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동유럽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에 이어 다시 동유럽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동유럽에서 눈을 뜬 세 번째 아침이다. 눈을 떠보니 3시반이다. 시차도 이유일 수 있었겠지만 서늘한 느낌이 결정적이었다. 전날 밤 숙소에 들었을 때 침대 위에 놓인 두터운 이불을 보고 예감했던 대로이다. 샤워하면서 샴푸를 하느라 온수를 중단하면 이내 한기가 든다. 지대가 높아 계절이 이르게 찾아드는 탓 일게다. 이날 오전 내내 5시간을 달려 부다페스트까지 가야 한다는데 8시에 출발한단다. 1시간쯤 일찍 떠나도 정오에나 도착하는데, 일찍 가면 여유 있게 구경할 수 있거나 뭔가 하나라도 더 볼 수 있을 터인데 다른 이유가 있나보다.

부다페스트로 가기 위해 타트라산맥 아래 작은 도시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로 진입하면서 바라본 타트라산맥의 웅장한 모습

숙소를 출발한 버스는 곧바로 도시 외곽으로 빠져 헝가리로 통하는 고속도로에 진입한다. 오른편으로 테트라산맥을 끼고 남쪽으로 나아간다. 테트라산맥은 2,500m급 준봉들이 늘어선 험준한 지형으로 정상부근에는 나무가 없는 듯 석회암바위가 삐죽삐죽 서있다. 산록으로 초지가 널따랗게 펼쳐지고 간간히 집이 흩어져 있는 창밖 풍경이 평화롭다. 하지만 한 시간쯤 지나면서 창밖 풍경이 일신하여 도로 좌우로 늘어선 높다란 산이 이어지고 그 사이 협곡을 버스가 달리고 있다. 타트라산맥으로 들어섰나 보다. 우리는 타트라산맥을 넘어간다. 도로가의 가로수로 사과나무를 심었나 보다. 탐스럽게 익어가는 사과의 크기가 작은 것을 보면 야생사과인가 싶다.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자 / 그 길에서 꿈을 꾸며 걸어가리라”하고 노래한 가수 이용씨의 <서울>이 생각난다. 이야깃거리 만들기를 잘하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종로에 사과나무를 심었다는데,(1) 그 소식이 이 도시에까지 전해졌나보다.

테트라산맥을 넘고 슬로바키아를 종단하여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로 가는 길이다. 슬로바키아는 뒷날 브라티슬라바로 갈 때 자세히 소개하기로 하고 먼저 헝가리를 이야기해 보자. 헝가리(Hungary)는 유럽의 동남부에 위치한 내륙국으로 수도는 부다페스트이다. 헝가리 말로는 머조로르사그(Magyarország)라고 한다. 인구는 2017년 추산 9,797,561명이며 일인당 GDP는 28,965달러이다. 2011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헝가리 국민의 80.7%는 헝가리인(마자르족)이며, 집시를 의미하는 로마인이 6.1%, 독일인이 1.3%이고, 기타 다양한 동유럽계가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다. 주변 국가들의 언어와는 연관이 없는 우랄어족의 헝가리어가 공식 언어이며, 유럽에서 13번째로 사용자가 많은 언어이기도 하다. 전국민의 52.9%가 기독교를, 37.1%가 로마 가톨릭을, 11.1%는 헝가리 개혁 칼빈교를 믿는다.

동서길이는 524km이고, 남북길이는 250km이며, 국토면적 93,030km2 로서 국경의 길이는 2,258km이다. 북쪽에는 슬로바키아가 있고, 남서쪽으로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과 서쪽으로는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나눈다. 현재의 국경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열린 트리아농조약에서 결정된 것으로 원래 영토의 71%를 잃은 결과이다. 헝가리의 국토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기슭에 펼쳐진 분지의 가운데 형성된 평야로 헝가리 평원 혹은 헝가리 분지라고도 하는데 가운데로 도나우강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그 지류인 티사강이 흐른다. 서쪽에는 중앙유럽 최대의 발라톤호수가 있고, 온천이 많아서 오래 전부터 공중 욕탕이 발전해왔다.

부다지역의 한적한 동네에 있는 한식당 ‘아리랑’. 비빔밥이 정말 맛있었다.

중간에 응급상황으로 길가에 한 번 선 것과 휴게소에 두 번 들른 시간을 포함해서 5시간 만에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개인적으로 부다페스트는 두 번째 방문하는 것이다. 2010년 9월말에 부다페스트에서 열렸던 유럽독성병리학회연합회 연차학술대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2) 그때 페스트지역에 있던 숙소에서 학회장까지 7km가 넘는 길을 걸어가기도 하고, 학회가 끝나고 부다지역의 유적을 걸어서 구경한 적이 있어 나름대로는 익숙한 장소들이 많다. 버스가 시내로 들어서는데 익숙한 풍경을 만난다. 영웅광장이다. 이어서 파리의 상젤리제거리를 본 따서 만들었다는 명품가게들과 각국 대사관들이 들어서있는 거리를 지난다. 그래서 부다페스트를 동유럽의 파리라고 하나보다. 금강산도 식후경. 페스트지역을 지나 다뉴브강을 건너 부다지역의 한적한 동네에 있는 한식당 아리랑에서 비빔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며칠 만에 먹는 우리 음식이라는 이유가 아니라 제대로 살린 비빔밥이 정말 꿀맛처럼 맛있었다.

겔레르트 언덕에서 부다와 페스트의 파노라마 사진. 가운데 걸린 다리가 세체니 다리이다.

점심을 먹고 현지가이드의 안내로 겔레르트언덕을 시작으로, 마차시성당, 어부의 요새, 대통령궁, 부다왕궁까지 걸어서 돌았다. 겔레르트 언덕(Gellért Hill)은 부다시의 1지구와 11지구의 일부에 걸쳐 있는 높이 235m의 언덕이다. 18세기에는 언덕 주변이 온통 포도밭이었고 포도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밤마다 마녀들이 찾아와 포도주를 훔쳐갔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겔레르트 언덕에는 소련군이 세운 해방기념탑, 자유의 여신상과 그 아래로 합스부르그왕가에서 세운 치타델라(Citedella) 요새가 있고, 그 아래로 절벽 위로 성 겔레르트의 기념탑이 있다. 겔레르트언덕에 오르면 부다왕궁을 포함한 부다지역은 물론 도나우강 건너 페스트지역까지도 잘 볼 수 있다. 특히 밤에 오르게 되면 야경이 환상적이다. 2010년에는 학회의 공식행사로 초저녁에 이곳에 올라 야경을 볼 수 있었으니 필자는 밤과 낮의 풍경을 모두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은 셈이다.

해방기념탑 아래 도나우강쪽 비탈에 조성된 겔레르트 기념탑

언덕의 이름은 11세기 헝가리에 가톨릭을 전교하다 이곳에서 순교한 이탈리아 선교사 겔레르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겔레르트라는 헝가리이름으로 불리는 제라르도 디 사그레도(Gerardo di Sagredo) 성인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제라드도 성인은 1020년을 전후하여 성지순례를 떠났는데, 이스트라반도 부근에서 폭풍을 만나 베네딕트 수도원에 의탁하게 되었다. 이때 만난 성마틴 수도원의 원장 라시나(Rasina)는 헝가리왕 이슈트반대제가 가톨릭을 국교로 정하고 있어 전교의 적지라면서 헝가리로 갈 것을 권유하였다. 이슈트반대제의 뜻에 따라 신설된 크소나드(Csanád)교구의 주교가 된 겔레르트는 가톨릭 전파에 힘을 썼다. 이슈트반대제가 죽은 뒤, 1046년에는 바타(Vata)의 토착신앙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때 겔레르트는 순교를 하게 된다. 그의 죽음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창에 찔린 채 돌로 싼 그의 사체를 블록스부르그(Blocksburg)절벽에서 도나우강에 던져졌다는 설이 있고, 바퀴가 둘 달린 짐차에 올려 블록스부르그 언덕에서 굴러 떨어지게 했다는 설이 있다. 그의 죽음 이후 이 언덕을 겔레르트 언덕으로 부르게 되었다.(3)

겔레르트 언덕에 있는 치타델라 요새 (Wikipedia,에서 인용함)

치타델라 요새는 1848-49년간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그가의 지배에 대항하여 일어난 헝가리인의 반란이 진압된 다음에 세웠다. 외세의 침입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185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54년에 완공되었다. 공사는 전적으로 헝가리사람들의 강제노역으로 이루어졌다. 완공 뒤에는 60문의 대포를 배치하였다. 겔레르트언덕이 부다와 페스트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위치임을 생각한다면 실제로는 부다페스트 시민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웠던 것이다. 길이 220m에 폭이 60m인 요새는 높이 4m의 벽으로 중정(中庭)을 U자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성립한 뒤에 헝가리사람들이 성채 파괴를 요구하였지만, 1897년에 정문의 일부를 상징적으로 손상시켰을 뿐이다. 성벽 아래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된 대공포, 박격포, 대전자포 등을 전시하고 있다.(4)

부다왕궁에서 바라본 자유의 여신상(좌상) 자유의 여신상 앞에 있는 용을 제압하는 용사상(좌하), 동쪽에 있는 러시아를 향하고 있는 자유의 여신상(우)

해방기념탑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도 전에 소련군의 압력으로 건설이 결정되었다. 부다페스트의 자유의 여신상(Szabadság Szobor)으로 알려진 이 기념탑은 “수도 부다페스트 수도를 해방하는 과정에서 스러져간 소련 병사들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하여” 설립한다고 관련법에 규정하였다. 지그몬드 스트로블 키스파루디(Zsigmond Strobl Kisfaludi)가 제작한 이 기념탑은 1947년 4월 4일 공개되었다. 조각가는 이슈트반대제의 기념관을 위한 기획을 수정하였다고 한다. 자유의 여신상 제작과 관련한 일화로 조각가는 우연히 길에서 만난 여성에게 모델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여 승낙을 받았고, 그녀는 하루에 20분씩 야자수 잎을 들고 서있기를 몇 주 동안 반복했다고 한다.

26m의 받침대 위에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는 여성이 두 손을 번쩍 들어 야자수 잎을 받쳐 들고 동쪽으로 멀리 소련을 바라보는 모습을 나타낸 14m 크기의 청동상을 올렸다. 여신상 앞에는 용을 무찌르는 용사와 횃불을 든 젊은이의 상이 좌우에 있다. 처음에는 현재 남아 있는 두 개의 작은 청동상 이외에도 6m 크기로 만든 세 명의 소련군 청동상과 3m 크기의 석상이 같이 설치되었다. 석상은 1956년 혁명기간 중에 파괴되었으며, 세 개의 소련군 청동상은 공산주의가 붕괴된 뒤에 메멘토 공원(Memento Park)으로 옮겨졌다. 1989년까지도 "병따개"라는 별명이 붙은 자유의 여신상을 철거할 지 여부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지만, 소련군이 철수한 1993년에 앞서 말한 소련군인의 동상을 이전하고 “헝가리의 독립과 자유 그리고 번영을 위하여 희생한 모든 이들을 기념하기 위하여”라고 비문을 바꾸었다.(5) 오랫동안 논란을 빚어왔던 자유의 여신상이지만, 지금은 도나우강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부다페스트의 상징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참고자료:

(1) 박원순 페이스북. 2014년 4월 4일.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자~~

(2) 눈초의 블로그. 부다페스트학회.

(3) Wikipedia. Gerard of Csanád.

(4) Wikipedia. Citadella.

(5) We love budapest. Viktor Tompos. Budapest’s iconic Liberation Monument turns 70 years 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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