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동유럽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에 이어 다시 동유럽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소각로를 끝으로 아우슈비츠참관을 마치고 크라쿠프로 떠난 것은 3시반이다. 크라쿠프로 가는 동안 현지가이드 김선생은 폴란드의 건국전설을 시작으로 폴란드의 지형, 근면한 폴란드 사람들의 특성, 폴란드평원에서 많이 나는 감자와 돼지를 주식으로 한다는 이야기, 소시지와 보드카가 폴란드 사람들이 처음 만들었다는 이야기, 보드카를 냉동실에 서너 병씩 넣어 두었다가 빵 한 쪽과 함께 손님을 대접하는 전통 등 폴란드사람들의 삶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에 단군신화가 전해져 오듯, 폴란드에도 레흐(Lech)신화가 전해온다. 천년도 넘은 옛날 비스와(Wisla) 강 상류에는 슬라브족이 살고 있었다. 부족의 족장은 레흐(Lech), 체흐(Czech), 루스(Rus)라는 삼형제를 두었다. 족장이 죽은 뒤 세 형제는 영지를 나누었는데, 각자의 영지가 너무 작아 신천지를 찾아 떠나기로 하였다. 삼형제는 몇 달을 여행한 끝에 초원의 언덕에 서 있는 커다란 참나무와 그 가지에 앉은 신비로운 흰독수리를 발견했다. 흰 독수리를 상서로운 징조로 여긴 큰아들 레흐가 나무에 올라 주변을 살펴보았다. 북쪽에는 커다란 호수가 보이고, 동쪽으로는 기름진 평야가 끝없이 이어졌다. 서쪽에는 목초지가 펼쳐진 끝에 울창한 숲이 있었다.

레흐의 이야기를 들은 체흐는 남쪽으로, 루스는 동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레흐는 흰독수리가 둥지를 틀고 있는 언덕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착지를 세우고 ‘그니에즈노 (Gniezno)’라 하여 폴란드왕국의 첫 번째 수도가 된다. ‘새의 둥지’라는 의미의 폴란드어 ‘그니아즈도 (Gniazdo)’에서 유래한 것이다. 처음에는 레흐의 이름을 따서 ‘레흐 부족의 나라(Lach, lengyel, Lechistan)’로 부르다가 뒤에 북부 슬라브족이 합쳐지면서 생긴 ‘폴란(Polan)족’의 이름을 따서 ‘폴란드’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남쪽으로 내려간 체흐는 체코를 세웠고, 동쪽으로 간 루스는 러시아를 세웠다고 전한다.(1) 주변의 경쟁상대인 러시아나 체코는 동생의 나라라는 일종의 우월감 같은 것을 고취시키기 위한 전설이 아닐까 싶다.

전설을 그렇다 치고, 유럽의 초기인류는 50만 년 전부터 유럽 중앙부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폴란드 역시 석기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했을 것이다. 기원전 5,5,00년 무렵에는 신석기문명이, 기원전 2,400~2,300년 무렵에는 청동기 문명이 시작되었으며, 철기문화는 기원전 750~700년경 시작되었다. 기원전 400년경에는 라테인문화(La Tène culture)의 켈트족이 이주해 들어왔고, 이어서 게르만족이 이주했다가 기원 500년 무렵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기에 빠져나갔다. 그리고 인도유럽어부족에 속하는 발트족이 북동부의 삼림지역에 정착했다.(2) 지금의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사람들이 이들 부족이다. 그리고 9세기 무렵에는 앞서 적은 폴란드의 시원전설에 등장하는 슬라브족이 이주해 들어와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벌써 크라쿠프에 이르렀다. 인구 76만 명의 크라쿠프는 폴란드 제 2의 도시이다. 도시의 기원이 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피아스트왕조(Piast period)시절인 1038년부터 공화정 시절의 지그문트 3세가 수도를 바르샤바로 옮긴 1596년까지 폴란드 왕국의 수도였다. 크라쿠프는 전통적으로 폴란드의 학문,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으며 또한 폴란드 경제의 요충지다. 유서 깊은 크라쿠프는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군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어 파괴를 면했다. 덕분에 1978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플랜티공원. 빨간 사루비아 꽃이 고민에 빠진 남자를 지켜보는 여인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가보다.(좌상), 시청건물(좌하), 사피에하 대주교가 주석하던 교회. 그 앞에 대주교의 동상이 서 있다.(우)

버스에서 내려 가이드를 따라 구시가지로 이동한다. 크라쿠프의 옛 유적은 구시가지 안에 있다. 구 시가지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플랜티공원(Planty Park)은 구 시가지를 ‘정원도시’의 개념으로 보존하기 위한 개발계획에 따라 1822-1830년간에 중세의 성벽을 헐어내고, 성벽 밖에 있는 해자를 메워 만들었다. 공원면적은 21,000㎡로 길이로는 4km에 달한다. 기념조각과 분수로 장식된 30여개의 작은 정원이 이어져 전체를 이룬다. 플랜티공원의 아름다운 산책로를 따라 가다보면 흔적만 남은 성벽을 넘어 성안으로 들어선다. 성안으로 들어가 지금은 시청사로 사용하는 건물을 지나면 요한 바오로2세 교황의 스승 아담 스테판 사피에하 대주교가 주석하던 교회를 만난다.

요한 바오로2세 교황이 된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는 1920년 폴란드 남부 바도비체에서 태어났다. 1938년 크라쿠프의 야기엘론스키 대학교 연극학과에 입학하여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939년 나치의 폴란드 침공으로 대학이 문을 닫자 노무자로 일하면서 지하연극단체를 만들어 비밀리에 연극공연을 하였다. 나치의 만행을 직접 목격한 그는 1942년에는 대주교가 비밀리에 운영하는 지하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46년 사제서품을 받았고, 로마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 교황청립 대학교에 유학하였다. 1948년 폴란드로 돌아와 외딴 시골마을의 사제로 파견되었다가 1949년 3월 크라쿠프의 성 플로리아누스 교구로 전임하였다. 1958년 9월 29일에 주교품을 받았고, 1963년 12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크라쿠프 대주교로 임명되었다.(3)

크라쿠프 중앙광장(Wikipedia에서 인용함)

작은 성당을 지나 길을 건너면 중앙광장(Main Market Square)으로 향하는 작은 길을 따라 걷다보면 야기엘론스키대학교 법과대학건물의 입구를 지난다. 5시에 광장에 이르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시청 앞에 있던 광장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200m로 4만㎡의 크기이다. 가이드 말로는 벨기에 브뤼셀의 그랑 프라스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고 했는데, 사실이 아닌 듯하다. 게다가 광장 한복판에 커다란 시장건물이 들어서있어서 진정한 광장으로서의 공간은 협소해 보인다.

중앙광장은 1241년 몽골의 침략으로 도시가 파괴된 후, 1257년에 재건되었다. 당시의 중앙광장은 낮은 칸막이로 된 노점과 관리건물로 채워졌고 주변을 순환하는 도로가 있었다. 지금의 광장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직물회관(Sukiennice)은 고미다락과 가면을 새긴 폴란드식 난간으로 장식한 상부구조를 가진 르네상스양식으로 1555년 건축되었다. 직물회관 옆에는 시청탑이 남아 있다. 광장의 4분의 1을 차지하던 시청건물은 소실되고 없다.(4)

시청탑(좌), 중앙공원의 가운데 서 있는 직물회관.(우상), 성 아달베르트교회.(우하)

직물회관은 세계 최초의 백화점이라고 했다. 크라쿠프가 폴란드왕국의 수도였던 만큼 15세기 황금시절까지 이곳은 국제무역의 중심이었다. 인근 비엘리츠카 광산에서 채굴되는 소금과 동양으로부터 온 향신료, 비단, 가죽 등 다양한 이국적 물건들이 교환되었다.(5) 1층에는 중앙의 통로를 두고 양쪽으로 가게들이 이어져있고, 가죽제품과 수공예품 등 다양한 기념품들을 팔고 있다. 2층에는 크라쿠프 국립박물관의 직물회관 분관이 있다. 4개의 전시실에는 19 세기 폴란드의 그림과 조각예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짧은 자유 시간에 광장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볼거리를 자세히 살펴보고 사진을 찍느라 박물관까지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 아쉽다. 시청탑에 올라가보려 했지만, 입장에 필요한 폴란드화폐를 준비하지 못해 포기하는 등, 준비가 많이 부족한 여행이었다.

시청탑 반대편 광장의 남동쪽으로는 아달베르트(폴란드어로는 보치에하)성인을 기리는 성당이 있다. 이 성당의 기단부는 계단을 내려간 땅 밑에 있는데 이는 세월이 흐르면서 광장이 돋워졌기 때문이다. 보헤미아 출신의 아달베르트 성인은 이교도들이 사는 프러시아에 선교를 나갔다가 발틱해의 연안에서 살해되어 순교하였다. 폴란드로 모셔온 그의 유해는 폴란드왕 블레스와프 1세의 하명에 따라 그니에즈노성당에 안치되었고, 이곳에 그를 기리는 성당을 세웠다.(6) 그의 유해는 1039년 보헤미아의 브르제티슬라프 1세 공작에 의해 프라하로 이장되었다.

발굴된 유적을 보면 10세기 말에 지어진 교회는 목조였으며, 11세기에 석조벽을 더해졌다. 광장바닥을 2-2.6m 사이로 높아지면서 새로운 벽을 세우고 서쪽으로 문을 새롭게 냈다. 그리고 바로크양식의 돔을 올렸다. 19세기에 교회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로마네스크양식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원래의 입구였던 남쪽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입구와 계단이 발굴된 것이다. 광장은 사람들을 모으는 공간이다. 아달베르트 교회 앞에서는 젊은이들이 모여 버스킹 공연을 하고 있었다. 잠시 쉬면서 그들의 연주를 들었는데 상단한 실력이었다.

아달베르트교회의 용마루에서 이어지는 끝에 용머리를 암시하는 장식을 보았다. 크라쿠프에 전해지는 용의 전설을 모티프로 한 장식일게다. 옛날 크라쿠프를 돌아 흐르는 비스와강에 용이 살았다. 그런데 사악한 용은 마을의 소녀들을 계속 잡아먹어 주민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왕이 나서서 용을 죽이는 사람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고 약속했다. 한 구두수선공이 나서 양가죽에 타르와 유황을 채워 용에게 먹였다. 가짜 양을 먹고 타는 듯 목이 마르게 된 용은 비스와강에 뛰어들어 물을 들이마셨고, 그 물이 유황과 섞이면서 끓어올라 ‘뻥!’하고 터지고 말았다. 구두장이는 공주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전설이다. 사람들을 구두장이 클라크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의 이름을 크라쿠프라고 하게 되었다는 전설이다.(7) 뒷날 강가에 용의 조각을 세웠는데 용조각은 불을 내뿜기도 해서 관광객들을 즐겁게 한다고.

영웅의 용맹한 행위는 오로지 기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이언 밀러의 설명대로라면 구두장이 클라크의 용맹한 행위는 문자를 사용하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구전으로 이어져왔기 때문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영웅들은 그들이 한 행위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기를 바란다(8)’는 이언 밀러의 주장은 구두장이 클라크의 경우에는 맞아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참고자료:

(1) 다음 블로그 파란. 폴란드 건국설화

(2) Wikipedia. History of Poland.

(3) 위키백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4) Wikipedia. Main Square, Kraków.

(5) Wikipedia. Kraków Cloth Hall.

(6) Wikipedia. Church of St. Adalbert, Kraków.

(7) ENJOY 동유럽 체코, 크로아티아, 폴란드 등 13개국 50개 도시. 폴란드; 크라쿠프, 넥서스, 2016년.

(8) 윌리엄 이안 밀러 지음. 잃어 가는 것들에 대하여 342쪽, 레디셋고,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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