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에 대한 안전성·유효성 검사하지 않는 식약처 규정 지적…“더이상 피해자 없기 바랄 뿐”

“한약은 왜 안전성·유효성 심사 대상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식용 불가능한 숯가루와 전문의약품 성분이 포함된 가짜 한방 당뇨약을 복용했던 A씨가 기자와 통화에서 처음 건넨 말이다.

지난 2008년 3월 당뇨병 진단을 받은 A씨는 당뇨 치료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치료법 등을 찾아보다가 눈이 번쩍이는 언론 보도를 접하게 됐다.

한의사 J씨가 만든 한방 당뇨약을 먹으면 당뇨를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고, 복용 후 수일 내에 당뇨수치가 정상적으로 조절된다는 내용의 보도였다.

평소 한의사와 한약에 대해 신뢰하고 있던 A씨는 곧바로 J씨가 운영하는 강남 Y한의원을 찾아갔다.

2008년 9월, 그렇게 A씨와 가짜 한방 당뇨약과의 악연이 시작됐다. A씨는 한두 달에 한 번씩 Y한의원에 내원해 진료를 받고 당뇨약을 수령했다.

하지만 특별한 진료는 없었다. 집에서 측정하는 수준의 혈당 수치 확인을 한 후, 미리 제조된 환 형태의 가짜 한방 당뇨약을 내어줄 뿐이었다.

그렇게 9개월 가량 Y한의원에 다니던 A씨는 J씨에게 “집과 한의원 간의 거리가 멀어 오가기 힘들다”고 토로했고, J씨는 계좌에 약값을 입금하면 택배를 통해 집에서 당뇨약을 받아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후 A씨는 2009년 5월경부터 2010년 말경까지 4차례에 걸쳐 P씨 명의의 계좌로 돈을 보냈고 택배를 통해 당뇨약을 전달받았다.

그러던 2011년, 계속 택배를 통해 당뇨약을 받는 것이 꺼림칙해진 A씨는 다시 Y한의원에 내원해 당뇨약을 수령했다.

그렇게 4년가량이 흐른 2015년 8월경 A씨는 당뇨약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당뇨약을 먹을 때마다 손과 입 주위에 까만 가루가 묻는 것이었다.

A씨는 Y한의원에 전화로 이 같은 상황을 설명했고 한의원 직원은 ‘당뇨약을 만들 때 숯가루를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러던 2016년 5월 30일, A씨는 충격적인 언론 보도를 접하게 됐다. 한의사 3명이 식용 불가능한 숯가루와 한의사가 사용할 수 없는 전문의약품 성분이 포함된 의약품 원료로 가짜 한방 당뇨약을 팔다가 적발됐는데, 그중 한 명이 J씨였던 것이다.

당시 이 사건을 적발한 서울특별시 특별사법경찰단에 따르면 J씨 등 한의사들은 중국에서 ‘메트포르민(Metformin)’과 ‘글리벤클라미드(Glibenclamide)’ 등 전문의약품 성분이 포함된 의약품 원료를 불법으로 수입해 가짜 한방 당뇨약 3,399kg을 제조했고, 당뇨병 환자 1만3,000여명에게 이를 판매해 38억원 상당의 수익을 남겼다.

이 사건으로 J씨는 보건범죄단속에관한특별조치법위반(부정의약품제조등) 등 혐의로 기소됐다.

A씨는 곧바로 Y한의원, 강남구보건소, 보건복지부 등에 전화를 걸어 “당장 가짜 한방 당뇨약을 구입한 환자들에게 이를 복용치 말라고 통보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이를 수용한 기관이나 단체는 없었다.

“강남구보건소 관계자는 ‘왜 다른 환자들은 가만히 있는데 당신만 그러냐’고 오히려 면박을 줬어요. 보건복지부는 30여 차례 전화 끝에 겨우 통화를 했지만 확실한 답변을 듣지 못했어요. 강남경찰서는 '수사대상이 아니다. 변호사에게 상담을 받으라’고 서류접수 조차 반려했어요. 모든 기관이 J씨에 대한 정보를 개인정보보호라는 이유로 알려주지 않아 수사진행 상황은 물론 주소, 주민등록번호, 휴대폰 번호 등을 알지 못해 고소를 할 수도 없었어요. 제가 피해자인데도 말이죠.”

A씨가 지난 8년여 간 약값으로 J씨 등에게 지불한 금액은 총 331만원. 하지만 금전적인 피해보다 더 큰 피해가 있었다. 당뇨를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발생한 치과 질환으로 10개가 넘는 치아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 지난 1월 17일, A씨는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J씨를 사기죄로 고소했다.(사건은 J씨 주소가 부산으로 돼 있어 부산지방검찰청으로 이관돼 수사 중이다)

또 지난 4월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제기하고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던 지난 18일, 서울서부지방법원 형사합의11부는 J씨에게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 벌금 36억6,000만원을 선고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A씨는 정부기관과 관련 단체들을 불신하게 됐다.

“1만3,000여명이 한의사들에게 속아 가짜 한방 당뇨약을 복용해 피해를 입었는데 어느 누구도 환자들에게 이를 알리려는 곳이 없어요. 오히려 ‘어떻게 알았냐’, ‘우리 소관 업무가 아니다’라는 말만 반복했죠. 앞으로도 다르지 않을 거라 봐요.”

특히 한약서에 등재됐다는 이유로 한약에 대한 안전성·유효성 검사를 진행하지 않는 식품의약품안전처 규정에 대해서는 큰 우려감을 나타냈다.

“한의사가 10년 가까이 전문의약품 성분이 포함된 한방 당뇨약을 팔았는데도, 단 한 번도 안전성·유효성 검사를 받지 않았어요. ‘한약(생약) 제제 등의 품목 허가 신고에 관한 규정’에 따라 ‘동의보감’에 등재된 처방에 따른다는 이유로, 검사가 면제된 것 같아요. 4백여 년 전 만들어진 동의보감에 등재됐다는 이유로 안전성·유효성 검사를 하지 않는 게 말이나 됩니까. 환자들은 계속 한방 당뇨약에 포함된 성분도 모른 채 약을 먹어야 하나요.”

A씨는 동의보감, 본초강목, 향약집성방 등 ‘한약조제지침서’에 기재된 한약의 경우 안전성·유효성을 면제해주는 식약처 고시에 대해 위헌 여부을 다투는 헌법소원을 제기하려 했으나 과학중심의학연구원 등이 먼저 비슷한 내용의 헌법소원을 제기해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한의학과 한의사, 한약을 신뢰하고 제 건강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원했을 뿐이에요. 하지만 한의학과 한의사에 대한 무한 신뢰가 저의 큰 실수였던 것 같아요. 속았다는 생각에 화도 나고, 건강을 회복할 시기를 놓쳤다는 자책감도 들어요. 헌법재판소가 과학중심의학연구원에서 제기한 헌법소원에 대해 올바른 결정을 내려줬으면 해요. 그 결과가 나올 때까지 안전성·유효성 검사를 받지 않은 한방의약품으로 인해 피해보는 환자들이 생기지 않길 바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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