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동유럽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에 이어 다시 동유럽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헝가리의 역사를 조금 더 이어가보자. 헝가리는 9세기 무렵 우랄산맥과 볼가강 사이에 살던 마자르족이 이주해 와서 세운 나라다. 이들에 앞서 아시아의 기마민족인 훈족이 이 지역을 지배하였는데, 374년에는 발라미르가, 400년에는 울딘이 내습해 와서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이들의 내습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초래하여 유럽역사를 바꾸게 된다. 한편 434년 아틸라가 훈족의 왕으로 등극하여 카스피해로부터 라인강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다. 하지만 453년 게르만제후의 딸 일디코와 결혼한 아틸라는 첫날밤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훈족의 세력은 급격하게 약화되어 카스피해와 흑해 유역으로 물러났고 이 땅에는 일부만 남았다. 9세기 무렵 마자르족이 카르파티아분지에 진출하면서 유럽사람들은 마자르족이 훈족의 후예로 생각하고, 이들의 나라를 ‘훈족의 영토’라는 의미로 헝가리라고 하였다.(1) 위키백과는 훈족과 헝가리의 마자르족이 같은 혈통이라는 주장이 근거 없는 것이라고 한다.

헝가리 사람들에게 전해오는 경이로운 ‘수사슴의 전설(Rege a Csodaszarvasról)’에 따르면 훈족의 시조 후노르(Hunor)와 마자르족의 시조 마고르(Magor)는 쌍둥이 형제라고 믿고 있다. 케자(Kéza)의 시몬에 따르면 후노르와 마고르는 거인 메노트(Ménrót)와 왕비 에네트(Eneth) 사이에서 난 쌍둥이다. 메노트는 대홍수의 주인공 노아의 후손인 니므롯(Nmrod)와 동일인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도 헝가리왕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이후에 만들어진 전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대홍수 이후에 노아의 후손들은 북쪽의 높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두 개의 커다란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대평원에서 살게 되었고, 이 나라는 니므롯(Nimrod)이 다스렸다. 니므롯은 많은 건축물을 세웠는데, 그 가운데는 바빌론시를 굽어볼 수 있는 거대한 피라미드도 있었다. 사원이자, 대홍수가 나면 피신처로 사용될 이 피라미드를 바벨탑이라고 했다. 위대한 전사이기도 한 니므롯은 훗날 페르시아라고 부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의 첫 번째 아내 에네트(Eneth)는 쌍둥이 사내아이들을 낳았다.

후노르와 마고르라는 이름의 두 아들이 장성한 어느 날, 니므롯은 사냥대회를 열었다. 아버지와 따로 사냥을 하던 두 아들 앞에 경이롭게 생긴 흰 수사슴이 나타났다.(어떤 이야기에서는 뒷다리에 뿔이 나있었다고 한다) 서쪽으로 향하는 흰 수사슴을 쫓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고, 형제는 천막을 치고 야영을 했다. 다음날 아침 다시 나타난 흰 수사슴을 뒤쫓기를 거듭하다 보니 형제는 어느새 국경을 넘어 아조브(Azov)해로 믿어지는 메오티스(Meotis)의 위험한 소택지에 이르게 되었다. 주위를 둘러본 그들은 아주 아름답고 기름진 땅에 와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흰 수사슴은 호수로 뛰어들어 사라지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두 아들은 5년 동안 사원에 머물면서 제왕수업을 받았다. 공부를 마친 6년째 두 사람을 길을 떠났다. 두 사람이 앨런(Alan) 땅에 이르렀을 때, 두라왕의 두 공주가 춤추는 모습에 반하여 그녀들을 납치하여 각각 결혼을 했다는 것이 흰수사슴의 전설이다.(2)

다시 영웅광장으로 돌아가면, 사실 광장이라는 열린 공간에서는 사람 빼놓고는 볼거리가 그리 많지 않다. 그 사람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이 현재를 이루고 과거로 흘러가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영웅광장에 모여 있는 헝가리 사람들의 표정이 밝고 행복해 보이기 때문에 헝가리의 미래는 과거와는 분명 달라질 것 같다는 예감을 한다.

영웅광장에 있는 두 개의 열주탑 뒤로 가면 다리 건너에 시민공원이 있다. 헝가리어로는 도시공원을 의미하는 버로슬리게트(Városliget)이다. 면적이 1.2㎢에 달하는 직사각형의 공원은 13세기 무렵부터 오쾨르둘로(Ökör-dűlő)라고 불렀는데, 황소목초지라는 의미이다. 바치야니가문이 소유하고 조림을 시작하면서 1800년경에는 바치야니숲(Batthyány Forest)으로 바뀌었다. 19세기 초에 공공공원이 되면서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세계 최초의 공공 공원 가운데 하나이다. 숲에는 여러 갈래의 산책길이 나있고, 나무 등걸에는 이끼가 자연스럽게 나있는 등 도심 속에서 여유를 찾을 수 있는 공간이다. 숲에서 조지 워싱턴이나 윈스턴 처칠 등의 동상도 서 있는데, 냉전시대에 세워진 것이라서 흥미롭다.

부다페스트 시민공원에 서 있는 이도케레크(좌)과 1956년 기념탑(우) (Butapest. A view on the cities에서 인용함)

시민공원의 남쪽 끝에는 시계바퀴라는 의미의 이도케레크(Időkerék)라는 이름의 커다란 조형물이 서 있다. 1993년에 치운 레닌의 동상이 서 있던 곳에 세워진 이 조형물은 헝가리의 EU가입을 축하하기 위한 것으로 2004년 4월 30일 개막되었다. 야노스 허너(János Herner)의 기획으로 이슈트반 야나키(István Janáky)가 설계한 것인데 일종의 모래시계이다. 모래가 작은 구멍을 통하여 윗 칸에서 아래 칸으로 흘러내리고, 한해의 마지막 날에는 수동으로 바퀴를 180도 돌려놓는다.

서쪽으로 조금 더 가면 ‘1956년 기념탑’이 있다. ‘봉기 기념탑’이라고도 하는 이 탑은 소비에트의 강점에 대하여 1956년에 일어난 헝가리의거 5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2006년에 세웠다. 쐐기 모양의 기념탑은 녹슨 철강빔을 56도 각도가 되도록 점점 높이 차례로 세워가다가 정점에 가까워지면서 점점 광택이 나는 것으로 바뀐다. 좌우 대칭인 기념탑은 헝가리사람들의 결집된 힘이 결국은 공산주의자의 지배를 끊어냈다는 것을 상징한다. 철강빔이 이어지는 모습을 빗대어 ‘쇠빗’이라는 의미의 바스케프(Vaskefe)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3)

시민공원의 호숫가에 서있는 버이더후녀드성 (Wikipedia에서 인용함)

현대미술관 뒤쪽으로는 작은 동물원이 있고, 영웅광장을 빠져나가면 커다란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고, 다리에서 바라보면 오른쪽 호수의 끝에 버이더후녀드성(Vajdahunyad vára)가 서있다. 아기자기한 성의 모습이 호수에 비쳐 아름답다. 겨울에 호수가 얼면 스케이트를 타는 시민들로 북적인다고 한다. 조금 더 가면 왼편으로 세체니 온천과 수영장이 있다. 왼쪽 숲으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면 숲속에 작은 공터가 나타난다. 그리고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선생의 흉상이 서 있다.

1906년 평양에서 태어난 안익태선생은 1921년 일본으로 유학하였는데, 1930년 졸업한 동경의 구니타치 고등음악학교에서 첼로를 전공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하여 1937년 템플대학교 음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36년 처음 유럽을 방문하였고, 1938년에는 아일랜드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의 객원지휘자를 지냈다. 그리고 1938년부터 1941년까지 헝가리정부의 장학금을 받으며, 부다페스트 리스트 페렌츠 음악예술대학을 다녔다. 이때 졸탄 코다이와 에르뇌 도흐나니 등에게서 작곡을 배웠다.(4) 이후 유럽무대에서 활동한 그가 친일행적을 보였다면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고, 나아가 애국가도 새로 제정해야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그의 대표작 <한국환상곡(Korea Fantasy)>는 1936년 베를린에서 작곡되었고, 1938년 2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안익태가 지휘하는 아일랜드 방송교향악단의 연주로 초연되었다. 이때는 3악장으로 구성되었고, 합창이 없는 관현악곡이었다. 나무위키에 정리된 악곡해설을 요약하면, 1악장은 고조선의 개국을 알리는 장엄한 관현악 선율로 시작하여 아름다운 강산과 순박한 우리 민족의 모습을 우리 민요가락을 섞어 연주된다. 2악장은 평화롭기만 하던 강산이 일제의 침략에 짓밟히는 모습과 이에 대한 애국지사의 저항과 죽음을 달랜다. 3악장은 광복의 기쁨을 노래하는데, 여기에 애국가가 다양하게 변주된다. 4악장은 6.25동란으로 전화에 싸인 조국의 모습이 안타깝지만, 밝은 미래로 향하면서 마무리된다.(5) 이런 4악장의 내용으로 보아 최종본의 악보는 1950년대 중반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54년판 <한국환상곡> 악보의 첫 번째 쪽에는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전 유럽에 걸쳐 이 곡이 연주된 장소가 기록되어 있다. 제목은 물론, 일제에 의해 고난을 당하는 한국과 한국민들의 애환을 그린 <한국환상곡>을 연주하는 일이 일제를 불편하게 만들 것임을 알면서도 중단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는 나라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1935년 안익태가 미국에 도착하였을 때, 재미동포들이 안치호의 애국가 가사를 스코틀랜드민요 <올드랭사인>의 곡에 맞추어 부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작곡했던 것이다. 안익태의 애국가는 1941년 임시정부에서 국가로 채택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북미대한인회 중앙위원회가 임시정부에 요청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1945년 8월 16일부터 국민들이 먼저 부르기 시작한 것을 1948년 제헌국회가 애국가를 국가로 채택한 것이니 풀뿌리에 기반을 둔 애국가는 더 이상 안익태선생 개인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친일 논란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주장이다.(6)

부다페스트 시민공원에 있는 안익태선생의 흉상

부다페스트 시민공원에 안익태선생의 흉상이 세워진 것은 2012년 5월 10일이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 재임시절인 2009년 안익태선생을 기리고, 그의 헝가리유학을 계기로 한국과 헝가리의 우호 친선을 위해 건립을 추진한 것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서울시가 제작비용 3만 달러를 대고 부다페스트 14구가 관리책임을 맡기로 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외로웠을 선생이 이제는 부다페스트를 찾는 한국 사람들이 꼭 찾아가는 명소가 되었으니 그나마 위로가 될 것 같다.

참고자료:

(1) 프리미엄 조선. 2015년 3월 15일자 기사. 김석동의 한민족 성장DNA 추적(24). 유럽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아시아 기마민족이 중부유럽에 세운 헝가리.

(2) Under the Influence! Myths, legends, folklore, and tales from around the world. Hungarian Mythology –The Legend of the Wondrous.

(3) Budapest. A view on the cities. City Park.

(4) 한계레신문. 2006년 11월 13일자 기사. “안익태 유학기록 첫 발견…‘헝가리 대가 코다이에 배웠다”

(5) 나무 위키. 한국환상곡.

(6) 정재용. 주간경향2017년 11월 7일자 기사. “안익태를 친일파로 몰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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