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요즘에는 유독 타임 워프(time warp)와 관련된 드라마가 많이 나오는 것 같다. 조선의 한의와 현대의 의사가 타임워프를 통해 만난다는 ‘명불허전’이라는 드라마와 꿈을 통해 미래를 바꾼다는 ‘당신이 잠든 사이에’.

모두 현실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오늘의 비극적인 현실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동화적인 소망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인기를 끄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내 삶에서도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현재로서 전혀 없겠지만…나는 2017년이라는 자체를 내 삶에서 아예 지워버리고 싶다.

TS 엘리엇이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이야기 했듯 내게도 2017년 4월은 잔인하기 그지 없었다. 둘째가 태어난 지 한 달째 되었던 2017년 4월 27일. 둘째에게 사랑이 집중될까봐 두려웠던 것일까? 나의 큰 딸은 간질중첩증으로 지역 대학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올해 다섯 살이 된 딸아이는 유치원에 입학해 날마다 한창 재롱을 부리는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자라면서 감기 같은 잔병치레는 몇 번 했지만 크게 아파본 적도 없었고, 워낙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었기에 자다가 아이가 느닷없이 소리지르는 모습을 보이자 야경증(Sleep terror)인 줄 알고 '저절로 좋아지겠지' 하고 방치했다가 병을 키운 것이 문제였다.

나는 과거에 딸아이가 특이병력이 없었고, 뇌손상이나 발달 문제도 전혀 없었기에 금방 좋아질 것이라 믿었다. 정신과 의사로서 그간 내가 보아왔던 뇌전증 환자들은 아티반이나 디아제팜 주사를 맞으면 발작을 멈추고 잠을 자는 시기를 거쳐 다시 의식이 회복되었고, 발작이 없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상적인 생활을 하였으니까. 알코올 의존 환자들을 대상으로 환자교육을 할 때 앵무새처럼 알코올 금단증상으로 인해 발생되는 간질중첩증은 사망률이 10~15%에 달하는 치명적인 질환이라고 숱하게 교육했지만…그것이 우리 아이가 될 것이라고는 단연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딸아이도 처음에는 미다졸람 주사를 맞고 의식이 회복되었다. 병원 측에서는 바이러스성 뇌염이 의심된다고 하였으나 뇌 척수액 검사 상 배양된 바이러스는 없었으며, 뚜렷한 원인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이의 발작은 조절되지 않고 지속되었다. 담당교수님은 아이의 뇌 MRI를 보고 전두엽에 일부 뇌 손상이 있어 예후가 좋지 않을 수 있다고 이야기 했었지만, 아이는 숫자세기를 시키면 100까지 잘 세었고, 자신이 다니고 있던 유치원 이름이랑 엄마, 아빠 이름을 다 기억했다. 한 달 전에 태어난 동생이 보고 싶다고 이야기 했으며 평상시와 비교해서 반응이 약간 느리기는 했지만 발음도 또박또박 잘 했었기에 나는 교수님의 말씀을 대수롭지 생각했었다.

아이의 증상이 어느 정도 호전되는 것 같았고, 중환자실에서 엄마, 아빠와 떨어져 열흘 넘게 혼자 지내게 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에 입원 열흘째 되는 날 담당교수님과 상의하에 아이를 일반병실로 옮겼다. 그런데 일반병실로 간 지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아이는 갑자기 말이 없어지고 멍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담당 전공의는 이제 갓 1년차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임상경험이 많지 않았고, 아내가 아이가 이상한 것 같다고 병동 간호사를 통해 여러 번을 이야기 했지만, 아이의 심박수가 올라가는 것도 없고(참고 : 대개 일반적으로 경기를 하면 심장 박동수가 올라가게 마련이다) 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니 일단은 지켜보자고 하면서 시간이 점점 지체되었다. 담당교수님의 저녁 회진 후 아이가 눈이 한쪽으로 쏠려 있고, 반응이 없는 것이 아무래도 뇌전증 발작이 재발된 것 같다며 아이는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다시 아이와 뇌전증 사이의 외로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올해는 십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황금연휴가 5월과 10월 두 차례 있어 많은 사람들은 연차를 붙여서 쓰면서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겠지만 아픈 아이가 있는, 그것도 나 같이 중환인 아이가 있는 사람들에게 황금연휴는 후회와 눈물과 안타까움을 주었던,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딸아이는 하루라도 빨리 이런저런 검사를 해서 원인을 적극적으로 밝혀도 시원찮은 지경이었지만, 그놈의 황금연휴 때문에 검사는 하나둘씩 지연되었고 그건 서울에서나 지방에서나 상황이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비록 아이가 지방에 있긴 하지만, 일단 담당교수님을 믿고 치료해 보자는 생각에 아이가 다시 호전되면 서울에 전원하자고 계획을 세웠었다.

“보호자분, 저희 병원에서는 뇌파 모니터링 같은 거 하지 않는데요.”

서울에서는 간질중첩증 환자들에게 통상적으로 뇌파 모니터링을 한다고 들었는데, 지방에서는 담당 전공의에게 아이를 뇌파 모니터링 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여기서는 이런 걸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걸 도대체 뭣 하러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에 나는 치료진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차서 아이를 당장 전원 시키려고 했지만 교수님이 그러면 아이한테 24시간 뇌파 모니터링을 하면서 간질파에 대해 살펴 보자고 해서 결국엔 24시간 모니터링 검사를 시행하고 전원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만약에 타임머신이 정말로 있어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이 때로 돌아가서 나에게 얼른 아이를 데리고 서울에 가라고…더 이상은 아이를 여기에 두고 지체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아이와 함께 24시간 뇌파 모니터링을 하던 그 밤, 나는 아이의 멈추지 않는 부분발작 때문에 무섭고도 공포스러운 밤을 보내야 했다. 발작 유발을 목적으로 미다졸람을 줄이자마자 아이는 그 전까지는 100까지 잘 세다가 말을 멈추고 요상스런 온갖 표정을 지으며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괜찮아질 거라 위로했지만 스테로이드와 오르필, 온갖 항경련제를 쏟아부어도 아이의 발작은 계속되어 갔고 이제는 여기에서 하는 치료를 더 못 믿겠다 싶어 서울에 가겠다고 결정했을 때 아이의 상태는 너무나도 심각해져 있었다. 아이는 결국 서울로 전원하지 못하고 펜토탈 혼수치료(주 : 펜토탈 혼수치료란 컴퓨터가 먹통이 되었을 때 리셋버튼을 눌러 다시 켜듯 심한 간질발작을 멈추기 위해 마취제를 과량 사용하여 뇌기능을 일시적으로 완전히 정지시키는 치료를 의미한다)를 시작했고, 이후로 아이는 깨어나지를 못했다. 아이가 목에 기도삽관을 하고 중심정맥관 삽입을 하면서 '너무 무서워, 엄마 안아줘~아빠 안아줘~'라고 중환자실이 떠나가라 울부짖었던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아이의 마지막 소리였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치료진의 처치를 위해 멀리 뒤에서 아이가 우는 것을 말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일들은 불과 아이가 입원하고 2주도 안되어 일어났다. 행복했던 우리 가정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고, 아이가 없는 집안은 적막하다 못해 침울하기까지 했다. 이것이 정령 꿈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냥 모든 게 다 악몽이었고, 내일은 딸 아이가 멀쩡하게 깨어나 “엄마, 아빠, 나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나쁜 꿈을 오랫동안 꿨나봐”라고 이야기 했으면 좋겠다고 수도없이 생각했다. 사람의 힘으로, 현대의학의 힘으로 어쩔 수 없게 된 딸아이의 상태를 놓고 매일 같이 새벽기도를 나가면서 하나님에게 제발 기적을 베풀어달라고 숱하게 눈물로 기도를 했다. 나는 갑자기 나에게 닥친 이 모든 어이없는 현실을 다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처절한, 내가 살아야만 하는 현실이요 고통 그 자체였다. 아이는 여전히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힘든 사투를 혼자서 벌여야만 했고, 몇 번의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또 넘겼다.

나는 아이의 중환자실 병원비와 둘째의 베이비 시터 인건비, 생활비까지 가정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기에 아이가 아픈 중에도 매일 병원에 출근해서 환자를 보아야 했다.

환자를 진료하는 시간 동안에는 그나마 아이 생각을 덜 할 수가 있었는데, 그건 나에게 있어 일종의 면죄부와도 같았다. 그러나 나는 정신과 의사로서 환자들에게 공감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환자들이 너무나도 미웠다. 아이가 심정지가 와서 노르에피네프린과 도파민을 잔뜩 주입한 뒤 간신히 살렸지만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는 심정지 때문에 차디찬 중환자실 보호자 대기실 바닥에 누워 조마조마했던 밤을 보내고 초췌한 모습으로 출근했을 때, 조목조목 따지기 좋아하고 내 말에 늘 딴지를 걸어오던 한 알코올 의존 환자는 나에게 "니가 그렇게 앵무새처럼 읊어대던 간질중첩증을 난 입원하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당신 괜히 환자들한테 겁이나 주고 다니지 말라"고 비아냥 거렸다.

환자의 조롱하는 그 말은 나에게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꽃혔다. 나는 환자에게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온갖 욕이란 욕을 다 퍼부어주고 당장이라도 병원에서 쫓아내고 싶었지만, 환자가 내 지금 상황을 전혀 모르고 함부로 지껄인 것을 알기에 참고 또 참아야 했다.

또 요구사항이 많고 징징거리는 환자들을 마주할 때는 '그래도 너는 말이라도 할 수 있어서 좋겠다, 우리 애는 아파도 아프다는 말 한 마디도 못하고 있는데…' 하는 생각이 앞섰고, 아이가 죽고 나서 너무나도 삶이 우울하고 무력해서 술을 마시게 되면서 알코올 중독이 되었다는 어느 아주머니 환자를 보았을 때 나는 우리 애가 만약에 죽으면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두려운 생각도 들고, 그 아주머니가 너무 안쓰러워서 면담이 끝나고 돌아가면서 속으로 울고 또 울었다.

현대의학의 힘으로 쓸 수 있는 약이란 약은 다 써보았지만 아이의 상태는 뚜렷한 호전이 없었고, 치료기간은 길어졌다. 고작 다섯살 밖에 안된 가녀린 아이의 몸에 어른들도 감당하지 못할 여러 독한 주사약들을 달고 병마와 싸우는 아이의 모습을 그저 지켜보아야만 하는 나의 마음은 하루하루가 슬픔이요, 절망이었다. 차라리 치료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었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어떤 치료가 행해지고 있고 지금 아이의 상태가 어떻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나는 더 고통스러웠고 괴로웠다.

아이의 병 앞에서 경제적으로 좀 더 안정되고 싶고, 정신재활을 공부해 보고 싶어서 만 35년 동안의 수도권 생활을 버리고 가족들을 데리고 지방까지 내려온 나의 욕심은, 차라리 지방에 내려오지 않았더라면 아이가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후회와 한탄이 되어 내게 돌아왔다. 밥을 먹고 숨을 쉬며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것도 아이 앞에서는 죄스럽게 느껴졌고, 살아갈 소망이 없이 그저 죽지 못해 사는 하루하루가 지속되었다. ‘왜 하나님은 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까’ 원망스러웠고, 중환자실 옆자리에 아이와 같은 병으로 입원했던 다른 아이들은 증세가 빠르게 호전되어 퇴원하였는데, 우리 아이의 치료실패를 거울삼아 뇌파 모니터링도 하고 적절하게 치료하면서 회복이 되는 그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 아이가 마치 치료 본보기가 된 것 같아 가슴이 아프면서도, 그 아이가 부럽기도 하였고 스스로 자격지심이 들어 괜히 그 아이의 보호자들이 우리를 보고 비웃는 것처럼 느껴져 하루하루 내 마음은 너무나도 괴로웠다.

이제 아이가 병을 앓은 지 7개월이 지나간다. 그런데 마음은 벌써 한 7년은 지난 것 같이 느껴진다. 앞으로 갈 길이 한참 멀기만 한데…그래도 내가 지금까지 이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방긋방긋 웃으며 바닥을 기려고 노력하는 우리 둘째 때문이기도 하고, 마음 속 한구석에서 그래도 조금이라도 아이가 좋아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한 줄기 희망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광야의 길을 매일매일 지나며, 나는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오기를 꿈꾼다.

친구도 별로 없고 사람들과 소통을 그다지 많이 하지 않는 저에게 있어 글쓰기는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애인처럼…아무에게도 말로서는 털어놓지 못할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유일한 취미입니다. 이 글을 내면서 추호도 수상을 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2년 전에 제 인생에 있어 두 번 다시 없을 역작이라고 생각하며 출품했던 작품이 간신히 끄트머리에서 상을 탄 것을 보고는 글을 정말로 잘 쓰는 선생님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으니까요. 더군다나 이 글은 날로 멀어져가는 환자 대 의사의 관계 회복을 희망하는 취지와는 전혀 걸맞지 않는 그저 내 스스로가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어디에라도 하소연 하고픈 생각에 배설물처럼 마구잡이로 쏟아낸 글이었으니까요.

아이가 아프고 지난 8개월 동안 저의 시간은 멈추어져 있었습니다. 원래도 대인관계가 활발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과의 모든 소통을 거의 끊다시피 하였고, 점심시간에도 남들보다 일찍 식당에 와서 누가 말이라도 걸까 무섭게 허겁지겁 밥을 입 속에 우겨넣다시피 하며 살았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살아지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저의 유일한 소통의 대상이 있다면 환자들이었지요. 환자들이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한 것인줄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비록 제가 상을 타려고 글을 쓴 것은 아니었지만, 이 지면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을 것 같아 수상소감에 덧붙입니다. 아직까지 아이가 뚜렷한 호전을 보이는 것이 전혀 없어 보이지만, 저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줄기 희망이라도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요즘에 신문을 보니까 심한 뇌손상 환자에게 줄기세포 치료를 했더니 기능이 조금은 회복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리더군요. 청년의사 신문을 보시는 많은 독자분들 중에 관련된 연구를 하시거나 아니면 소아 뇌손상 환자의 재활에 특별히 관심있는 분들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아이가 아프고 병원에서 보호자가 되면서 만났던 많은 이웃들이 있습니다. 엄마의 이름으로, 아빠의 이름으로 저마다 삶의 무게를 오롯이 지고 있는 이웃들과 그리고 치료의 현장에서 오늘 하루도 꿋꿋이 환자와 보호자와 함께 하고 계시는 치료진들에게 수상의 영광을 돌립니다.

저작권자 © 청년의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