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광명의원 조석현 원장

1.

그림은 빛이 바래있었다. 어둡고 침울했다. 어디에도 이 그림을 그린 작가가 우리나라 근대 미술의 대표라는 것을 알려줄 만한 것이 없었다. 도화지에다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은 이중섭의 시대별 작품들 중 덩그러니 떨어진 외딴 섬 마냥 한 쪽 구석에 전시되어 있었다. 작품에 대한 짤막한 소개를 지나치지 않은 것은, 거리를 지나가다 보이는 병원 간판을 놓치지 않는 직업병 때문이었으리라. 「이중섭의 주치의 유석진 박사 소장 작품」

이중섭의 '돌아오지 않는 강'

해방 후 중섭은 그의 아내 야마모토 아사코를 일본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지독한 가난도 문제였지만 일본인은 자국으로 돌아가라는 사회적 처분 때문이기도 하였다. 얼마 후면 다시 만날 것이라는 기대가 몇 달이 되고, 몇 년이 되고, 급기야 그의 마지막 작품의 이름처럼 '돌아오지 않는 강'이 되고 말았을 때 그는 정신병을 앓고 말았다. 자신은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 함묵증과 거식증으로 드러났을 때 그는 정신과 전문의 유석진 박사의 병원에 입원했다.

중섭은 주치의에게 도화지와 물감, 크레파스 등을 사다달라고 간청하였다고 한다. 당시 예술 치료에 관심이 있었던 유석진 박사는 여러 가지 그림 도구를 구해주었고, 주치의에 호의로 입원실에서 중섭은 정신을 차려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 다음해 중섭은 적십자 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하였다.

2.

그는 자신이 폐암 말기 환자라고 했다. 30대 중반에 폐암 말기라니. 환자와 나는 물끄러미 서로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잠깐의 적막은 진료실에 뭘 좀 가지러 들어온 직원 때문에 깨졌고, 이내 나는 환자의 병력을 캐야 하는 의사 본업의 자세로 돌아왔다. 그는 수차례 받았을 과거 병력에 대한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해 주었다.

일 년 전 너무 숨이 차 병원에 갔더니 폐에 물이 찼다고 했다. 물만 빼면 되는 줄 알았는데 대학병원의 담당 교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이 찬 원인이 폐암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 암이 벌써 몸 이곳저곳에 퍼졌다는, 즉 말기 암이라는 이야기를 차분히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수술도 못하는 지경의 암을 선고 받고 항암제를 먹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반응이 좋았지만 6개월 뒤 항암제에 내성이 생겨 이제는 임상실험 중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집근처 조그마한 동네의원에 온 것은 너무 못 먹고 기운이 없어 수액 치료를 받기 위함이라고 일 년간의 혹독한 병원 생활로 체득된 환자의 소임을 다해 주었다. 내가 진단한 케이스도 아니고 내가 치료중인 환자도 아닌, 그저 보존적인 치료만을 담당하게 된 동네 의사로서 간단한 수액 치료만 지시하면 끝날 진료였지만 내 손가락은 허공에서 머뭇거렸다.

3.

그는 사진 작가였다. 처음 폐암을 진단받을 당시 그는 곧 있을 개인전을 준비 중이었다고 한다. 외국에서 오랜 유학 후 국내에서의 활동의 시작을 알리는 전시회였다. ‘그때 너무 무리를 했던 탓이었을까요?’ 수없이 자신에게 물었을 질문은 건조했다.

그는 자주 병원을 방문하였다. 대부분은 수액 치료를 위한 것이었고, 가끔 소화불량이니, 변비니, 통증 등으로 진료를 보기도 하였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야 그가 고통과 속마음을 내 보여주었을 때 잘 들어주는 것 밖에는 없었다.

"사실...죽게 된다는 사실보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나의 작품들 때문에 더 절망이었어요. 저는 결혼도 안했고, 부양해야 할 가족도 없죠. 홀로 왔다 홀로 가면 되는 거지만...아직도 세상에 보여 주고 싶은 작품들이 많은데...그것들이 바로 내 자신이고 내 자식들인데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더 괴로워요."

예술가들은 그런 것일까? 단지 밥벌이를 위한 직업이 아니라, 예술이란 것이 죽음 앞에서도 미련을 지울 수 없는 아련한 것인가? 작품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자식과 같은 것일까?

한번은 그의 손에 커다란 카메라 가방이 들려있었다. 오늘은 수액을 맞고 나서 사진을 찍으려 갈 참이라고 했다. 치료를 받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예전처럼 발 길 닿는 대로 다니며 찍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사진을 찍지 않으면 자신이 정말 죽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했다. 최근 기운이 없어 촬영을 못 했었는데 오늘은 좀 괜찮은 것 같아 가까운 곳이라도 가서 몇 장 찍고 올까 한다고 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나는 그에게 실례가 안 된다면 진료실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한번 찍어주면 안되겠냐고 부탁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탁에 나도, 그도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 무례함마저 반갑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는 헛기침 한 두 번 한 후 흔쾌히 사진을 찍어주겠노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커다란 카메라를 꺼내더니 내게 가능한 사진기를 의식하지 말고 편하게 있으라고 했다.

그는 진료실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사진작가의 눈길이 닿자 방안 곳곳은 밝은 부분과 어두운 곳이 구별되었고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있던 책들은 한 몫 배경이 되어 책장에서 도드라져 보였다. 그 순간 이 작은 공간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그였다. 나는 마치 그에게 나의 모든 것을 드러내야 하는 환자인 것처럼 앉아 있었다.

사진기를 들고 있는 그의 손이 보였다. 바짝 마른 그의 팔은 사진기를 들기에도 버거워 보였다. 한 때는 저 팔에 펄떡 펄떡한 힘줄과 혈관이 있었으리라. 마치 이중섭의 ‘소’처럼...말기 암 환자 사진작가 앞에서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무척 곤란한 모델이 되었다. 순간 그가 사진기를 내려놓고 말했다.

"원장님. 좀 웃으세요. 원장님이 말기 암 환자 같아요."

그제야 나는 긴장을 풀고 웃으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포즈를 취했다. 죽음을 앞두고도 작품을 포기하지 않는 최고의 사진작가에게 최고의 모델이 되어 보려고.

4.

가을이 깊어가도록 그는 다시 오지 않았다. 긴 치료를 받으러 들어갔을 수도 있겠지. 이사를 갔을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지 말았어야 했나? 그의 안부를 새삼 떠올렸다. 그러던 어느 한가한 날 오후 나는 그의 이름을 접수창구에서 띄워보았다. 조회가 되지 않았다.

정신병원에서 나온 이중섭이 마지막으로 그린 작품은 '돌아오지 않는 강'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가족을 만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중섭은 빈 집에서 홀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소년을 어두운 색채로 그렸다. 소년이 기다리는 여인은 저 멀리서 오고 있었지만 소년은 지척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 사이에는 돌아오지 않는 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세상도 그의 그림을 알아주지 않는 절망 속에서 그는 그림을 놓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강이 자신과 세상을, 자신과 가족을 갈라놓아도 그는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렇게 그의 절망은 예술이 되고, 그는 그렇게 그림을 그리다 죽어갔다.

나는 오늘 잠시 이 땅의 예술가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예술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예술은 죽음을 이겨보려는 도구로도 쓰이지 않았다. 죽게 되더라도 그리고 싶은 것은 그리고, 표현하고 싶은 것은 표현하는 것이었다. 숨이 아직 있는 순간에도 그렇게 살아야 그들은 단 한순간이라도 제대로 살았노라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너무 쉽게 의술은 예술이라고 후배들에게 떠들었던 것을 후회했다. 나의 의술은 누군가를 치료하다 죽는 것이라고 말하기에 나는 너무도 부끄럽고 낯이 두꺼웠다. 나는 조그마한 진료실에서 일희일비하는 나의 의술을 초라하게 만든 젊은 사진작가를 추모했다. 그리고 그가 찍어준 내 사진을 넣어두려고 준비했던 액자를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분명 어색했을 나의 표정이 작품으로 안 나온 것을 안도했다. 그리고 그 액자는 그대로 비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해 먼저 레지던트 트레이닝을 마친 선배의 말이었다.

“수련을 다 받고 보니 의술은 예술이었다.”

병원에만 갇혀 봄이 온 줄도 모르고 있던 나를 밖으로 불러내 자신의 수련 소감을 이야기하는 선배의 말이 그저 부러웠던 것은 나는 또 다시 병원으로 들어가야 했고, 그러기에 처음 쐬어보는 것 같았던 봄 햇빛이 감미로워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나 또한 수련을 다 마치고, 임상의사가 되어 내 환자들을 보기 시작하니 의술은 예술이라는 선배의 말이 참으로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질병의 병태생리와 진단 기준, 치료 방침을 정하는 알고리즘, 수많은 시술과 수술, 처방 등이 ‘한 사람’이라는 환자에게 적용될 때에는 환자의 병력, 가족력, 가족관계로부터 시작해 심지어 경제적 상황까지도 고려하여 이뤄지기 때문이다. 때로는 기준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빠른 회복을 원하는 환자의 기대마저도, 혹은 완벽한 치료를 원하는 나 자신의 조급함마저도 당겼다 놓았다 해야 하는 긴장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어느 새 나 또한 후배들에게 의학은 ‘예술인 것’이라고 자연스레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료실에서 내가 만난 예술가들의 그 예술이란 전혀 다른 차원의 것들이었다. 내가 말한 예술이란 것이 의술이 환자에게 적용될 때 세심하고 정교한 기술을 빗댄 것이라면, 예술가들에게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동기이자 목적이었고 때론 자신의 생명보다도 우위에 둘 수 있는 것이었다. 가히 예술이라는 것은 은유가 아닌 서술로서 자신을 소개할 때 쓸 수 있는 것이었다.

'예술가'. 이중섭 전시회에서 보았던 '돌아오지 않는 강' 작품을 보며 나는 내가 만난 예술가들의 예술 정신을 기리고 싶었다. 그리고 나의 의술이 정말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지 자문하고 싶었다. 언제나 글을 쓰고 나면 그 글에 못 미쳐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만 하다. 그러나 언제가 나 또한 살아가는 이유와 동기가 제대로 된 의술을 펼치는 것이 된다면 오늘의 초름함이 무척 감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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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큰 상을 준 한미수필문학상 심사위원들께 감사 드립니다. 제 글에 대한 세 분의 심사평을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습니다. 2017년 함께 열심히 환자를 진료하며 서로 격려하고 서로 영감을 주고받았던 박용준 원장님, 추성이 원장님, 최미나 원장님, 백은성 원장님, 강영건 원장님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감사하고, 특히 작년 힘든 고3 생활을 잘 이겨낸 아들에게 수고했다고, 자랑스럽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처음 해보는 고3 학부모 시절을 전우애로 함께 이겨낸 아내, 사랑하고 수고 많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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