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동유럽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에 이어 다시 동유럽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그라벤거리에 있는 성삼위일체탑

베드로교회를 돌아 그라벤거리로 나와서 성삼위일체탑을 만났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마차시성당 앞에서도 성삼위일체탑을 볼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흑사병이 유행하던 당시 유럽에서는 예방이나 치료에 대한 기본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무서운 병이었을 것이다. 그저 ‘우리 마을은 피해 가주십사’하고 빌어야 하는 것은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비엔나의 성삼위일체탑은 1683년 마티아스 라우크밀러(Matthias Rauchmiller)가 맡아 건립을 시작했지만, 3년 후 그가 죽으면서 여러 사람이 참여한 끝에 로도비코 부르나키니(Lodovico Burnacini.)가 마무리를 하였다. 코린트양식의 기둥에는 성삼위일체 조각을 맨 위에 두고 그 아래로 9명의 천사를 새겼다. 세월이 흐르면서 바로크 양식이 가미되었고, 1693년 완공을 보았다.(1) 맨 아래 기단에는 레오폴드황제가 무릎을 꿇은 모습을 조각했는데 지상 권력의 정점에 있는 황제도 흑사병만큼은 어쩔 수 없어 신의 가호만을 빌어야 할 정도로 무서웠던 모양이다.

거리를 구경하느라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했지, 카페에 들어가 비엔나커피를 마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스탄불을 여행할 때 얻은 자유 시간에 터키 커피를 마시러 갔다가 모이는 시간에 맞추지 못해서 난처했던 경험이 무의식에 녹아있었던 모양이다. 어떻든 슈테판 대성당 앞에서 모이기로 한 시간에 맞추어 갔다. 모두 제시간에 맞추어 온 것은 아니라서 조금 기다려야 했다. 일행이 모인 다음 버스를 타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이날 저녁 메뉴는 중식이었는데, 한국에서 온 여행객이 많은 듯 김치찌개, 돼지고기볶음, 마파두부를 곁들인 쌀밥을 내놓았다. 저녁 식사 후에는 선택관광상품인 음악회에 가는 사람들은 공연장에서 내렸고, 나머지 일행은 숙소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전체 일행 가운데 남은 사람은 자매들과 혼자서 온 두 여성 등 젊은이들과 우리 부부까지 6명에 불과해서 놀랐다. 6명이 넘지 않으면 선택 관광이 취소된다고 했기 때문인지 젊은이들이 조금은 의외라는 눈치와 함께 감사하는 듯했다. 음악의 본고장 비엔나에서 라이브로 연주를 즐길 수 있는 것도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선택한 일정이다.

비엔나에서 즐긴 음악회가 열린 작은 공연장(좌) 막간에 로비에서 음료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다(우)

현지가이드를 따라 건물로 들어가 레드 카펫이 깔려있는 계단을 올라 2층에 있는 공연장으로 올라갔다. 2층 로비에는 간단한 음료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칵테일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막간에 이용할 수 있었다. 현지가이드가 음료까지 미리 예약해두었던 모양이다. 공연장은 기대와는 달리 그리 크지 않아 아담하였는데, 실내장식은 현대적 분위기였다. 무대 오른쪽은 악단이 자리하고 왼쪽은 성악가와 무용수의 몫이었다. 피아노와 4개의 바이올린 각각 하나의 첼로와 콘트라베이스, 역시 각각 하나의 플루트와 클라리넷 그리고 타악기로 구성된 10인조 실내악단에 테너와 소프라노가 각각 한명씩 그리고 한 쌍의 발레리노와 발레리나가 출연하였다.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된 공연은 1부는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채워졌고, 2부는 스트라우스의 작품을 중심으로 베토벤과 하이든의 작품이 하나씩 곁들여졌다. 모든 연주곡들이 우리에게 익숙한 소품들인데다가 절로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흥을 돋우는 곡으로 구성되었다. 아마 대부분의 청중들이 여행자들이기 때문이리라. 연주자들 역시 자신들이 연주하는 음악에 흠뻑 빠져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특히 원곡을 재해석해서 흥을 더 하게 만들고, 연주자들의 음악적 기교를 부각시킨 것도 흥미로웠다. 성악가들도 인상적이었는데 작은 실내라서 반주에 목소리 묻힐 수도 있음에도 두 성악가들은 반주를 압도하고 있었다. 아마도 반주가 두 성악가들의 노래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섬세하게 조율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특히 소프라노의 고음은 소름 돋게 만들었다. 남녀 솔로의 경우 연주와 어울리기 때문에 서로 상보적일 수 있겠다 싶었는데, 두 명의 무용수가 보여주는 현대무용은 시선을 끌어가기 때문인지 연주와 상보적이지 못한 느낌이다.

비엔나 음악회의 프로그램

모차르트의 ‘휘가로의 결’혼으로 시작한 1부는 ‘터키행진곡’으로 마무리되었다. 잠시 로비로 나가 음료를 마시면서 같이 간 일행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쉬다가 2부 연주를 들었다. 2부는 베토벤의 ‘로망스’로 시작하여 요한 스트라우스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마무리되었다. 신년음악회는 아니지만 지휘자의 요청에 따라서 박수로 박자를 맞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쑥스러운 듯했지만 이내 익숙해져서 달아오르는 분위기에 휩쓸리게 되었다.

몇 차례의 앵콜 끝에 연주가 마무리되고 보니 벌써 10시가 넘어간다. 연주회의 분위기로 달아오른 기분을 품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더니 현지가이드가 기다리고 있다가 미리 예약해둔 밴에 태워준다. 숙소로 가는 길은 또 하나의 해프닝이었다. 우리가 묵기로 했다는 숙소에 도착했다는 기사의 말에 따라 내리고 보니 프런트가 보이지 않는다. 캡슐형 호텔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의 원래 숙소와 이름이 비슷하다. 어떻든 분위기가 이상해서 영어가 통하지 않는 듯한 밴기사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적정하지 말라는 몸짓을 한다. 마침 카카오 톡이 열리는 덕에 인솔자와 연락을 할 수 있었다. 다시 밴을 타고 진짜 숙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런 해프닝을 겪으면서 파울로 코엘류의 산문 <흐르는 강물처럼>에 나오는 “누군가와 무언가를 나누고 싶다는 단순한 소망은 우리를 말이 존재하지 않는 언어의 세계로 데려간다. 그곳에서는 명징하고 오해를 할 염려는 조금도 없다.”(2)는 대목이 참 안성맞춤하다는 생각을 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절박할 수도 있는 우리 사정이 밴기사에게 충분히 전달되었던 것이 신기하다. 우리를 내려놓고 휭하니 가버렸더라면 상황이 어려워질 뻔했다.

숙소에 도착하기까지 30여분을 더 가야 했는데, 숙소가 시외에 있었던 모양이다. 오가는 차량도 없이 캄캄한 밤길을 얼마쯤 달리면서 슬그머니 걱정이 들기 시작한다. 기사가 숙소를 찾는데 동참해주었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상황이 이쯤 되니 일행 가운데 유일한 남성으로서 어깨가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든 숙소를 찾아가는 길이 얼마나 어둡고 스산하던지 그레엄 그린의 소설 <제3의 사나이>가 떠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분할 통치하던 시절의 비엔나가 무대였는데 이야기의 끝에 가서는 친구가 숨어있다는 소련관할 구역을 찾아가는 대목이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당시와는 상황이 많이 다를 터이나 사방에 눈을 줄만한 것이 없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사실 소설 <제3의 사나이>는 비엔나 가는 길에 처음 읽었고, 오래 전에 명화극장에서 본 영화 <제3의 사나이>의 마지막 장면만 또렷하기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캐롤 리드감독의 1949년작 <제3의 사나이>에서 오손 웰스가 연기한 해리 라임의 장례식이 있던 날 잎을 모두 떨군 가로수가 앙상하게 서있는 길을 걸어온 애나가 기다리는 홀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장면이 여전히 기억에 진하게 남아있다.

영화 <제3의 사나이> 마지막 장면. 묘지에서 나오는 길을 걸어오는 애나를 기다리는 홀리(좌)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치는 애나(우)

숙소에 도착하니 로비에서 일행 몇과 맥주를 마시며 기다리던 인솔자가 반갑게 맞아준다. 숙소에 들어 정리하고 나니 11시다. 내일은 7시반에 숙소를 나서야 하는 빠듯한 일정이다. 공연히 마음이 급했던지 짐을 풀기 위해서 가방을 탁자에 올리다가 허리가 삐긋하더니 통증이 느껴진다. 남은 일정을 망치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늦게 잠자리에 든 탓인지 곤하게 잤다. 동유럽에서 맞은 다섯 번째 아침이다. 약속한 시간에 일행이 모두 모여 출발했다. 멜크수도원(Melk abbey)이 있는 멜크는 비엔나에서 동쪽으로 80km 떨어진 곳에 있다. 린츠와 비엔나의 꼭 중간쯤에 위치한다. 지금은 인구 5,300여명의 작은 마을이지만, 합스부르크왕가가 오스트리아를 지배하기 전인 976년부터 1106년까지 오스트리아를 지배했던 바벤베르크(Babenberg)왕조의 수도였다. 멜크는 바이다그라벤(Waidagraben)에 있는 멜크샘에서 시작한 멜크강이 바하우(Wachau)골짜기에 위치한다. 서쪽으로는 린츠, 잘츠부르크를 거쳐 뮌헨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비엔나를 거쳐 프라하까지 이르는 동서교통의 연결로에 있다.

멜크 수도원(Melk Abbey)는 멜크 마을 뒤 도나우강을 굽어보는 바위산 위에 세워진 베네딕트 수도원이다. 멜크 수도원이 문을 연 시기는 분명치 않다.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자료에서는 1106년 레오폴드2세가 궁궐을 베네딕트수도원에 제공하였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그 시기의 바벤베르크 군주는 레오폴드3세였다. 바벨베르크 왕조가 수도를 비엔나로 정한 것은 1155년이라고 하니, 그 사이에는 멜크나 비엔나가 아닌 제3의 장소가 수도였던가보다. 위키피디아에는 레오폴드2세가 람바흐(Lambach) 수도원에서 베네딕스 수도사에게 그의 성 가운데 하나를 제공하면서 수도원이 건립되었고, 멜크에 수도원학교가 설립된 것은 12세기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떻든 궁전을 기증받은 베네딕트 수도원은 수도사를 위한 교육시설로 사용하다가 18세기부터는 순수한 수도원으로 운영해왔다. 오랫동안 수도사를 위한 교육을 해오다보니 고문헌과 고서적을 많이 소장하게된 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멜크 수도원을 찾게 만들었다.(3)

멜크 수도원에서 만난 현지 가이드가 수도원의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좌), 주차장에서 바라본 멜크수도원. 왼쪽 아래쪽에 정문이 있다.(우)

1시간반 가까이 달려 우리가 입장하기로 한 시간 전에 멜크 수도원에 도착했다. 하지만 우리 앞에 도착한 크루즈 승객들과 함께 구경하게 되면서 조금은 쫓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도원에 입장하기에 앞서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현지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멜크 수도원의 규모가 만만치 않은데, 1~17번방까지만 일반에 공개하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그리 넓지 않은 산책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흰색을 칠한 작은 아치형 문이 나온다. 문 위에 걸린 겹쳐놓은 두 개의 열쇠는 화합을 상징한다. 문에 들어서면 예쁘게 다듬어진 작은 정원이 있다. 정원을 지나다 보면 오른쪽 산비탈에로 펼쳐지는 널따란 정원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있지만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다. 수도원의 정문은 마치 개선문처럼 화려하다. 특히 양쪽으로 수도원의 수호성인 성 레오폴드와 성 콜로만의 석상이 서 있다.

멜크 수도원의 주출입구. 양쪽으로 성 레오폴드와 성 콜로만의 석상이 서 있다.(좌), 멜크수도원의 중정. 건물 뒤로 보이는 첨탑이 있는 건물은 교회다.

수도원의 출입문부터 파스텔톤의 주황색과 엷은 회색으로 채색되어 밝은 느낌을 준다. 출입문을 지나면 휑하니 넓은 바깥마당을 둔 건물이 나타나고, 그 건물의 가운데로 나있는 출입문을 지나면 ㅁ자형으로 된 수도원 건물이 분수대가 있는 중정을 두고 서 있다. 건물 뒤로 보이는 돔을 얹은 건물은 교회건물이다. 왼쪽건물의 2층에는 화랑과 11개의 전시실로 된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으로 오르는 계단을 ‘황제의 계단(Imperial Staircase)’이라고 부른다. 아치형의 회랑에는 붉은 양탄자가 깔려있고 아름다운 장식으로 꾸며져 있어 궁전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참고자료:

(1) Wikipedia. Pestsäule, Vienna.

(2) 파울로 코엘류 지음. 흐르는 강물처럼 103쪽, 문학동네, 2008년

(3) Wikipedia. Melk Abb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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