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동365일의원 고병수 원장…박형욱 교수 ‘의미 있는 주치의제도 논의를 위하여’에 대한 반론

얼마 전 페이스북에 박형욱 교수님이 제주도에 휴가 와서 찍은 비양도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맛있는 밥을 사겠다고 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훗날로 미뤄야 했다. 참고로 필자가 현재 개원해 있는 곳이 제주도이다. 얼굴 마주보며 논쟁을 하고픈 마음도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휴가차 온 분에게 그건 잔인한 짓이었을 것 같다.

7월 24일자 박형욱 교수님의 칼럼 의미 있는 주치의제도 논의를 위하여를 읽었다. 사실은 이전부터 페이스북을 통해서 비슷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던 참에 마침 청년의사에 관련 글을 올렸고, 나 또한 반론 형식으로 기고를 했다. 이번 글 역시 반론의 내용이지만 박 교수님이 우려하는 것처럼 논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대답을 한다는 것처럼 보일까봐 나름 적절한 답변을 쓰려고 한다.

주치의제도, 아니 한국의 일차의료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책 다섯 권도 더 될 분량이 나올 것이다. 짧은 글 중심의 SNS 공간이나 몇 마디 의견 나누는 자리에서 논의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 여러 의견들을 들으며 정리가 되어야 할 사안이다. 그런 점에서는 청년의사가 내어준 이 자리도 한계를 가진 논의가 될 수밖에 없음을 알지만 그나마 기회를 만들어준 것만도 고마운 일이고 논쟁의 씨앗을 뿌려준 박형욱 교수님도 고맙다. 웬만하면 언론들은 일차의료에 대한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주치의제도 내용을 꺼내들면 용도폐기된 지난 이야기라고 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박 교수님의 물음에 모두 답할 수가 없다. 언젠가 넉넉한 시간을 들이는 논의의 자리가 마련된다면 이 분야에서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많은 분들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마련될 거라고 확신한다. 그래도 이 귀중한 자리를 통해 몇 가지 논쟁의 실마리만 나열하고 필자의 글을 마치고자 한다.

한국 전체의 보건의료체계의 문제는 지역사회 중심의 일차의료가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점과 전문의제도의 후진적 운용에서 시작한다. 그 외 여러 가지 문제점들도 있지만 한국 상황에서 얽힌 실타래를 풀 방법으로 말하자면 그렇다. '일차의료의 문제 중 가장 먼저 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라고 물으면 그것은 일차의료에 대한 ‘한국적 정의 내리기’라고 하고 싶다. 일차의료는 세계에서 통용되는 정의가 있어도 각 나라의 현실에 맞춰 다소 다르게 적용되고 있다. 영국이나 네덜란드 등의 나라에서는 일차의료전문의(GPs)들을 중심으로 얘기되지만 미국이나 프랑스에서는 내과, 소아과까지 합친 개념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일차의료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한국에서 일차의료는 무엇이냐”고.

일차의료에 대한 개념 정리가 안 되어 있기 때문에 일차의료기관에 대한 정의도 혼란이 온다. 우리는 흔히 동네의원을 일차의료기관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현재 전문과목이 24개인데 그들 모두 개원을 할 수 있고, 그렇다면 모두가 지역에서 의료기관을 설립할 수 있기 때문에 일차의료기관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일차의료의 정의에 원론적으로 맞추기 위해 포괄성을 가진 진료를 하는 가정의학과만 해당할까? 그도 아니면 내과, 소아청소년과까지 포함시킬까? 아무도 답을 안 했고, 의사협회도 문제의식이 없다. 책임 있는 단체들이 관련한 논의를 하자고 한 적도 없다.

사실 주치의제도는 그 이후의 문제라고 봐야 한다. 한국의 현실을 분석하고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어떠한 일차의료를 구현할 것인지 지혜를 모아야 한다. 주치의제도는 일차의료 중에서 등록 과정을 통해 일차의료의 핵심 중 하나인 지속적 의료(continuity)를 갖게 하면서 일차의료와 전문 의료를 조화시키는 제도이다. 한국처럼 일차의료기관끼리, 일차의료기관과 대형병원 간에 무한 경쟁을 오래도록 해온 나라에서는 잘 이해를 못할 수도 있다. 내 몸을 괴롭히는 통증도 어느 덧 오랜 시간이 지나다보면 익숙해져서 내 몸의 일부처럼 인식되어버린 탓일 수도 있다. 통증이 사라지면 오히려 불안하거나 허전할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것을 관습이라고 한다. 좋은 관습이면 좋겠지만 우리의 일차의료 환경이 정립도 되어 있지 않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있는 나쁜 관습인데도 벗어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현재의 상황을 개혁한다는 것이 불안하다. 물론 이제까지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재정에 대한 준비 없이 의료제도 개혁을 하려고 했던 사례들이 있기는 하지만 논외로 하고, 우리 내부에 있는 불안이 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박형욱 교수님의 연이은 칼럼들은 바로 그러한 점을 지적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맙다. 우리 내부의 불안을 드러내줬기 때문에. 정신의학에서는 이것을 치료의 시작 혹은 예후가 좋은 징조라고 한다.

박 교수님의 말처럼 주치의제도는 환상적인 제도가 아니다. 어디 완벽한 제도가 있겠는가? 하지만 주치의제도를 하는 나라 주민이든지, 그 나라에서 살다가 온 사람들의 얘기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을 텐데, 그들이 경험한 주치의제도가 나쁘다는 평가를 들어본 적이 없다. 다만 불편한 점들은 있다고 한다. 웬만하면 약을 잘 처방하지 않는다든지, 항생제도 엄격하게 처방한다든지, 예약을 통해 진료를 받으니 좀 불편하다든지 이 정도들이다.

일차의료가 발달되거나 주치의제도를 하는 나라들은 수십 년 동안 지나면서 계속 관련 정책을 바꿔 왔다. 그 방향은 주민들의 선택권 확장과 불편함 해소, 의료의 평등성 확보이다. 그래서 영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주치의 등록을 할 때 한 명의 의사가 아니라 여러 의사들에게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그렇다고 무한정 하는 것은 아니고 스스로 조정 기능을 가지므로 대게 90퍼센트는 원래의 주치의에게 등록을 한다. 진료 시간도 아침 8시에서 저녁 8시까지 하면서 직장을 다니거나 바쁜 주민들에게 진료를 받을 기회를 넓혀준다. 물론 공동개원 형식을 권장하기 때문에 가능하지만 말이다. 그에 대해 정부는 정규 시간외 진료 수가를 책정한다. 낙도나 의료 소외 지역의 주치의 활동에는 아주 높은 수가를 매겨서 지역적 불평등을 없애려고 하는 것도 있다.

이 모든 정책들이 오래도록 변화를 해온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 속에서 일차의료 전문의들의 소신 진료 영역도 커졌고, 수입도 늘어서 만족할 정도이다. 한국은 얼마나 변했을까? 새로 개원할 의사들에게는 지역 정부나 위원회에서 인구당 의사 수를 고려해서 개원 여부를 협의해 준다. 이미 주민들이 등록을 다 해버려서 신규 개원 의사는 불리할 것 아닌가, 라는 우려는 그 나라들에서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잖아도 일차의료전문의들이 부족하다고 하기에 새로 나서는 의사들이 개원하기가 힘들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한국은 동네 상점보다 의원이 많다고 하지만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러 전문과들이 많은 것이지 일차의료에 합당한 의원들이 많은 게 아니다.

그렇다면 개원해 있는 전문의들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그것은 또 전문의제도의 효율적인 운영에 관한 문제이다. 그에 대한 해결 방법도 말하고 싶지만 지면 관계상 다른 기회로 넘기고자 한다. 아무쪼록 이번 기회를 통해 너무 늦기 전에 일차의료의 정의부터 의료기관 분류, 전문의 제도 등 전반에 관한 논의가 제대로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는 현재의 저수가 문제를 일차의료 문제 해결의 핵심으로 내미는 경향이 있는데, 전문가 집단으로서 의사들이 먼저 국민들에게 좋은 제도를 만들어서 제시해야 하는 것이 순서라고 본다. 적절한 수가나 의사들에 대한 처우는 그 뒤에 따라오리라고 확신한다. 이 시작을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함께 고민하자는 박 교수님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재청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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