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아프리카

거센 바람을 뚫고 희망봉 등정(?)에 성공한 다음 버스에 올라타고 향한 곳은 케이프반도의 동쪽, 사이먼타운에 있는 볼더스 비치(Boulders Beach)다. 볼더스 비치는 테이블마운틴 국립공원에 속하는 작은 모래해안이다. 5억4천만 년 전에 형성된 화강암 바위 사이에 만들어진 작은 해변으로 펭귄이 살고 있다. 자카스(Jackass) 펭귄이라고 부르는 아프리카 펭귄은 1982년 무렵부터 모여들기 시작해서 지금은 3천 마리 정도가 서식하고 있다. 자카스펭귄이 이곳에 자리한 것은 폴스베이를 중심으로 활발하던 원양 트롤어업이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많아진 밴댕이나 멸치류가 흘러들면서 먹이를 쫓던 자카스 펭귄들이 몰려들게 된 것이다.

2000년 6월 23일 철광석 탱커인 MV 트레져(Treasure)호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로벤(Robben)섬과 다센(Dassen)섬 사이에서 침몰하면서 1,300톤의 연료유가 유출되는 재앙이 발생하였다. 번식기에 일어난 이 사고로 많은 펭귄들이 피해를 입었다. 당국에서는 기름을 뒤집어쓴 펭귄을 케이프타운의 버리진 기차수리 창고에 옮겨 돌보는 한편, 피해를 입지 않은 펭귄 19,500마리를 케이프타운에서 동쪽으로 800km떨어진 포트엘리자베스 부근으로 옮겼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해안이 정화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펭귄들이 볼더스 비치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아 당나귀처럼 바보 같다고 해서 ‘멍청이’라는 의미의 자카스 펭귄은 가까이 접근하여 구경하거나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다른 펭귄들처럼 날지는 못하지만 수영하기 좋은 유선형의 몸매를 가지고 있다. 성체는 키가 60-70cm이고 체중은 2.2-3.5kg이다. 얼굴은 검은 색이지만, 눈 위에는 분홍색 반점이 있다. 몸통의 위쪽은 검정색이며 아래쪽은 하얗다. 두 부분은 분명하게 구분된다. 자카스펭귄은 아프리카의 남서부 해안에 있는 섬에서 주로 서식하지만, 아프리카대륙에서는 나미비아의 포트엘리자베스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볼더스비치 등에서만 자카스 펭귄을 볼 수 있다. 19세기 초만 해도 400만 마리가 있었는데, 산업화 이후 95%가 감소하여 2010년에는 5만5천 마리만 남아 멸종위기로 몰리고 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자카스 펭귄의 알이 맛이 좋다고 해서 남획한 까닭이다.(1) 과거에는 볼더스 비치나 인근의 폭시 비치(Foxy beach)에서 펭귄과 같이 수영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펭귄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도록 하였다.(2)

볼더스 비치는 자카스펭귄이 사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산책로를 따라 해변으로 향하면 모래톱 사이로 펭귄들이 사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마침 번식기인 듯 짝짓기를 하는 모습도 볼 수 있고, 막 깨어난 새끼인 듯 털이 부스스한 펭귄도 볼 수 있다. 먹이사냥을 다녀오는 듯 밀려드는 파도를 타고 해안으로 들어오는 펭귄도 있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나무데크를 따라가면서 펭귄을 관찰할 수 있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 다른 동물들이 접근하면 일단 경계상태에 돌입해야 할 것 같은데, 볼더스 비치의 펭귄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곳을 찾을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눈치다. 다른 동물에게 경계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펭귄들의 일반적인 현상 같다.

비운의 로버트 스콧 남극탐험대의 일원이었던 앱슬리 채리 개러드(Apsley Cherry-Garrard)은 “남극 세계의 이 작은 존재들은 묘하게도 어린애들 같다. 작은 몸집이 온통 호기심으로 차 있어서 두려움을 느낄 여지라곤 없어 보인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미국의 젊은 새박사 노아 스리커는 남극의 케이프크로지어에서 아델리펭귄을 조사하면서 “이 새들은 인간과 거의 접촉이 없었을 텐데도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녀석들은 내 신발끈을 풀기도 했고, 주저주저하면서 광택 나는 바지 옆을 부리로 문지르기도 했고, 기차놀이를 하는 양 내 뒤를 졸졸 따라오기도 했다.(3)”라고 적었다. 그리고 이런 행동들이 펭귄의 스타성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곳은 5시에 문을 닫는다. 비치 가까운 기념품가게에 들러 구경을 하고 숙소에 돌아왔는데도 6시다. 간단하게 짐을 정리하고서 호텔 레스토랑으로 내려가 저녁을 먹었다. 일행 중 한 분이 목이 붓기 시작한다고 해서 비상약으로 가져간 베타딘 스프레이를 드렸다. 필자의 경우 해외여행에서는 직업을 따로 밝히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행 초반에 직업이 알려지는 바람에 생각지도 않게 팀닥터 노릇을 했다. 환자를 진료하는 전공이 아니라고 했지만, 어떻든 의학을 공부한 것 아니냐고 되묻는 바람에 얼떨결에 떠맡은 것이다. 마침 읽고 있던 책에서 “병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의사를 그 어떤 병이라도 완벽하게 고쳐줄 초능력자로 생각하곤 한다(4)”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이런 경우도 설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어떻든 이번 여행에서 몸이 조금 불편하신 분들이 몇 분 계셨는데, 준비해간 상비약으로 증상이 좋아져서 다행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마지막 날 예정된 시내관광을 내일로 몰아 진행하고, 마지막 날은 여유 있게 숙소에서 공항으로 바로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인솔자는 서식을 만들어 일행 모두의 사인을 받아갔다. 철저한 일정관리의 전형이다. 산을 세 개나 오르는 등,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많이 걸은 날이다. 고단했던지 열시도 안돼서 잠이 들고 말았다.

아프리카에서 맞는 9일째 아침이다. 이날은 9시에 숙소를 나서기로 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늦게 출발하는 날이다. 늦게 일어나도 되는데 이런 날은 꼭 일찍 눈을 뜬다. 새벽 4시에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잠들었는데도 6시에는 완전히 깨고 말았다. 이날의 첫 번째 일정은 일명 물개섬이라고도 하는 듀어커섬(Duiker island)에 간다. 버스는 다시 케이프타운의 도심을 거쳐 가는데, 악마의 봉우리가 있는 산비탈에 있다는 그루트 슈어(Groot Schuur Hospital)병원이 화제에 올랐다. 케이프타운대학교 의과대학의 부속병원인 그루트 슈어병원은 1938년에 설립되었다.

이 병원은 특히 1967년 12월 3일 세계 최초로 사람끼리의 심장이식을 성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대학 출신 흉부외과 의사 크리스천 네이틀린 버나드(Christiaan Neethling Barnard)교수를 중심으로 한 30명의 심장이식팀은 9시간의 대수술 끝에 교통사고로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스물다섯의 처녀 데니스 다발(Louis Washkansky)의 심장을 쉰다섯 살 된 식료품상 루이스 워시캔스키(Louis Washkansky)에게 이식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워시캔스키는 18일 후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워시캔스키는 심장이식이 필요한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것은 틀림없었지만 당뇨에 간부전과 신부전까지 앓고 있어서 수술에 따른 위험성을 고려한다면 생명을 건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전에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수술을 시도해보자(5)’는 의료진의 설득에 동의했다. 첫 번째 심장이식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 읽으면서 지난해 말 방영된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환자의 간절한 소망이 주치의로 하여금 메스를 들도록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수술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환자의 이익과 위험을 고려하였을 때 반드시 필요한 수술이었나를 고민했어야 했다. 의료윤리의 문제 뿐 아니라 재정적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버나드교수의 심장이식 성공은 사망을 새롭게 정의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식한 심장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가급적 손상을 입지 않은 상태에서 이식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아직 사망에 이르지 않은 환자의 심장을 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1969년 미국의 하버드 의과대학은 사망의 기준을 정하기 위한 특별 위원회를 구성했고, 뇌사(brain death) 또는 비가역적 혼수상태(irreversible coma)라는 개념을 정리해내는 계기가 되었다.

대서양을 넘어온 파도가 캠스베이로 몰려든다(좌), 그리 크지 않은 캠프베이해변은 서핑하지 좋은 장소로 꼽힌다.

일요일이라서인지 교통이 원활하다. 가는 길에 캠프베이(Camps bay)의 휴게소(Maiden's cove braai area)에 잠시 머물다. 캠프베이 지역에 처음 자리 잡은 사람들은 산족 사냥꾼, 코이족 정착민들이었다. 얀 반 리에빅(Jan van Riebeek)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보급기지를 세웠을 무렵만 해도 사자와 표범, 영양들이 지천으로 깔려있었다. 18세기 초 이 지역을 휩쓴 홍역과 천연두에 원주민들이 대거 희생되면서 원주민들의 오두막이 빈 채로 남게 되었다. 이후 언젠가부터 이 지역은 캠프베이(Die Baai van von Kamptz)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884년 시포인트(Sea Point)와 캠프만(Camp bay)을 연결하는 도로가 죄수들을 투입하여 건설되기 시작하여 1997년에 완공되었다. 1888년 빅토리아여왕의 희년을 기념하여 빅토리아도로라고 명명되었다. 이 도로의 완공으로 캠프만은 피크닉 장소로 떠오르게 되었다. 캠프만에는 몇 개의 유명한 해변이 있다. 위트샌드(Witsand)라고도 하는 루이만(Lui bay)는 다이빙 사이트로 인기를 끌고 있으며, 코엘 베이(Koeël Bay)에는 아프리카 전통의 수공예품을 판매하는 골동품시장이 있다. 캠프베이해변은 캠프만에서 가장 큰 해변으로 오른쪽 끝은 최고의 서핑장소이다.(6)

메이든스 코브 브라이에서 바라본 12사도봉의 파노라마뷰.

대서양을 넘어온 거친 파도가 몸을 쉬는 작은 백사장 뒤로는 테이블마운틴이 시립하듯 둘러서있는데, 열두 개의 봉우리가 있다하여 12사도봉이라고 부른다. 해안에서 이어지는 산비탈에 흩어져있는 예쁜 집들은 유럽부호들의 여름별장이라고 한다. 캠프만 해변은 크지 않으면서도 대서양의 거친 파도가 밀려드는 탓인지 간혹 이안류가 형성되면서 해변 가까이 놀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바다로 쓸려가는 사고가 생기곤 한다. 빅토리아길에서 내려가는 캠스베이(Camps bay)의 휴게소(Maiden's cove braai area)는 대서양으로 지는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볼 수 있는 장소이며, 테이블마운틴의 12사도봉을 감상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참고자료:

(1) Wikipedia. African penguin.

(2) Wikipedia. Boulders beach.

(3) 노아 스트리커 지음. 새; 똑똑하고 기발하고 예술적인 182쪽, 니케북스, 2017년

(4) 헨리마시 지음. 참 괜찮은 죽음 8쪽, 더 퀘스트, 2016년

(5) 대니얼 데이비스 지음. 나만의 유전자 78-82쪽, 생각의 힘, 2016년

(6) Wikipedia. Camps 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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