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동유럽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에 이어 다시 동유럽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체스키크룸로프의 구시가지 광장에 있는 흑사병박멸기념탑(좌), 작은 골목에서 만남 물레방아와 이를 지켜보는 소년상(우)

흡족하지는 않지만, 배가 부르고 나니 여유가 생긴다. 꾸물거리는 날씨가 가끔 빗방울을 떨구기도 했지만, 구시가지 구경에 나섰다. 구시가지 한 가운데 작은 광장이 있고, 광장 한 편으로 흑사병 박멸 기념석주가 서있다. 유럽의 많은 도시가 세웠던 성삼위일체탑과는 다른 방식이다. 이 석주는 프라하의 조각가 마티아스 바츨라프 야켈(Matěj Václav Jäckel)이 1714-1716년 사이에 제작한 바로크 양식의 작품이다. 맨 위에 성모상을 세우고 그 아래로 8명의 성인들을 두 단에 나누어 배치했다. 위에는 성 바츨라프(St. Wenceslas), 성 비투스(St. Vitus), 성 요한(St. John) 복음 전도자, 성 유다 타두데스(St. Judas Thaddeus)의 동상을 세웠고, 아래에는 성 프란시스 자비에르( St. Francis Xavier), 성 세바스티안(St. Sebastian), 성 게타노(St. Gaetano) 및 성 로커스(St. Rochus) 동상을 세웠다.(1) 흑사병 박멸기념석주 옆에 있는 분수대는 1843년에 세워진 것으로 폐허가 된 르네상스시대의 분수대를 대신한 것이다.(2)

체스키크룸로프의 구시가, 뒤편으로 있는 검은지붕에 종탑이 있는 성비투스 성당(좌), 성비투수 성당의 내부.(우-Wikipedia에서 인용함)

분수대 왼쪽으로 언덕을 조금 올라가면 성비투스 성당이 있다. 체스키크룸로프의 교구는 1317년 이전에 로젠버그가문의 페터1세가 설립했다. 1329년 무렵 마을 규모에 맞게 세운 작은 교회가 성 비투스 교회의 시작이었다. 마을이 점점 커지면서 교회를 증축할 필요가 있었다. 로젠버그가의 하인리히 3세의 결정으로 1407년 건축가 얀 스타네크(Jan Staněk)의 감독으로 새로운 교회를 짓게 되었다. 교회는 동서로 44m 폭은 20m, 벽에 세운 열주의 높이는 20m이다. 재정에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교회는 1439년에서야 완공되었다. 이후에 특별한 추가공사는 없었지만 1894년 양파모양의 바로크탑을 여덟 개의 면을 가진 모조고딕양식의 탑으로 교체하였다. 교회의 내부는 네오고딕 양식으로 장식되었다. 주제단에는 1673년에서 1683년 무렵 그려진 성모와 비투스 성인의 유화로 장식했는데, 그 당시 이 지역에 들어온 제주이트 교단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3)

광장으로 들어오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작은 규모의 공방이나 식당들이 있다. 돌아다니다 보니 에곤 실레 박물관이 있다. 피카소, 달리, 클림트 등과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미술가의 하나인 실레가 이 작은 마을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진즉 알았더라면 구경할 수 있었을 것인데, 엉뚱한 곳을 구경하느라 시간을 많이 쓰는 바람에 모이기로 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비엔나의 벨베데레 궁전에서 그의 작품을 감상한 바가 있지만, 이곳에 그를 기념하는 박물관이 있는 이유는 체스키크룸로프가 실레의 어머니 마리 소우코포바(Marie Soukupová)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클림트의 모델이자 연인이기도 했던 발리(Wally)라는 애칭으로 부르던, 발브르가 노이질(Walburga Neuzil)과 실레가 이곳에서 동거를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10대 소녀들을 모델로 세우는 등 그의 작품 활동은 마을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와 쫓겨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실레는 1918년 28살의 나이에 당시 유행하던 스페인독감에 걸려 요절하고 말았다. 비록 짧은 삶이었지만, 그는 250점의 유화와 2,000여점의 드로잉을 남겼다.(4) 클림트는 실레에게 영향을 준 중요한 인물이다. 실레가 클림트를 만난 것은 17살 때였다. 클림트는 젊은 실레에게 특별히 관심을 쏟았다고 한다. 그림을 사주기도 하고, 자신의 그림과 교환하기도 하였을 뿐 아니라, 후원을 해줄만한 사람도 소개했다. 실레의 연인 발리 역시 클림트가 소개한 것이었다.

체스키크룸로프의 구시가지는 중세풍의 집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어디선가 칼을 찬 기사가 툭 튀어나올 듯했다. 골목을 걷다보면 이내 블타바강-강이라고 해도 폭이 얼마 되지 않는 개울 정도-에 이른다. 어느 골목에선가는 개구쟁이 소년이 앉아있는 물레방아가 서 있는 집도 만났다. 아마 방앗간이었나 보다. 작은 기념품 가게에서는 도자기로 된 작은 공주를 샀다. 이것을 보면 이 마을이 생각날 것이다.

프라하로 가는 휴게소에서 무지개를 만났다. 이때만 해도 프라하의 멋진 저녁 일정을 기대하고 있었다.

3시반에 일행들이 모여 프라하로 떠났다. 프라하까지는 세시간반 정도 걸린다. 프라하로 가는 동안에도 비가 쏟아지다가 해가 나는 등 날씨는 변덕이 팥죽 끓듯 했다. 하지만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에는 비가 쏟아져도 기사의 몫이지 우리가 불편할 것은 없다. 유럽 대형버스기사를 위한 LCD규정 때문에 휴게소에서 한 번 쉬었다. 휴게소에 들어가는 순간 무지개가 뜬다. 정말 변화무쌍한 날씨다. 그때만 해도 프라하에서의 멋진 저녁 일정을 약속하는 무지개일 것으로 믿었다.

7시경 프라하에 도착했다. 식당으로 가기 위하여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만 해도 하늘에서 구름이 벗겨지고 있는 상황이라서 구글의 날씨예보는 역시 다르구나하고 생각했다. 점심 무렵 예고된 프라하의 날씨는 맑음이었기 때문이다. 저녁메뉴는 굴라쉬에 감자를 곁들인 돼지갈비찜이었고, 아이스크림이 후식으로 나왔다. 그런대로 먹을 만 했는데 돼지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내는 감자를 곁들인 굴라쉬로 끝이었다. 저녁식사를 먹고 프라하의 야경을 보러 나섰다. 그런데 식당문을 나서면서 부슬거리던 비가 점점 굵어진다. 7시 이후에 갠다던 구글 날씨도 별 수 없는 모양이다. 빗속을 뚫고 일행이 향한 곳은 정각에 12사도가 행진을 벌인다는 천문시계 앞이다. 우리는 8시10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어두운데다가 비까지 내리는 바람에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다음 날 낮에 다시 보기로 하고 카를교로 향했다.

프라하를 찾는 사람들이 빠트리지 않고 찾는 카를교는 체코어로는 카를루프 모스트(Karlův most)라고 부른다. 카를교는 1357년 카를4세의 지원으로 건설을 시작하여 15세기 초에 완공되었다. 1172년에 완공된 유디트다리(old Judith Bridge)가 1342년의 홍수로 심각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돌다리(Kamenný most) 혹은 프라하 다리(Pražký most)라고 불렀던 것을 1870년부터 카를교로 부르게 되었다. 카를교는 1841년까지 프라하성과 구시가지를 잇는 유일한 다리였다.

카를교는 길이 621m에 폭이 10m로 게겐스브루크(Regensburg)에 있는 돌다리처럼 16개의 아치로 이루어졌다. 다리의 양쪽 난간에는 모두 15개의 동상 혹은 석상이 서 있다. 대부분 바로크양식으로 된 동상들은 1683년부터 1714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당대에 숭배되던 성인 혹은 수호성인들이다. 마티아스 브라운(Matthias Braun), 얀 브로코프(Jan Brokoff), 미카엘 요세프(Michael Joseph) 그리고 페르디난드 막시밀리안(Ferdinand Maxmilian) 등 당대에 뛰어난 보헤미아의 조각가들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그 가운데 성 십자가와 갈보리(the Holy Crucifix and Calvary), 성 루드가르드(St. Luthgard), 얀 네포무츠키 등이 유명하다. 1965년부터는 모든 조각상이 복제품으로 교체되어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5)

카를교, 비오는 저녁이라서인지 비교적 한산하다(좌), 성 십자가와 갈보리(우)

역시 조명이 충분하지 못해 다리 난간에 늘어 서있는 성인들의 모습을 알아보기도 힘들다. 그래도 한산한 덕분에 차근차근 살펴볼 수는 있었다. 비가 오락가락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나오지 않은 듯하다. 어둠 속에서도 머리에 별 다섯을 두른 얀 네포무츠키 성인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성인이 데리고 있는 개를 쓰다듬으면서 소원을 빌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흐르는 블타바 강물 위로 강변에 늘어선 건물들에서 쏟아내는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에 등장하는 블타바의 선율이 강물을 희롱하는 듯하다.

얀 제포무츠키 성인(좌), 블타바 강물 위로 프라하성의 떠있다.(우)

여행작가 이나미는 ‘강물이 흐른다. 이 도시가 지닌 오래된 시간을 기억하며 그 강가에 펼쳐졌던 아름다운 숲과 초원과 강을 굽어보던 언덕을 추억하며 강물을 흐른다.(6)’라고 블타바강의 풍경을 그렸다. 하지만 그런 여유를 부리기에는 너무 어두웠다. 다리 양편으로 늘어서 있는 조각상들까지 합세해서 등덜미를 서늘하게 만든다. 그때는 공연한 느낌이려니 했던 것인데 어디선가 갑자기 푸르스름한 빛을 두른 거대한 여자가 나타날 것만 같다. 프랑스 작가 실비 제르맹이 프라하에서 만났던 여인은 프라하의 돌 틈에서 태어난 도시의 기억, 특히 어두운 쪽의 기억이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기억, 역사가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 고통을 잊어버린 남자, 여자들의 기억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라하의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여자는 여러 광년 떨어진 하늘 저 가장자리에서 반짝이고 그녀의 오른쪽 어깨 높이쯤에서 떨고 있는 하늘과 물속의 이중의 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7)”라는 대목이 딱 그날 밤 카를교에서 느꼈던 그 미묘한 느낌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설명하는 듯하다.

실비 제르맹은 “프라하에서 안개는 무슨 냄새가 나고 심지어는 물질적 질감까지 느껴진다. 어떤 저녁이면 안개는 거의 손에 만져질 정도로 단단하고 주황색 물이 들어 있다. 도시에 피어오르는 연기로 안개가 부풀어 오르고 물이 든다.(8)”라고 적었다.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나치가 체코를 점령했을 당시에 학살당한 유대인들의 슬픈 사연들이 프라하의 거리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고 비유한다. 그녀가 말하는 미묘한 존재는 프라하의 유대인 사회에서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골렘의 전설에 기반한다. 다음백과사전에 따르면 성서(시편 139:16, 형상)와 <탈무드>에서는 태아 상태거나 완성되지 못한 물체를 가리켜 골렘이라고 했다. 골렘이 박해받는 유대인들의 보호자로 인식된 것은 프라하의 랍비인 유다 뢰브 벤 베주렐이 만든 골렘의 전설 때문이다. 랍비 뢰브는 진흙을 빚어 골렘을 만들었다. 게토지역에 해를 끼치려는 시도를 미연에 방지하는 역할을 부여하여 유대인들을 수호하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묘한 느낌에 쫓기듯 카를교를 떠나 버스를 타기로 약속한 장소까지 블타바강변을 꽤나 오래 걸어가야 했다. 금세 골렘이 튀어나올 것 같은 으스스한 분위기를 떨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프라하의 야경이 참 좋다는데, 단체여행이라는 한계와 우중충한 날씨 탓에 제대로 구경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밤늦게까지 걸어 피곤했던 탓인지 골렘이 꿈속에 나타날 여지도 없이 골아 떨어졌던 모양이다.

참고자료:

(1) Ceskykrumlov.com. Plague column.

(2) Český Krumlov. Unesco World Heritage. Fountain on the Square in Český Krumlov.

(3) ČeskýKrumlov. Unesco World Heritage. St. Vitus Church in Český Krumlov.

(4) Český Krumlov. Unesco World Heritage. Egon Schiele.

(5) Wikipedia. Charles Bridge.

(6) 이나미 지음. 프라하에서 길을 묻다 237쪽, 안그라픽스 펴냄, 2005년

(7) 실비 제르맹 지음.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85쪽, 문학동네 펴냄, 2006년

(8) 실비 제르맹 지음,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25쪽, 문학동네, 2006년

저작권자 © 청년의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