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 건강복지정책연구원장 “통제 없이 의료 이용하는 의료체제 개혁해야”

의료접근성이 높고 선진국에 비해 국민의료비 부담이 적다는 게 한국 의료체계의 장점이다. 하지만 고령화와 만성질환 증가에 경제마저 저성장의 늪에 빠지면서 현재의 의료체계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오는 2025년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 2030년에는 4분의 1이 65세 이상 노인인 시대가 도래한다. 노인 진료비는 급증해 지난해 전체 진료비의 38.7%인 25조187억원이 지출됐다(자유한국당 강선진 의원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노인 진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오는 2025년에는 45.6%, 2030년에는 65.4%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현 의료체계에 대한 의료계의 불만도 크다. 저부담-저수가를 기반으로 구축된 의료체계를 유지하려다보니 곳곳에서 왜곡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문재인 케어’로 불리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에 의료계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때문에 땜질식 처방이 아닌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더 늦기 전에 새 판을 짜야 한다”는 건강복지정책연구원 이규식 원장의 주장에 눈길이 가는 이유다. 지난 11일 서울 서초구 건강복지정책연구원에서 만난 이 원장은 한국 의료가 건강보험 제도를 도입한 1977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의료를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원장은 지난 2016년 9월부터 건강복지정책연구원에서 발행하는 <이슈 페이퍼>를 통해 의료개혁 방향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최근 이를 묶어 <의료개혁,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단행본을 발간했다. 책자에 담긴 의료개혁 방향은 이 원장과 스무명이 넘는 보건의료 전문가들이 함께 논의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규식 건강복지정책연구원장은 지난 11일 청년의사와 인터뷰에서 '1977년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의료체계를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1977년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말이 다소 추상적으로 들린다. 어떤 의미인가.

건강보험이 도입된 1977년부터 지금까지 그 틀이 유지되고 있다. 이 틀은 급변한 시대 상황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 1977년 당시에는 의료에 대한 개념도 명확하지 않았다. 의료를 국민의 기본권으로 봐야 하는지, 상품으로 봐야 하는지 고민도 없이 시혜적 개념으로 의료보장제도를 도입했다. 국민 1인당 소득 1,000달러 수준에서 도입한 시혜적 차원의 의료보장제도를 소득 3만 달러를 바라보는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 의료에 대한 관점이 중요하다는 건데, 왜 중요한가.

의료를 국민들이 누려야 할 기본권으로 간주하면 의료는 ‘Demand’가 아닌 ‘Need’로 표출되고 그 틀로 제도가 갖춰진다. 기본권이기에 필수적으로 보장해야 하는 의료는 전문가가 판단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소비자들의 요구가 판단 기준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전 국민에게 건강보험을 강제로 적용하고 있다. 의료를 공공재로 판단했지만 실제로는 상품으로 다뤘다. 또한 사회보험제도에서 의료서비스 구매자는 보험자이지만 우리는 환자가 구매자라고 생각한다. 사회보험제도 하에서는 보험자가 공급자와 협상을 해서 가격을 정하고 환자는 보험 패키지 안에 들어 있는 의료서비스만 구매할 수 있다. 비급여는 별도로 돈을 줘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환자를 구매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환자가 모든 걸 선택하게 풀어 놨다. 환자들은 진료비 중 일부만 본인부담금으로 내면 되기에 의료이용이 많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외래진료 횟수가 OECD 1위이고 입원일수가 일본 다음으로 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웨덴이나 덴마크 같은 복지국가의 국민 의료이용률이 우리나라보다 낮은 이유는 정부 등이 구매할 서비스를 통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보다 환자들이 내야 하는 본인부담금이 훨씬 적은데도 의료이용률이 낮다.

‘OECD Health Data 2017’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외래진료 횟수는 연간 16.0회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많다. 1인당 평균 재원일수는 16.1일로 OECD 평균인 8.2일보다 2배 정도 길었고 29.1일인 일본 다음으로 길다. 우리나라의 총 병상수는 인구 1,000명당 11.5병상으로 OECD 평균인 4.7병상보다 2배 이상 많다.

- 우리도 의료를 공공재로 보는 경향이 강하지 않나.

건강보험이라는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했으면 의료는 이미 공공재다. 하지만 우리는 의료를 ‘공공성이 강한 사적 재화’라고 한다. 공공성이 강하다는 건 추상적인 의미로 측정할 수가 없다. 정부도 의료를 사적 재화라고 보기 때문에 지원을 많이 하지 않는다. 정부가 의료를 공적 재화로 간주한다면 규제와 함께 지원도 이뤄져야 한다. 규제도 원칙에 따라 하기보다는 원칙 없이 행정 편의주의로 한다. 논리로 설득하지 못하니 의료계 등이 반대하는 정책은 추진하지 못하는 것이다.

2000년 공공보건의료법을 제정해 공공병원에서 하는 의료를 공공의료로 정의한 것도 잘못됐다. 공공병원에서 제공하는 의료서비스와 민간병원에서 제공하는 의료서비스가 뭐가 다른가. 공공병원의 의료급여 환자 비율이 조금 더 높은 것 빼고 다른 게 없다.

- 지난 2013년 공공보건의료법이 개정돼 민간병원도 정부 지원을 받아 공공보건의료를 수행할 수 있다.

이규식 건강복지정책연구원장은 청년의사와 인터뷰에서 급증하는 의료이용을 통제하고 거기서 남은 재정을 공급자에게 돌려줘 의료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규식 건강복지정책연구원장은 청년의사와 인터뷰에서 급증하는 의료이용을 통제하고 거기서 남은 재정을 공급자에게 돌려줘 의료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공보건의료법 제2조 1항은 ‘공공보건의료란 국가, 지방자치단체 및 보건의료기관이 지역·계층·분야에 관계없이 국민의 보편적인 의료 이용을 보장하고 건강을 보호·증진하는 모든 활동을 말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같은 조 2항과 3, 4항에서 공공보건의료사업과 공공보건의료기관, 공공보건의료 수행기관에 대한 정의를 따로 내리는 사족을 달아서 1항을 사문화시켰다.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한 국가에서 공공의료를 따로 정의한 것 자체가 난센스다. 의료에 대한 잘못된 시각에서 비롯됐으므로 이번에 판을 새로 바꿔야 한다.

- 추상적인 의료 개념에 대해 이야기 했는데, 의료개혁을 해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고령화, 만성질환, 저성장 경제라는 ‘3각 파도’가 몰아치고 있지만 현 체제로는 이를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한다. 건강보험 보장성은 확대하면서도 의료이용을 제한하는 방안은 없다. 선진국들은 이미 대비책을 마련해 대응하고 있다. 1970년대 3각 파도에 부딪친 덴마크는 지방 정부에서 교통정리를 했다. 병원은 급성질환자만 받고 만성질환자는 병원 밖에서 돌보는 ‘커뮤니티 헬스케어 시스템’을 구축했다. 만성질환자는 동네의원에 등록해 진료를 받는다. 의사를 많이 배치하지 못하니까 방문간호사를 활용해 케어팀을 구성했다. 특히 노인들은 의료와 돌봄서비스가 모두 필요하다. 방문간호사와 물리치료사, 영양사, 요양보호사 등이 한 팀으로 움직이면서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물론 의료행위는 반드시 의사의 처방 하에 이뤄지는 원칙은 지킨다.

- 정부 정책 방향이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에만 너무 치우쳐 있다는 지적인가.

보장성 확대는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전제가 있어야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의료서비스 구매자는 보험자고 환자는 이용자다. 이용자인 환자들이 의료를 적절히 이용하도록 보험자가 역할을 해야 한다. 남용되지 않게 의료이용을 줄이고 거기서 남은 재정은 공급자에게 돌려줘서 의료서비스의 질을 개선하도록 해야 한다. 지금처럼 의료이용률이 높아서는 감당이 안된다. 의료이용을 통제해서 남는 재정은 공급자에게 돌려줘야 공급자들도 의료이용 통제에 동참할 수 있다. 현재는 의료통제를 하면 공급자의 수익이 감소하는 형태다.

- 우리나라 국민의 의료이용률이 높을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원인은 없나.

출처 : <의료계혁,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

건강관리를 의료에 너무 의존하는 것도 문제다. 의료와 건강관리를 구별해야 한다. 건강관리는 공중보건에서 담당해야 하며 그 역할은 보건소가 맡아야 한다. 보건소들이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는 진료 업무를 하고 있는 게 문제다. 건강수준 향상에 의료가 기여하는 정도는 10%에 불과하다. 하지만 건강관리를 지나치게 의료에 의존한 결과 의료이용의 형평성은 매우 높지만 건강형평성은 지역이나 소득계층 간 격차가 크다. 국민건강통계 등을 분석해 보니 저소득층일수록 흡연율과 스트레스 인지율은 높고, 운동실천율, 건강검진 수검률, 인플루엔자 예방접종률 등은 낮았다. 반면 연간 입원율과 외래이용률은 저소득층이 고소득층보다 높았다.

- 의료개혁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건 아니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장기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의료보장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국가들은 대부분 장기적인 의료계획을 수립한다. 의료체계의 발전 방향이나 목표를 세우고 의료이용 추계를 토대로 병상수나 인력과 같은 자원계획이 장기 계획에 포함된다. 우리 정부도 2000년 ‘보건의료기본법’을 제정하면서 5년마다 보건의료 분야 계획을 수립하도록 규정했지만 사문화된 지 오래다. 장기 계획이 없으니 의료의 중심이 지역사회가 될지, 병원이 돼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의료이용은 자유방임 상태로 두면서 의사인력은 통제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 의료의 중심이 지역사회가 돼야 하나 병원이 돼야 하나.

북유럽은 이미 지역사회 중심으로 의료가 운영된다. 병원 중심인 미국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지역사회에서 일차 진료 의사가 만성질환자 등을 관리하며 의료이용을 줄인다. 일본은 조금 늦어 지난 2012년 병원 중심에서 지역사회 중심으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일본은 오는 2025년까지 지역사회 중심으로 의료시스템 개편을 완료할 계획이다.

우리도 병원 중심에서 벗어나 지역사회 중심으로 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차 진료 의사 양성이 중요하다. 가정의학과 전문의 수준으로 양성해야 한다. 일차 의사는 방문간호사와 팀을 이뤄 지역사회에서 환자들을 돌보는데 이 때 필요한 게 원격의료라고 하는 텔레메디신(telemedicine)이다. 방문간호사가 원격으로 의사한테 환자의 상태를 알리고 이를 본 의사가 간호사에게 처방을 내리는 방식이다. 지난 정부에서 의료기기업체나 IT업계의 요구로 원격의료를 추진하면서 이미지만 망쳤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원격의료 정책을 추진했다.

- 그렇다면, 의료개혁은 누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건강보험 보험자인 정부, 공급자인 의료계, 가입자인 국민들이 함께 고민해서 사적 재화 개념이 혼재돼 있는 의료에 대한 개념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고 5년마다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을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더 이상 미뤄서는 안된다.

창간 25주년을 맞은 청년의사는 이 원장의 지적처럼 고령화와 4차 산업혁명 등 급변하는 환경에 발맞춰. 근본적인 의료개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한국의료체계, 새 판을 짜자’라는 주제로 전국 순회 그랜드포럼을 개최한다. 그랜드포럼은 13일 서울(한국프레스센터)을 시작으로 17일 광주(조선의대), 18일 대구(파티마병원), 19일 대전(건양대병원)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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