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이스라엘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동유럽에 이어 이번에는 이스라엘-요르단을 찾았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아즈리엘리센터에서 바라본 텔아비브의 파노라마뷰 (Wikipedia에서 인용함)

텔아비브(Tel Aviv)는 지중해연안에 있는 이스라엘 최대도시로 2016년 기준 438,818명이 살고 있으며, 도시권역을 포함하면 378만5천명이 살고 있다. 이스라엘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히브리어로 ‘봄의 언덕’을 의미하는 텔아비브라는 지명은 에제키엘 3장 15절 “내 겨레가 사로잡혀 와서 살고 있는 그발 강 가 텔아비브에 이르렀다. 나는 얼빠진 사람이 되어 칠 일간 그들 가운데 앉아 있었다.”라는 구절에서 유래한다. 텔아비브는 파괴된 고대 이스라엘의 재건을 갈망하는 유대인의 마음을 상징한다.

1886년 이래 유대 정착민들이 아랍인들의 도시 야포(Yappa) 주변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은 유대인의 토지취득을 금하고 있어 어려움을 겪었다. 러시아에서 보석세공일을 하더 이주해온 아키바 아리에 바이스(Akiva Aryeh Weiss)는 1906년 “미적이고 현대적 위생 규정에 따라 계획된 건강한 환경을 갖춘 히브리 도시”를 건설하자는 농가(Ahuzat Bayit) 운동을 발족하였다. 66개의 유대인 가정이 조개껍질 복권으로 토지를 나누기 위해 황량한 모래 언덕에 모인 1909 년 4 월 11 일을 텔아비브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날로 삼았다. 텔아비브는 각 집에 수도를 공급하고, 넓은 거리에 가로등이 있는 독립적인 유대인의 도시로 계획되었다. 초대 텔아비브 시장이 된 시온주의자 메이어 디젠고프(Meir Dizengoff)는 아랍인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도시 텔아비브를 꿈꾸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제국이 패전국이 되면서 이 지역은 영국의 지배로 넘어갔다. 영국이 지배하면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유대인이 늘어났고, 당연히 아랍사람들과의 마찰도 늘어갔다. 1921년 야포에서 생긴 양 측의 충돌로 48명의 아랍인과 47명의 유대인이 사망했고, 73명의 아랍인과 146명의 유대인이 부상을 당했다. 이 사건 이후로 많은 유대인들이 야포를 떠나 텔아비브로 이주했다. 그 결과 1920년 2천명이던 텔아비브 인구가 1925년에는 3만4천명이 되었다. 텔아비브는 상업 중심지로 발전을 거듭하여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한 1948 년 5 월 14 일에는 2십만 명이 넘었다. 텔아비브 (Tel Aviv)는 1949 년 12 월 정부가 예루살렘으로 이사 할 때까지 이스라엘 국가의 임시 수도였다. 예루살렘의 지위에 관하여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 국가들의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하자 유엔이 중재에 나서, 이스라엘에 주재하는 모든 국가의 대사관은 텔아비브와 그 주변에 있다.(1)

1950년부터는 유대인들의 도시 텔아비브와 아랍사람들의 도시 야포를 통합하여 텔아비브-야포라고 부른다. 텔아비브와 달리 야포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도시라고 자부하는 오래된 도시이다. 노아의 셋째 아들 야벳이 이 항구를 세웠고, 도시 이름도 그로부터 유래한다고 유대인들은 믿는다. 고고학적으로도 신석기시대(기원전 5천년대)와 청동기시대(기원전 4천년~3천1백년)의 유적과 힉소스문명(기원전 1,750~1,550년)의 유적들이 출토된 바 있다.

이 지역이 아프리카,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유럽 등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까닭에 세 지역에 들어선 힘센 세력들에 의하여 침략을 받은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1468년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가 점령한 이래 기원전 12세기까지 이집트의 지배를 받았다. 그 이후 블레셋족의 지배를 잠시 받았다가 딘 지파의 유대족이 지배하였지만, 기원전 8세기에 다시 이집트의 지배를 받는다. 기원전 702년에는 앗시리아인들이, 기원전 332년에는 알렉산더대왕이, 기원전 63년에는 폼페이우스의 침공으로 로마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4세기경 유대인들이 이주해 들어왔지만, 636년에는 아랍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십자군시대에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의 지배를 받다가 1268년 회교도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아랍사람들의 도시가 되었다.(2)

텔아비브-야포의 해안. 요나가 이곳에서 출항하는 배에 탔을까? (Wikipedia에서 인용함)

야포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나의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Nineveh)로 가서 사람들을 회개토록 하라는 여호와의 신탁을 받은 요나가 스페인 남쪽에 있는 항구도시 다르싯으로 달아나기 위하여 배를 탄 곳이 야포였다고 한다. 야포를 떠난 배가 풍랑을 만났고 저간의 사정을 알게 된 뱃사람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졌더니 풍랑이 가라앉았다. 한편 요나는 큰 물고기가 삼켰는데, 그 뱃속에서 여호와께 기도를 했더니 구출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요르단 여행경로

어렵사리 입국신고를 마치고 짐을 찾아 인솔자에게 갔다. 일행 가운데 세 사람은 벌써 짐을 찾아 로비로 나가버렸단다. 여행을 많이 해본 모양이지만, 일행과 함께 움직여줘야 하는 단체여행에는 잘 맞지 않는 분인가 보다. 로비에서 일행을 모은 인솔자가 조를 편성하려는 것도 반대하는 등 여행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든 이스라엘과 요르단을 오가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현지가이드가 조금 늦었다. 다음날이 대속죄일이라서 공항검색이 강화된 탓이라고 하는데, 그런 사정은 당연히 사전에 고려되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대속죄일에는 유대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을 노린 아랍계의 테러가 발생할 수도 있단다. 대속죄일 무렵, 계절이 바뀌어 이듬해 4월까지 이어지는 우기가 시작된다.

대속죄일이라고 옮기는 욤 키푸르(Yom Kippur)는 유대종교력으로 신년이 시작되는 티쉬리(Tishiri)월의 10일에 해당된다. 서양력으로는 9월말에서 10월초쯤이다. 대속죄일은 유대인들의 모든 절기 가운데 가장 엄숙한 절기이다. 히브리어로 욤은 ‘날’을, 키푸르는 ‘덮다’ 혹은 ‘죄로부터 면제받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욤 키푸르는 ‘죄 사함을 받는 대속의 날’이다. 대속죄일에 제사장은 소와 염소를 희생하여 잘못을 빌었다.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대속죄일에 금식을 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괴롭게 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여호와 하나님께 속죄한다. 유대인들이 대속죄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이용하여, 1973년 이집트와 시리아는 이스라엘에 군사적 도발을 하는 바람에 이스라엘이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다.(3)

가이사랴에 있는 원자력발전소

현지가이드의 안내로 버스에 탄 일행은 로마유적지가 있는 가이사랴(Caesarea)로 이동한다. 40분 정도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가는데 곳곳에서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바다가 보이는 해안도로를 타고 가이사랴에 가까워지면서 네 개의 커다란 굴뚝이 보인다. 원자력발전소란다. 작은 규모이지만 이스라엘 북부의 전력을 담당한다. 이스라엘은 원전이 전체 전기의 60%를 담당하는데 전력의 수요가 늘고 있다. 이스라엘의 원전을 보니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탈원전정책이 떠오른다. 대체에너지의 확보를 전제하지 않은 탈원전은 결국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전력생산체계로 돌아간다는 의미인데, 온실가스 배출규제와 관련한 국제동향과는 거꾸로 움직이는 상황이라면, 우리나라 환경관련 지표를 더 악화시키는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4)

가이사랴는 텔아비브와 하이파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해안마을이다. 기원전 25년에서 13년 사이에 로마제국의 분봉왕 헤롯이 건설하여 로마황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에게 헌정하였다. 수심이 깊은 항구는 물론 저장시설, 시장, 목욕탕, 로마와 아우구스투스 사원, 극장 그리고 공공건물들을 넓은 도로와 함께 건설되었다. 가이사랴의 항구에는 남쪽으로 500m, 북쪽으로는 200m 길이의 방파제가 건설되었는데, 바위와 콘크리트를 이용하는 당대 최고의 토목공학이 적용된 것이었다. 방파제에 들어간 가장 큰 바위는 5.5 x 1.25 x 1.25m였고, 콘크리트는 11.5 x 15 x 2.4 m였다. 특히 콘크리트는 물위에 띄워놓은 틀에 콘크리트를 채워 물에 가라앉히는 방식을 적용하였다.

도시가 완공된 기원 13년부터 가이사랴 마리티마(Caesarea Maritima)라는 이름의 도시는 로마제국의 유대지방 행정중심지가 되었고, 로마제국의 유대총독이 머물렀다.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내린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us) 역시 가이사랴에서 유대를 통치했다. 3-4세기 무렵 가이사랴에는 유대인, 기독교도는 물론 사마리아인까지 어울려 사는 상업도시로 번영하였다. 6세기 말 비잔틴 시절에는 도시를 둘러싸는 성벽을 건설하였지만, 비잔틴제국이 기울면서 아랍계 이슬람국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614년 페르시아가 잠시 점령하였다가 640년 아랍계 이슬람이 탈환하는 과정에서 도시가 파괴되어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9세기 무렵 해상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가이사랴는 부활하게 되었고, 특히 1101년 십자군의 가니에(Ganier) 기사단이 이곳에 진주하면서 다시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1265년 맘룩크왕조가 이곳을 침공하면서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면서 폐허가 되어 19세기까지 방치되었다. 오스만제국이 보스니아에서 나온 무슬림 난민들을 이곳에 정착하도록 하면서 도시가 재건되기 시작하였고, 1940년에는 인근에 유대인 키부츠가 만들어지기도 했다.(5)

헤롯대왕이 건설한 가이사랴 부근에는 시돈(Sidon)왕 스트라톤1세가 세운 스트라톤 탑(Stratonos pyrgos)이라는 작은 해군기지의 유적이 있었다.(6) 시돈은 티레(Tyre)와 더불어 레반트 지역을 기반으로 한 페니키아의 가장 강력한 도시였다. 페니키아(Phoenicia)는 오늘날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북쪽에 이르는 해안을 따라 번영한 고대문명이다. 기원전 1,200년경부터 900년경까지 지중해를 장악하면서 해상무역을 꽃피웠다. 페니키아는 북아프리카 튀니지(고대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알제리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 지역과 이탈리아의 중남부, 스페인의 남쪽 해안에 이르기까지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이들은 레바논의 삼나무를 이용한 갤리선을 최초로 건조하여 무역에 사용하였다. 페니키아 역시 그리스처럼 정치적으로 독립된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졌다. 페니키아는 최초로 알파벳을 사용한 문명이기도 하다.(7) 여기서 언급한 스트로톤 1세는 기원전 4세기 무렵 페니키아의 도시국가 시돈의 왕이었다.

가이사랴 유적에 들어서면 먼저 원형극장을 만난다(좌) 원형극장의담벼락 아래 인근에서 출토된 대리석 조각을 전시하고 있다. 아우구투스의 발도 볼 수 있다(우) 원형극장의 객석을 파노라마 뷰로 담았다(아래)

가이사랴 유적에 들어서면 지중해를 바라보는 3,000명 규모의 원형극장을 먼저 만난다. 극장의 입구에는 로마시대에 만든 대리석 조각들이 서 있는데 하나 같이 목이 없다. 침략자가 석상의 목을 쳐서 지중해에 던졌단다. 아우구스투스의 발도 있다. 원형극장 내부에 들어섰는데 공연이 예정되었는지 무대가 가설되어 있어 오히려 분위기를 해친다. 원형극장의 비밀을 설명하기위하여 현지가이드가 나서서 성가 한 곡을 뽑았는데 정말 극장 구석구석에서 잘 들린다. 이곳 원형극장의 음향효과의 비밀은 바람에 있다. 객석이 바다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무대에 선 사람은 바다를 등지고서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목소리를 실어 보낼 수 있다. 당연히 공연은 저녁에 바람이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마이크가 없어도 음향효과를 낼 수 있었던 비밀이다.

참고자료:

(1) Wikipedia. Tel Aviv.

(2) 정양모 이영헌 지음. 이스라엘 성지, 어제와 오늘, 96-98쪽, 생활성서사 펴냄, 1988년

(3) 기독일보 20012년 9월 24일자 기사. 유대절기-대속죄일(욤 키푸르)

(4) 연합뉴스 2016년 4월 11일자 기사. '남들은 줄이는데' 한국 CO2 배출 증가율 불명예 1위.

(5) 하은교회 자료실. 가이사랴 (Caesarea).

(6) Wikipedia. Caesarea.

(7) Wikipedia. Phoenic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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