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동유럽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에 이어 다시 동유럽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부다왕궁에는 국립미술관, 루드비크 박물관, 부다페스트역사박물관, 국립 세체니 도서관 등이 들어있다. 7년전 이곳에 왔을 때는 화장실이 급해서 왕궁에 들어섰다가 미술관을 만나게 되었다. 헝가리미술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 미술관에 들어섰는데, 국회의사당, 어부의 요새, 마차시 성당 등을 종일 걸어다니면서 구경하다보니 너무 늦게 도착하여 6시면 문을 닫는 왕궁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다 돌아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미술관을 주마간산식으로라도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그때는 국립미술관 입장료가 900포린트였다.

입구에서 1층 전시실로 올라가는 계단에 걸려 있는 그림. 대관식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조명이 너무 어둡다.

국립미술관에 19세기 작품들이 주로 전시되고 있었는데 작품들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어둡고 무거웠다.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였을까? 20세기 초반의 작품들은 1차 세계대전의 영향 때문인 듯 전쟁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중세 작품들도 조금 볼 수 있었는데 선이 분명하고 색조가 선명한 성화들이었다. 황족들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 인물화도 상당수 볼 수 있었고, 나무를 깍은 부조 형식의 작품도 있었다. 유럽의 다른 미술관에서 보았던 그림들과는 전반적으로 화풍이 달랐던 탓인지 빠져들지 못했던 것 같다.

부다왕궁 국립미술관에서 열린 작은 연주회. 연주자나 청중 모두 진지하다.

미술관 로비에서 열린 작은 연주회를 만난 것은 생각지도 못한 횡재였다. 2층 전시실을 돌아보고 있는 동안 로비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50개 정도의 의자에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이 앉자 연주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음악을 들어가면서 작품을 감상하다가 결국은 계단참에 주저앉아 연주에 빠져들었다. 미술작품이 걸려있는 미술관에서 젊은 음악가들이 혼신을 다하여 연주하는 모습도 좋았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화음이 미술관의 커다란 공간에 울려 퍼져 연출하는 묘한 앙상블이 심장에 전해지는 듯했다. 미술작품을 둘러보느라 무거워진 다리를 쉴 겸해서 계단에 앉아서 플류트 - 첼로 - 바이올린을 거쳐서 피아노 독주로 마무리된 연주회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부다왕궁의 돔에서 굽어본 세체니 다리(좌), 해질 무렵 내려온 도나우강변에서 올려 본 부다 왕궁(우)

미술관에서 우연히 연주회를 만난 횡재에 이은 두 번째 생각지도 못한 횡재는 3층 중앙홀에서 우연히 문을 열어 발견한 남쪽계단을 통해서 첨탑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는 세체니다리의 전경이 한눈에 볼 수 있다. 그리고 멀리 겔레르트 언덕에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도 손에 잡힐 듯 볼 수 있는데 카메라가 시원치 않아 줌인해도 선명하게 담을 수는 없었다. 사진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2층 전시실에서는 눈에 띄는 작품을 몇 점 카메라에 담았는데, 3층 전시실에서는 미술관 직원이 사진촬영을 할 수 있는 입장권은 별도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확인시켜주는 바람에 촬영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2층에서 찍은 사진을 보자고 하지는 않았던 것도 횡재였다. 어떻든 연주에 빠져 정작 미술품 감상에는 시간이 많지 않아 쫓기듯 돌아보았지만, 결국 다른 박물관에는 입장도 못했다. 문을 닫은 역사박물관의 뒷문 근처에 있는 쪽문을 통해 내려가 도나우 강변으로 내려가 치타델라 요새로 행했다.

부다왕궁 서쪽 끝에 있는 마차시왕이 건설한 성채와 탑(좌) 궁전의 유구만 남아있는 곳도 있다(우)

부다왕궁은 부다성의 서쪽에 위치한다. 몽고군의 침공이 있은 뒤, 1265년 벨라4세가 도나우강변 성곽언덕 위에 처음 지은 왕궁은 지금은 위치도 분명치 않을 정도이다. 루이1세의 동생 스테판이 14세기에 지은 고딕양식의 궁전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고, 이슈트반대제가 지은 성채와 탑은 기초만 남아 있다. 1356년 라조스(Lajos)왕이 로마네스크양식의 성을 세웠고, 40년 뒤에는 룩셈브르크의 시기스문트(Sigismund)의 치세에 고딕 양식의 궁전으로 대체되었다. 다시 50년 후 마차시대제는 르네상스양식의 궁전을 새로 지었지만 오스만제국의 침공으로 다시 폐허가 되고 성채와 탑의 일부만 기초가 남았다.

왕궁 동쪽에 있는 마차시 분수(좌) 그 앞으로 펼쳐진 옛 궁궐은 유구만 남았다(우)

오스만제국이 물러가고 합스부르크가가 헝가리를 지배하던 1714-23년 사이에 바로크양식의 작은 궁전을 건설하였고,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가 이를 확장했다. 하지만 1810년과 1849년 합스부르크 지배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반란군의 공격으로 궁전의 많은 부분들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성립된 후에 미콜라스 이블(Miklós Ybl)의 설계로 부다왕궁의 재건이 추진되었는데, 헝가리에는 군주가 없었기 때문에 궁전의 재건은 상징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재건된 부다왕궁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다시 손상을 입었고, 1950년 이블에 설계에 따라 이슈트반 야나키(István Janáki)이 고전주의양식으로 재건하였다. 이 과정에서 15세기의 궁전 터가 발견되어 새 건축에 통합되었다.(1)

해질 무렵 내려온 도나우강변에서 올려 본 부다 왕궁

왕궁을 떠난 일행은 이슈트반 성당으로 갔다. 성 이슈트반 대성당(헝가리어 Szent István-bazilika)는 페스트 지역의 엥겔스 광장 부근에 있다. 헝가리왕국을 개창한 국왕이며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인 성 이슈트반 대제에게 헌정된 교회이다. 요제프 힐드(József Hildo)와 미클로시 이블(Miklós Ybl)의 공동설계로 1848년 착공하였으나, 이어진 헝가리 독립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851년 재개되었다. 건축이 한창 진행된 1868년에는 엄청난 폭풍이 불어 돔이 날아가는 사고가 생기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1905년에 완공되었다.

성 이슈트반 대성당(좌) 쥴러 벤츄르의 유화 ‘성모 마리아에게 왕관을 바치는 성 이슈트반(우)

성당이 있는 곳은 18세기까지 헤트씨어터(Hetz-Theatre)라는 이름의 극장으로 동물 싸움이 열리는 장소였다. 이 지역에 새로 구성된 교구의 신자 수백 명이 나서서 모금을 시작한 끝에 건립하게 된 대성당은 너비는 55m이고 길이는87.4m 크기로, 전형적인 신 고전양식을 취했다. 전체의 구조는 십자가 형상을 나타내고 중앙에는 돔을 올렸다. 건물 안에서의 높이가 86m이며 외부에서는 돔 위에 있는 십자가까지의 높이가 96m로 마자르족이 카르파티아평원에 자리 잡은 896년을 상징한다. 국회의사당과 함께 가장 높은 건물인데 부다페스트에서는 이 두 건물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다고 한다. 세속과 영속 간에 중요한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파사드에는 두 개의 종탑을 세웠는데, 남쪽의 탑에는 헝가리에서 가장 큰 직경 240cm에 무게가 9,250kg 나가는 성 이슈트반대제 종이 달려있다. 이전에는 8톤 규모의 종이 있었는데, 2차 세계대전 기간에 군사목적으로 사용되는 바람에 1990년에 새로이 주조하였다. 북쪽의 탑에는 5개의 종이 달려있고, 그 중에는 1863년 페렌크 발세르(Ferenc Walser)가 제작한 직경 178,5cm 무게 3,100kg인 교회에서 가장 오래된 ‘축복받은 성모 마리아의 종’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364개의 계단을 걸어 돔에 올라갈 수 있다. 돔에서는 부다페스트를 360도로 돌아볼 수 있다.(2)

1유로의 헌금을 내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엄숙한 분위기는 유럽의 여느 성당과 다를 것이 없었다. 유명 작품을 자랑하는 다른 성당과는 달리 소박한 멋이 있었다. 성당의 내부에는 당대의 저명한 헝가리 예술가인 모르 탄(Mór Than), 베르탈란 세케이(Bertalan Székely), 쥴러 벤추르(Gyula Benczúr) 등의 작품으로 가득하며 특히 성 이슈트반 왕이 헝가리 왕관을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장면을 그린 벤추르의 성화는 이교도였던 마자르족이 유럽의 일부가 되었음을 내외에 과시한 그림이라는 위키백과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금세 눈을 끌지 못했던 것 같다. 다만 카로이 로츠(Károly Lotz, 1833~1904)의 작품이라는 돔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일품이었다.

성 이슈트반의 성골함.(Wikipedia에서 인용함)

성 이슈트반 성당에 있는 성골함에는 성 이슈트반 대제의 미라화된 오른손이 봉안되어 있다. 매년 그의 기일인 8월 20일이 되면 거리를 따라 행진을 한다. 유체와 분리된 성 이슈트반의 오른손에 관한 의문도 있는 듯하다. 성 이슈트반의 유체는 석관에 넣어져 1038년 8월 15일 세케슈페헤르바르(Székesfehérvár)에 매장되었는데, 도굴 등을 우려한 나머지 뒤에 석관을 비워두고, 유체는 지하묘지에 다시 매장하였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기적을 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속설에 따라 그의 오른 손을 잘라냈던 것이다. 그런데 성당의 재보(財寶)로 보관되어야 할 유물을 관재인(管財人)이 훔쳐 지금의 루마니아의 비하(Bihar 혹은 Bihor)주에 있는 사저에 숨겼다. 라즐로왕이 통치하던 시절 성 이슈트반 대제의 오른손이 발견되었지만, 왕은 도둑을 용서하고 수도원을 지어 유체를 봉안하였다. 기적을 바라는 순례자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유체는 15세기 무렵 세케슈페헤르바르로 돌아왔지만,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던 1590년에는 라구사(지금의 두브로브니크)의 도미니크 수도회로 옮겨졌다. 합스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이를 구입하여 헝가리로 다시 옮겼던 것이다.

라즐로왕 시절 찾아낸 성이슈트반의 오른손에는 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고 요르(Győr) 주교 의 연대기(Hartvik)에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오른손에는 반지가 없다. 뿐만 아니라 루마니아의 시니옵(Siniob) 마을에 남은 성이슈트반의 공식 의상에는 손만이 아니라 팔뚝을 감싼 것처럼 팔꿈치에서 구부러져 있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성이슈트반의 유해조각들이 폴란드의 크라쿠프를 비롯하여 우크라이나의 수브카르파티아 지역의 교회 등 유럽 여러 곳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3)

참고자료:

(1) A view on cities. Budapest. Buda Casle.

(2) Wikipedia. St. Stephen's Basilica.

(3) HUNGARIAN SPECTRUM. The Holy Right Hand of St. Stephen, King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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