미 호주에 있는 의료기관 대부분은 PBM을 도입했으며 미국은 전체 의료기관의 25% 정도가 PBM을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도 환자혈액관리학회를 중심으로 PBM을 의료현장에 적용하자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2016년 개정된 제4판 수혈가이드라인에도 PBM 개념이 반영됐다. 개정된 수혈가이드라인은 혈액제제별로 수혈적응증과 수혈 대안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만성빈혈에 적혈구제제 수혈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헤모글로빈 수치 7g/㎗’을 제시했지만 증상이 없으면 특정 진단에 따라 경구용 또는 정맥주사용 철분제, 비타민B12, 엽산, 적혈구생성인자 등을 시행하도록 했다.

대한수혈학회 엄태현 홍보이사(일산백병원 진단검사의학과)는 “안전하고 적정한 수혈이 수혈가이드라인의 목적이다. 적정한 수혈은 수혈 적응증을 정확히 지키고, 더 나아가 수혈의 대안까지 고려해 수혈과 비교해서 환자에게 비용효과성(cost-effectiveness)이 높은 걸 선택하는 것”이라며 “판단의 중심을 혈액제제에서 환자로 옮기고 수혈과 수혈의 대안을 함께 고려하는 게 PBM이다. 수혈가이드라인 4판에서는 PBM 개념을 반영해 혈액제제별로 수혈적응증과 수혈의 대안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환자혈액관리학회 연구위원장이기도 한 엄 이사는 “수혈이 무조건 좋지 않다는 게 아니다. 임상에서 신중하게 수혈이 필요한 상황인지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라며 “수혈이 필요한 환자에게 혈액이 원활하게 공급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고려대안암병원 박종훈 원장은 “미국에서는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환자들의 헤모글로빈 수치가 떨어지는 원인 중 하나가 너무 많이 하는 혈액 샘플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최소화하는 노력도 한다”며 “우리도 수혈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혈액관리학회장인 김영우 교수는 “내가 수술하는 위암 환자의 수혈률은 0%에 가깝다. PBM 개념을 적용하면 위암 등 암 수술에서는 적어도 10%, 관절 수술에서는 50% 이상 수혈량을 줄일 수 있다고 본다”며 “수혈로 인해 이식된 백혈구가 환자의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장기적인 연구가 부족하며 적혈구 자체가 가진 면역성 때문에 면역 반응은 반드시 일어난다. 꼭 필요한 경우에만 수혈을 하도록 제한해 환자의 임상 결과를 좋게 하는 게 PBM의 부목적”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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