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동유럽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에 이어 다시 동유럽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중앙광장에 등장한 비눗방울 날리는 아저씨. 어른들은 시큰둥하고(좌), 꼬마들은 신났다(중), 한 꼬마는 신기한 표정으로 아저씨를 지켜본다(우)

광장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다. 하지만 사람들만 모이는 것은 아니다. 크라쿠프 중앙광장은 비둘기가 많기로 유명하다. 작은 꼬마가 비둘기를 뒤쫓는 모습이 예쁘다. 비눗방울을 날리는 사람이 눈길을 끈다. 바르셀로나의 라플라스광장에서도 본 적이 있는 풍경이다. 비눗방울을 날리는 사람은 그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것 같다. 어른들은 그저 지나가다 눈길을 한 번 주는 정도이지만, 꼬마 녀석들은 신이 났다. 날아오르는 비눗방울을 뒤쫓는 꼬마도 있고, 비눗방울을 만들어내는 아저씨가 신기한 듯 쳐다보는 꼬마도 있다. 꼬마들 눈에는 비눗방울 놀이가 신기하기만 한데 어른들은 시큰둥한 이유가 뭘까? 독일 하멜른 지방에 전해오는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가 생각난다. 비눗방울을 날리는 아저씨가 어린이들을 꼬이려는 것은 아니겠지?

아달베르트교회에서 북동쪽으로 있는 성모마리아성당으로 가다보면 19세기 폴란드의 가장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 아담 미키에비츠(Adam Mickiewicz)의 동상이 있다. 당시 유명한 조각가 테오도르 리기에(Teodor Rygier)가 설계한 동상의 발치에는 네 개의 은유적 조각을 세웠다. 시에나거리를 향한 동쪽에는 조국(Motherland), 북쪽으로는 과학(Science), 직물회관 쪽으로는 용기(Courage), 남쪽 보치에하 성당 쪽으로는 시(Poetry)를 은유한다. 그리고 받침대에는 “아담 미키에비츠에게, 국가가(To Adam Mickiewicz, the Nation)”라고 새겼다. ‘국가가(The Nation)이라는 대목에서 울컥한 느낌이 든다.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가 혹은 국민이 마음을 모아 기리는 누군가가 있었던가? 1940년 폴란드를 침공한 나치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것을 1946년에 복원하였다.(1) 이 장소는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크라쿠프에서도 유명한 만남의 장소가 되고 있다.

미키에비츠 동상(좌), 성모승천교회(중), 성모승천교회의 제단후면 장식(우, Wikipedia에서 인용함))

미키에비츠의 동상 건너편에는 성모대성당이라고 부르는 성모승천교회(Church of Our Lady Assumed into Heaven)가 있다. 이 성당은 이보 오드로바츠(Iwo Odrowąż) 당시 크라쿠프 주교가 주도하여 1221-1222년 간에 처음 세워졌다. 하지만 몽고의 침공 당시 파괴되었고, 1290-1300년 남아있는 기초 위에 초기 고딕양식의 교회를 건설하여, 1320년 축성하였다. 카시미르3세 대왕 시절 부유한 식당주인 미콜라즈 비에르즈네크(Mikołaj Wierzynek)의 기부로 1355재건이 시작되어 1365년에 교회가 완성되었다. 이때 교회를 길게 늘이고 긴 창문이 추가되었다. 1395년부터 2년에 걸쳐 프라하에서 온 건축가 니콜라스 베르너(Nicholas Werhner)가 새로운 천장을 올려 본당건물이 완성되었다. 1442년에는 크라쿠프에서는 전무후무했던 지진이 일어나 본당의 지붕이 무너졌다. 15세기 중반에 부속 예배당이 건설되었고, 이때 북쪽의 탑을 증축하여 도시의 시계탑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남쪽 탑과 높이가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당의 제단에서 볼 수 있는 후기 고딕양식의 제단후면 장식은 15세기 말 비트 스트보스츠(Wit Stwosz)가 제작한 걸작품이다.

벽돌로 지은 높이 80m의 고딕 양식의 교회건물은 폴란드의 대표적 고딕양식 건물로, 폴란드를 떠난 이주민들이 교회를 지을 때 모형으로 삼았다. 그렇게 세운 대표적인 교회로는 시카고의 성 마이클교회, 성 존 칸티우스교회가 있다. 매 시간 교회의 탑 꼭대기에서 헤이나 마리아키(Hejnał mariacki)를 연주하는데, 구슬픈 가락의 연주가 중간에 끊어진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13세기 몽골군이 침입하였을 때 한 트럼펫 연주자가 피난을 떠나지 않고 교회의 탑에 올라 트럼펫을 불어 적의 침입을 알리려 하였다고 한다. 트럼펫을 부는 연주자를 발견한 몽고군이 쏜 화살이 트럼펫을 부는 연주자의 목을 관통하였고, 연주는 중단되고 말았다. 후세 사람들이 이 용감한 트럼펫 연주자를 기리기 위하여 트럼펫 연주를 중간에 중단하게 된 것이다. 1929년 에릭 켈리가 발표한 <크라쿠프의 트럼펫>의 무대가 되어 영어권 독자들에게는 친숙한 장소이다.(2) 우리나라에도 <크라쿠프의 나팔수>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다.

크라쿠프 중앙광장을 달리는 예쁜 마차

50분의 자유 시간을 활용하여 광장 주변에 흩어져 있는 볼거리들을 구경하다보니 광장 주변을 달리는 마차가 눈에 띈다. 화려하게 꾸민 마차를 타고 광장을 중심으로 도는 투어상품이 꽤나 인기가 있나 보다. 우리 일행 가운데 몇 분이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등장해서 손을 흔드는 바람에 깜작 놀랐다. 마차를 탄 모습을 찍어 줄 요량으로 따라갔지만 만만하게 보이는 마차를 따라 잡을 수 없었다. 한참을 뒤쫓다 포기하고 말았는데 처음부터 뛰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까지는 그만저만하던 무릎 통증이 갑자기 심해진 것이다. 아달베르트교회 앞에 앉아 버스킹공연을 즐기면서 통증을 달랬다.

잠시 쉬는 김에 폴란드 역사를 공부하자. 폴란드의 역사는 963년 미에슈코1세(Mieszko I)가 개창한 피아스트왕조에서 시작한다. 그는 크라쿠프와 그니에즈노 지방을 중심으로 나라의 틀을 확립하였다. 로마 가톨릭을 국교로 받아들여 폴란드를 라틴어 문화권에 포함시킨 것은 그의 업적이다. 영토의 확장에도 주력하여 967년에는 발트해 연안에 이르렀다. 미에슈코1세를 계승한 블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Bolesław I, Chrobry)는 비에프시 강(Wieprz) 상류와 부크 강(Bug) 유역과 산 강(San) 상류의 프셰미실(Przemysl)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피아스트왕조는 독일왕국과의 갈등으로 벌어진 내전으로 12세기 초반 여러 개의 소공국으로 분할되었다.

1333년 왕위에 오른 카지미에시 대왕에 의하여 잠시 회복되었지만, 후사가 없던 왕이 죽으면서 피아스트왕조는 끝났다. 카지미에시 대왕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1364년에 크라쿠프 대학을 설립한 일이다. 이 대학은 우수한 공무원 양성을 목적으로 법학에 많은 비중을 두었으며, 폴란드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폴란드의 왕위는 헝가리왕 루드비크(Ludwik)에게 넘어갔다. 역시 아들이 없었던 루드비크왕이 죽은 뒤 왕위는 둘째 딸 야드비가로 넘어갔는데, 리투아니아의 왕 야기에우워가 가톨릭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야드비가와 결혼을 하고,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를 통합하여 왕으로 즉위하면서 1386년 야기에우워왕조(Jagiellonian dynasty)가 성립된다. 야기에우워왕조는 200여년을 이어가면서 동유럽을 지배하였는데, 15세기말 야기에우워 왕조는 체코, 헝가리,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 네 나라의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각각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국가들 사이의 유대관계도 돈독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헝가리가 투르크의 공격을 받을 때도 폴란드는 물론 리투아니아도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3)

1573년 이후에는 의회에서 귀족들의 투표로 국왕을 선출하는 일종의 귀족공화정이 출범하였다. 1587년 국왕으로 선출된 지그문트 3세(Zygmunt III)는 왕권을 강화하고 스웨덴에 맞서고 러시아를 침공해 모스크바에 입성하기에 이르렀다. 1655년 스웨덴왕국이 4만의 병력으로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를 공격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해체시킨 이후 폴란드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힘을 기른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왕국은 폴란드의 분할을 논의하다가 결국 1772년 1차 분할을 거쳐, 1793년 2차 분할이 이루어졌다. 그때 폴란드는 겨우 21만Km²의 영토와 370만 인구의 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1795년에 이루어진 3차 분할로 폴란드는 독립을 잃고 123년 동안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폴란드는 독일-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터였으며, 이들은 각자가 통치하던 지역의 폴란드 국민을 징집하여 전투에 내세웠기 때문에 같은 폴란드인끼리 싸우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런 상황을 피하려는 폴란드 지도자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전쟁의 막바지인 1918년 6월 연합국의 독립승인을 얻어냈다. 이렇게 시작된 폴란드의 제2 공화정이었지만,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개전과 함께 폴란드를 점령하면서 끝났다. 1945년의 포츠담협정에 따라 폴란드는 지금의 영역을 확보하고 다시 독립을 이루었다. 동쪽의 유전지역은 소련에 빼앗겼지만, 고도로 발달된 산업기반시설을 갖춘 서쪽 지역을 독일로부터 이양 받았다. 전후 소비에트의 지배로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지만, 1970년 그단스크 조선소 등의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시위가 촉발되면서 공산정권의 동요가 시작되어 1989년 공산당 정권이 물러나고 제3 공화국이 출범하였다.(4)

크라쿠프 외곽의 호젓한 분위기의 숙소(좌), 숙소 주변의 자작나무 숲(우)

다시 여행으로 돌아가자. 마차를 탄 일행도, 광장을 둘러보기만 한 일행도 큰 불만이 없을 정도의 자유 시간을 즐긴 일행이 모여 중앙광장을 떠난 것은 6시. 버스를 타고 도착한 숙소는 크라쿠프에서도 변두리였나 보다. 주변에 사람구경은커녕 건물도 없는 장소에 있는 2층짜리 숙소인데 밖에서 보기에는 그림 같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지붕 곳곳에 녹이 슬어있는 것을 보면 꽤나 연륜이 있는 듯하다. 숙소 주변에 있는 작은 언덕은 자작나무가 우거져 있다. 저녁식사에는 나이든 부부 3쌍이 자리를 같이 했다. 대구에서 오신 분이 7순이라 하셔 깜짝 놀랐다. 일행 가운데 가장 연장이신데도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 보인다. 여행도 역시 건강해야 가능한 일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지금까지 다닌 여행지를 자랑하는 경향이 있는데 조금은 조심할 일이다.

참고자료:

(1) Wikipedia. Adam Mickiewicz Monument, Kraków.

(2) Wikipedia. St. Mary's Basilica, Kraków.

(3) 위키백과. 폴란드의 역사.

(4) Wikipedia. History of Po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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