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동유럽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에 이어 다시 동유럽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동유럽에서 맞은 일곱 번째 아침이다. 동유럽 여행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숙소를 출발해서 프라하성으로 갔다. 원래는 없던 일정인데 인솔자의 특별한 부탁이 있었다고 했다. 570m 길이에 130m의 폭으로 무려 7만㎡의 면적을 가진 프라하성은 세계에서 가장 큰 옛 성으로 보헤미아의 왕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궁이었으며 지금은 체코공화국 대통령의 거처이기도 하다.

성비투스 성당(좌, Wikipedia에서 인용함), 성비투스성당의 본당 회중석(우)

프라하성은 프르셰미슬(Přemyslid)왕조 시절인 870년에 세운 성모마리아교회에서 시작되었다. 10세기 들어 보헤미아 공작 브라티슬라프 1세(Vratislaus I)와 그의 아들 성 바츨라프(St. Wenceslas) 시절에 성 게오르게 대성당과 성 비투스 대성당을 지었다. 800년부터 1306년까지 보헤미아 지역을 다스린 프르셰미슬왕조는 리부셰공주와 결혼한 농부 프르셰미슬이 열었다는 전설이 있다. 1198년 오타카르1세는 보헤미아를 신성로마제국 내의 세습왕국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보헤미아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온 것은 바츨라프의 조부 보리보이 공작시절이었다. 성 비투스 대성당을 지은 바츨라프는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열성적으로 노력하다가 이교도인 동생 볼레슬라프1세에게 살해되었다. 바츨라프는 사후에 보헤미아의 수호성인이 되었다.(1)

보헤미아의 위대한 통치자 가운데 하나인 오타카르2세(Ottokar II 1253~78 재위)는 성을 요새화하는 한편 거주할 목적으로 왕궁을 재건하였다. 14세기 들어 카를4세(Charles IV) 역시 성곽을 강화하게 성 비투스 대성당을 대체할 고딕 양식의 교회를 짓기 시작했는데, 이 교회는 거의 6세기가 지나서야 완공되었다. 1419년에서 1434년까지 이어진 후스 전쟁도 한몫을 하여 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성이 비어있었다. 보헤미아전쟁(Bohemian Wars) 혹은 후스파 혁명(Hussite Revolution)이라고도 하는 후스전쟁은 보헤미아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한 얀 후스를 따르는 사람들을 로마 가톨릭교회에 복속시키려는 교황이 군주들을 규합한 십자군을 다섯 차례나 파견하여 벌인 전쟁이다. 보헤미아왕국의 체코 사람들 대부분이 후스를 추종하는 공동체에 소속되었는데, 얀 지슈카가 이들을 이끌어 다섯 차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2)

1485년부터 라디슬라프 2세가 성을 재건하기 시작하여 왕궁에 커다란 블라디슬라프홀을 추가하였고 북쪽에는 방위탑을 세웠다. 1541년 큰 화재가 발생하여 성곽의 대부분을 불태웠다. 합스부르크왕조 시절 르네상스 양식의 새로운 궁전을 세워졌다. 지금 남아있는 궁전의 건물들이다. 프라하성의 왕궁을 사용했던 루돌프2세는 스페인홀을 세워 소장예술품들을 전시하였고, 궁전의 북쪽 건물을 지었다. 1618년 시작한 30년 전쟁 동안 프라하성은 심각하게 파괴되었고, 18세기 후반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 시절 성의 재건이 마무리되었다.(3)

카를교에서 바라본 프라하성(좌), 카를교 입구에 서 있는 교탑(우)

프라하성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이동한 다음, 트램과 지하철을 바꿔 타면서 카를교까지 갔다. 전날 밤과는 달리 화창하게 개었기 때문인지 인파로 넘쳐나고 있었다. 년간 1억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찾는다는 프라하는 단일도시로는 관광객이 가장 많은 도시라고 한다. 프라하를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카를교를 찾는다고 하는데, 카를교에 서 있는 30개의 석상들 가운데 성 얀 네포무츠키(Svatý Jan Nepomucký)의 석상이 가장 사랑을 받고 있다. ‘네포무크의 성 요한’이라고 불리는 그는 고해성사의 비밀과 가톨릭 교회법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로 가톨릭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체코의 국민 수호성인이자, 고해자, 비방 받은 사람, 강, 다리, 익사자, 홍수 피해자의 수호성인이다. 그는 보헤미아의 국왕 바츨라프 4세의 부인 소피왕비의 고해신부였는데, 왕비가 고해한 내용을 말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혀가 잘리는 등의 고문을 받은 끝에 순교하였고, 시체는 카를교 아래 블타바강으로 던져졌다.

카를교에서 바라본 블타바강 모습(좌), 많은 사람들이 성 네포무츠키상을 쓰다듬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우)

카를교의 조각상들 가운데 유일한 청동상인 얀 네포무츠키의 조각이 가장 먼저 세워졌다. 다리 가운데 구시가 방향으로 왼쪽에 서 있는 그의 입상은 다섯 개의 별이 후광으로 머리를 두르고 있어 쉽게 눈에 띈다. 다섯 개의 별로 후광을 삼은 것은 그의 시체가 던져진 뒤 5개의 별모양의 빛이 강 위에 떠올라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는 전설과 함께 ‘나는 침묵했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tacui’의 다섯 개 알파벳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좌대에는 성인의 삶을 새긴 2개의 부조가 있다. 오른쪽의 부조에 있는 강에 거꾸로 떨어지는 성인의 모습이 새겨진 부분과 왼쪽 부조에 새겨진 개의 부분에 반질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두 부분에 손을 대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 때문에 이곳에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지기 때문이다. 나 역시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소원을 빌었다.

틴성당을 바라보는 얀 후스의 동상(좌), 틴성당. 앞에 있는 건물의 통로을 지나면 아주 작은 마당을 지나 성당에 들어갈 수 있다(우)

정오까지 카를교 주변의 풍광을 즐기다가 구 시청사 쪽으로 이동하였다. 광장 가운데는 얀 후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얀 후스(Jan Hus)는 14세기 말 체코의 기독교 신학자로 영국의 종교개혁가 존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타락한 교회가 초기 기독교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교회의 재산권을 박탈하여 청빈한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이 때문에 1411년 교황 요한23세는 그를 파문하였고, 1412년 그는 가톨릭교회의 면죄부판매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결국 1414년 10월 스위스의 콘스탄츠에서 열린 종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1415년 7월 6일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사후 지지자들이 세력을 규합하여 로마 가톨릭의 박해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켜 1434년까지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결국 로마교황청의 승리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후스의 사상은 마틴 루터 등에게 영향을 미쳐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다. 구 시청과 틴성당 사이에 있는 종교개혁광장에 있는 얀 후스의 동상은 서거 500주년을 맞은 1915년에 세워졌다. 후스의 동상은 생전에 강론을 하던 틴성당을 바라보고 있는데, 동상의 기단에는 ‘서로를 사랑하라. 모든 이들 앞에서 진실(혹은 정의)을 부정하지 마라.’라는 그의 말이 체코어로 새겨져 있다.

틴성당의 입구는 성당앞 상가 건물에 입구가 숨어있다. 좁은 앞마당을 지나 들어간 성당내부는 화려했다. 사진을 찍을 수 없었지만 온통 황금색으로 치장되어 있고 성화들이 걸려있었다. 성당을 나와 유대교 시나고그를 찾아 나섰다. 카프카의 상을 만난 것을 보면 근처까지는 도착한 듯 했지만, 모이기로 한 시간 때문에 끝내 가보지는 못했다. 그리 멀지않았던 듯하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의 근거가 되었던 ‘시온장로들의 프로토콜’이 등장하는 움베르토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에 나오는 장면을 제대로 느껴보았어야 하는데 안타깝다.

구 시청사 벽에 걸린 천문시계(좌), 틴 성당 앞에는 국립미술관이 있다(우)

1시 5분전, 구 시청사 앞에 모여 매시 정각을 알리는 천문시계(Pražský orloj, 프라하 오를로이)의 쇼를 다시 구경했다. 전날 밤에는 컴컴한 가운데 동영상을 찍는다고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낮에 보는 쇼도 실망이었다. 1분도 걸리지 않는 동안 시계 위쪽에 있는 두 개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사도들이 지나가는 것이 전부였다. 매시 정각이 되면 위쪽 시계판의 오른쪽에 서있는 해골이 종줄을 당긴다. 죽음을 의미하는 해골이 종을 쳐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깨우쳐 준다. 해골 옆에 있는 기타 치는 인형과 왼쪽에 있는 지팡이 짚은 인형 그리고 거울을 보는 인형들은 각각 탐욕, 욕심, 증오로 찌든 인간을 의미한다. 인형들이 고개를 흔드는 것은 죽음의 순간에 급해진 인간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한다. 해골이 종줄을 당기는 순간 시계판 위에 있는 두 개의 창문이 열리고, 12사도가 지나가며 죽음을 맞는 인간들을 지켜본다. 12사도가 모두 지나가면 황금수탉이 운다. 이는 새벽이 오고 삶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천문시계의 쇼도 유명하지만, 그보다도 두 개의 시계판이 더 놀랍다. 아래의 시계판은 가운데 작은 원에 프라하의 도시마크인 세 개의 탑이 들어 있다. 그 주위로 배열된 열 두 개의 작은 원은 황도 12궁이고 다시 그 주위로 배치된 열 두 개의 큰 원에 그려진 그림은 절기를 나타낸다. 그림판은 1년에 한 바퀴를 도는데, 12시 방향에 고정된 황금바늘에 걸리는 그림이 그때의 별자리이며 절기에 해당된다. 위쪽에 있는 시계판은 복잡하고 어렵다. 이 시계판은 천동설과 지동설의 원리를 적용하여 해와 달의 움직임을 나타냈는데, 년-월-일-시-분을 나타냈을 뿐 아니라 동지와 하지는 물론 밤낮의 길이까지 알 수 있다. 천문학을 공부하고 라틴어와 기호를 알아야 시계를 볼 수 있었다고 하니 왕과 귀족을 비롯한 지식인계층을 위한 시계였다. 당연히 아래쪽 시계는 일반대중을 위한 시계였다.

이 천문시계는 1410년 카단의 시계공 미쿨라스와 카를 대학의 천문학 교수였던 얀 신델이 시계장치와 글자판을 만들었고, 1490년 이를 수리한 하누쉬가 아래쪽 시계판을 설치했다. 일설에 따르면 오를로이가 1490년 시계공 하누쉬(Hanuš)라고도 하는 얀 루체(Jan Růž)가 만들었는데, 너무 아름다워서 다른 나라에서도 주문이 쇄도했다는 것이다. 이를 알게 된 시의회가 사람을 보내 하누쉬의 눈을 인두로 지져 멀게 만들었다고 한다. 하누쉬가 시계탑으로 가서 시계를 만지고 나서 작동을 멈추었고, 100년이 지나도록 수리할 수가 없었다고 하는데, 이는 속설에 불과하다.(4)

천문시계 쇼를 마지막으로 프라하 구경을 끝내고 광장부근에 있는 한 식당에서 조개비빔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새콤하게 무친 조개가 들어간 비빔밥이 매콤해서인지 오랜 여행에서 오는 피곤함을 달래준다. 점심 먹고 바로 공항으로 떠났다. 오랜 전통의 보헤미아의 분위기를 전혀 느껴보지 못한 탓인지 프라하와 이렇게 작별을 해도 좋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비디메 세 즈노부(Uvidíme se znovu; 다시 보자) 프라하! 봐야 할 것이 남아있으면 언제든 또 갈 기회를 만들기 마련이다.

프라하에서는 인천까지 곧바로 간다. 환승이 없는 여행은 작은 행복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순탄했다. 공항 가는 길에 사과를 깍느라 꺼낸 스위스 칼을 부치는 짐에 넣지 못하는 실수가 있었다. 기내 휴대품에 넣었는데 검색에서 딱 걸렸다. 가방을 보여 달라는데 당연히 칼이 나왔다. 순간 "Oh apple"하고 놀란 표정과 함께 사과를 먹고 챙기는 것을 잊었다고 설명했다. 칼을 열어본 보안요원들은 이 정도는 문제가 안된다며 돌려준다. 상황종료. 이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비행기는 만석이다. 언제나처럼 우리 일행들은 뒤쪽 가까이에 자리를 잡았다. 여행사에서 단체로 구매한 탓일 게다. 정시보다 조금 늦게 출발해서 5분 늦은 6시35분에 비행기는 게이트를 물러났지만 비행이 순조로웠는지 정시보다 조금 일찍 인천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기위해서 공항청사를 나서는 데 흐린 하늘에 더운 느낌이 훅 끼쳐온다. 이날 아침기온이 21도, 낮 최고기온이 29도란다. 여름이 다시 오는 모양이다.

참고자료:

(1) 다음백과. 프르세미슬가(House of Přemysl)

(2) 위키백과. 후스전쟁.

(3) Wikipedia. Prague Castle.

(4) Wikipedia. Prague astronomical cl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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