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동유럽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에 이어 다시 동유럽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동유럽여행에 본격적으로 나선 첫날이다. 전날 밤늦게 부르노에 도착한 것을 감안하여 8시반에 숙소를 나섰다. 첫 번째 일정인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는 오시비엥침까지는 버스로 4시간을 이동한다. 버스를 타는 거리가 3,500km나 되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이동거리가 길다. 동유럽여행을 프라하에서 시작하면 출입국이 간편하고, 프라하가 동유럽의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다른 도시로 출입하는 것보다 유리하다고 했다. 7시부터 시작하는 아침식사 시간이 1시간반이나 되는 것도 그런 여유에서 나온 것이다.

시간을 맞추어 식당에 내려갔는데, 모두들 식사중이다. 다들 배가 고팠나보다. 샐러드가 빠진 것을 제외하고는 식단이 푸짐하다. 해외여행을 할 때는 잘 먹어야 힘을 낼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식사를 마치고 직원에게 ‘water가 어디 있느냐’ 했더니 우리말로 ‘물?’ 한다. 어제 기내에서도 체코승무원들이 간단한 한국어를 해서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드라마 <대장금>을 네 차례나 정규방송에 편성할 정도로 체코에도 한류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한다.

폴란드로 가는 고속도로는 왕복 4차선인데 곳곳에서 확장공사를 하고 있다. 통행료를 받는 것 같지도 않다. 오스트리아 린츠로 이어지는 왕복2차선의 좁은 국도와는 또 다른 분위기이다. 야트막한 구릉을 오르내리면서 이어지는 도로변에는 추수가 끝난 빈 밭이 대부분이나 아직 수확하지 않은 옥수수가 서 있는 밭도 있다. 마을도 군데군데 서 있어 여유롭게 보이는 시골풍경이 이어진다. 인구 천만에 일인당 국민소득이 18,534달러(2017년 추정)로 우리나라와 비슷하다니 대단하다.

11시경 휴대폰이 울린다. 외교부와 이통사에서 문자가 온 것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니 어느 사이에 폴란드국경을 넘은 것이다. 폴란드 공화국은 폴란드어로 제치포스폴리타 폴스카(Rzeczpospolita Polska)가 공식명칭이며, 영어로는 폴란드(Poland), 폴란드어로는 폴스카(Polska)라는 약칭으로 부른다. 중앙유럽의 대평원 지역에 위치하며, 동서로 689km 남북으로는 649km에 달하는 총 312,6792 의 국토를 가진다. 국토의 90%는 해발 300m이하로 평탄하고 완만한 지형이다. 남쪽 국경지역에는 수데티와 카르파티아 산맥이, 중남부에는 타트라산맥이 있다. 타트라산맥에 있는 리시산이 해발 2,499m로 최고봉이다. 북쪽으로는 발트해에 연해있고, 동쪽으로는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및 러시아와 국경을 나누고, 남쪽으로는 체코와 슬로비키아, 서쪽으로는 독일과 접하고 있다. 수도는 바르샤바이며, 인구는 38,634,007명인데(2017년 추정) 95% 가까이가 서슬라브계의 폴란드인이며, 게르만, 벨라루시, 우크라이나계가소수를 이룬다. 일인당 GDP는 2017년 추정치로 12,722달러이다.(1)

폴란드 국경을 넘어서면서 도로변 숲에 자작나무가 많아진다

폴란드에 들어서니 고속도로 주변 풍경도 조금 변해서 야트막한 야산들이 눈에 들어오고 숲이 많아진다. 숲에는 자작나무 많아진다. “나는 침대다. 아니, 나는 침대가 아니다. 내가 처음부터 인간들을 위한 침대였던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 그루 나무였다. 하얀 나무줄기와 곧은 자태로, 숲의 귀족이라고 불리는 자작나무였다.(9쪽)”로 시작되는 최수철의 소설 <침대>가 떠오른다.

인간세상과는 멀리 떨어진 동토 시베리아에 뿌리를 내렸던 자작나무가 억센 인연의 고리를 타고 났는지 베어져 침대가 된다. 그 자작나무 침대가 시베리아를 떠나 일본을 거쳐 식민지 조선 땅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소용돌이의 현장을 증언한다. 작가는 침대를 통하여 급변하는 우리의 근-현대사를 축약하고 그 이면에 엮여 있는 인간 군상들의 면목을 발가벗기고 있다.(2)

오시비앵침 인근 마을에 있는 성당 앞에서 버스가 멈추었다.(좌), 점심을 먹은 식당 MEED.(우)

점심 무렵 오시비엥침에 도착했다. 폴란드어로 오시비엥침(Oświęcim)이라고 하는 이곳은 독일어로는 우리에게 익숙한 아우슈비츠(Auschwitz)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강제수용소를 세워 유대인 등을 학살하고, 심지어는 인체실험을 자행한 곳이다. 식당으로 향하던 버스가 신호대기로 선 장소가 마침 이름 모를 작은 성당이다. 근처 수용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동안에 이곳 마을 사람들은 성당에 모여 구원을 기도하였을 장면이 아무래도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신의 가호를 빌었을 사람이나, 그들이 기도를 들었을 신이 제정신이었던가 싶다.

MEED라는 예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초등학교 3학년인 딸과 같이 여행하는 모녀팀과 함께였다. 어머니는 디스크로 고생한다는데도 딸을 위한 여행에 나섰단다. 식당 분위기가 정갈한 탓인지 치킨스프와 폴란드식 돈까스 역시 맛있었다. 점심을 먹고는 오시비엥침 국립박물관으로 향했다. 인솔자의 요청에 따라 제1수용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오시비엥침 국립박물관은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가 있던 곳이다. 나치독일은 폴란드왕국의 수도였던 크라쿠프에서 37마일 떨어진 아우슈비츠 지역에 모두 3개의 수용소를 운영하였다. 제1 수용소는 1940년 5월에, 제2수용소(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1942년 초에, 그리고 제3수용소(아우슈비츠-모노비츠)는 1942년 10월에 세웠다. 제1수용소는 원래 폴란드 육군병영이었다.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한 뒤 폴란드국민의 반발을 통제하기 위하여 가톨릭신부 등 사회지도층인사를 검거하여 수용했던 곳이다. 러시아군 포로들을 수용하면서 이들의 노동력으로 제2수용소를 건립하고 유대인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조직적으로 유대인의 자산을 몰수하려는 치밀한 계획에 따른 것이다. 전쟁말기에는 군수물자생산에 필요한 인력을 충원할 필요에 따라 제3수용소를 건립하게 되었다.

종전 무렵 러시아군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주하는 바람에 나치는 전대미문의 학살현장의 증거를 제대로 없앨 수 없었다. 특히 제1수용소는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라서 대부분 남았지만, 규모가 더 컸던 제2수용소는 목조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상당부분이 불에 타 사라졌다. 1947년 7월2일 폴란드 하원이 ‘수용소 부지, 시설 영구보전에 관한 법령’을 통과시킴에 따라 ‘오시비엥침-브제진카 국립박물관’이 개관하게 되었고, 1999년에는 박물관의 명칭이 현재의 ‘오시비엥침 소재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국립박물관’으로 변경되었다. 박물관의 성격과 역할에 대하여 지금까지도 많은 논란이 이어지고 있지만, 수용소 터와 관련시설을 보전하고 아우슈비츠에서 자행된 독일전쟁범죄 관련 증거 수집하여 학술연구를 진행하며 관련 자료를 공개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3)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인간의 탈을 쓰고서는 할 수 없는 만행이 저질러졌던 현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멀쩡하다.

입장에 앞서 이곳을 유지하는데 반감을 가지고 있는 무리의 공격을 막기 위해 운용하는 철저한 보안검색을 통과해야만 했다. 검색을 마친 일행은 적절하지 않은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거나 담배를 피우는 일은 없도록 하라는 관람 시 주의사항을 들었다. 이곳이 한 줄기 연기로 사라진 사람들을 추모하는 공간이라는 점을 마음에 새기라는 뜻이리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너무 파랗다. 한줄기 스산한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마저 없었다면 이곳이 그토록 끔직한 범죄의 현장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다.

수용소 정문. ‘ARBEIT MACHT FREI’라고 적은 표어가 가증스럽다.(좌), 붉은 벽돌 막사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늘어서 있다.(우)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라는 선전문구가 쓰인 정문을 지나는데 그 옛날의 재소자악단이 나와 연주를 하는 듯한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ARBEIT’의 ‘B’자를 거꾸로 매달아 놓은 것은 재소자들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고 한다.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이 거짓이라는 뜻이다. 수용소로 들어가 늘어선 붉은 벽돌 건물들 사이에 서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기시감이 생기는 풍경이다. 서대문 형무소의 건물들이 붉은 벽돌로 지었던가?

막사의 1층에 마련된 전시실에 들어가면 비극적 사건의 전모를 사진으로 보여준다. 3개의 수용소의 위치와 철로의 배치를 볼 수 있다.(좌) 열차에서 내린 유대인들이 분류를 받기 위해 대기한다.(중) 수용대기중인 사람들의 불안한 표정을 읽을 수 있다.(우)

재소자들의 막사에 들어가면 입구에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The one who does not remember history is bound to live through it again.)”라는 스페인 출신의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의 말이 적혀 있다. 안에는 나치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어떻게 운영하였는지 관련 사진자료와 증빙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수용소 가까이 열차가 서면 입소절차가 진행되는데, 건강상태 등에 따라서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구분하여 노동력이 없는 사람은 가스실로 보내 처형하도록 했다.

나치는 부유한 유대인들의 재산을 조직적으로 강탈하기 위하여 거주지역 부근에 만든 게토에 우선 수용했다가, 새로운 거주지로 이사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강제수용소로 이송했다. 그래야 귀중품을 처분하지 않고 수용소로 향할 것을 꿰고 있었던 것이다. 게토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라브 스필만의 책 『피아니스트』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라프 스필만이 독일군 점령 하의 바르샤바에서 6년간 살아남은 경험을 담은 <피아니스트>는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함께 홀로코스트에 대한 탁월한 수기문학으로 꼽힌다.

나치가 유대인을 수용소로 끌어가기 전에 게토로 몰아넣은 것은 심리적으로 교란작전을 폈던 것이라고 합니다. 부유한 유대인들이 게토로 이주하면서 재산을 처분하도록 유도하면서 싼값에 그들의 자산을 매입하여 이익을 취했다. 이어서 수용소로 이주시키면서 새로운 거주지로 간다고 속임으로서 값비싼 물건들을 휴대한 유대인들이 수용소에 도착한 즉시 처형하고 그들이 들고 온 값비싼 물건들을 손에 넣는 방식이다.

참고자료:

(1) Wikipedia. Poland.

(2) 최수철 지음. 침대, 문학과지성사, 2011년.

(3)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역사와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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