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고대안암병원 외과학교실

유난했던 2016년 여름의 뜨거움이 가실 무렵, 서른아홉의 나이에 첫딸을 얻었다. 워낙에 결혼이 늦었던 것이 노산의 큰 원인이다. 허나, 한 차례 유산을 겪고 1년 넘게 다닌 난임클리닉의 시술들에서 모두 실패하면서, 서른여덟 겨울을 맞이할 무렵, 나는 마흔 전에는 출산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몹시 초조해졌다. 그리고, 임신과 출산을 위해서 일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재수, 유급 한 번 없이 교수가 되기까지 쉴 새 없이 달려온 외과의사로서의 삶에 나름 인생의 큰 쉼표를 찍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퇴직하기로 마음을 먹자마자 자연임신이 되었다. 2016년 한 해의 유일한 목표는 건강한 아이 출산하기였다. 그리고 나는 원하고 원하던 아이를 얻었다.

처음 태어난 아기는 온 몸엔 태지가 덕지덕지하였고, 얼굴엔 하얀 피지가 쫙 깔려있었으며, 피부는 새빨간 것이 쭈글쭈글 못 생기기 이를 데 없었다. 사람들이 ‘축하해, 아기 너무 예쁘지?’ 이렇게 묻는 말에 대답도 잘 못 할 정도로 나는 못나 보이는 아기 얼굴에 당황스러웠고, 마치 내 아기가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면서 아기의 모습은 변하였고, 나 역시 아기의 모습에 익숙해져갔다. 아기를 안고 조리원을 퇴소하여 집에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아기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나는 아기에게 정이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가 보여주는 베냇짓 하나에도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다니. 아이를 바라보는 문득문득 이 작은 생명체로부터 피어나는 사랑스러움에 새삼 놀라게 되었다.

두 달째가 지나면서 딸아이는 엄마인 나를 알아보는 듯 했다. 베냇짓이 아니라, 내 얼굴을 알아보고 방긋방긋 웃음을 지어줄 때면 나는 아이의 웃음에 마치 홀리는 듯 했다. 품에 안고 젖을 먹일 때는 종종 TV를 시청하곤 하였는데, 이는 조리원에서부터 젖 먹이느라 15분 이상 아이를 안고 있는 시간이 무료하여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던 것으로부터 시작된 습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TV프로그램을 보면서 신나게 웃다가 우연히 내 품 속에서 젖을 먹는 딸아이를 내려다보았는데, 순간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이는 입으로는 열심히 젖을 빨면서 눈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눈이 마주쳤다는 듯이 활짝 웃으면서 오물거리는 입과 함께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나와 눈이 마주치기를 기대하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이 무심한 엄마가 TV에 관심이 팔려 젖만 내어주고 있는 동안, 아기는 나만 바라보면서 자기를 보아주길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에 너무나 미안할 뿐이었다.

조그마한 손과 발, 눈, 코, 입을 바라볼 때면 아기라는 존재가 얼마나 여린지, 그리고 울음이라는 표현법 하나로만 누군가의 보살핌을 이끌어내야 하는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고, 그 사실에 마음이 아파온다. 또, 그만큼 아이를 잘 돌봐야한다는 책임감과 사랑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면서, 이런 게 모성애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올해 너무 자주 들려오는 계모 계부의 아동학대, 어린이집 아동학대 뉴스를 접할 때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어떻게 이렇게 작고 약한 존재에게 그런 나쁜 마음이 먹어지는 걸까, 내 자식이 아니면 가학성이 발휘되는 동물의 본성이 어쩔 수 없이 인간에게도 남아있는 걸까, 혼자 별 고민을 다 해 보곤 한다. 하지만, 내가 만났던 한 환자와 가족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이내 내가 낳지 않아도 아이를 사랑으로 대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면서 고개가 저어질 수밖에 없다.

외과 전공의 1년차 중반 무렵, 한 달간 혈관외과 분과의 주치의를 맡게 되었던 때였다. 응급실로 복부대동맥류가 파열된 80세의 할머니가 오셨었다. 응급실로 모여든 가족들은 자식들과 손자손녀들로 어림잡아도 스무명은 되어보였는데, 그야말로 울고불고 할머니 살려내라고 난리였다. 할머니를 살려내는 치료는 복부를 개복하여 터지고 커져있는 대동맥 부분을 잘라내고 인공혈관으로 치환하는 수술이었는데, 수술 자체도 크고 복잡한데다 80세의 고령이었으므로, 전신마취 및 수술의 위험도와 사망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였다. 이 점에 대해서 수차례 강조를 하며 설명을 드렸지만, 보호자들은 무조건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하여 할머니를 꼭 살려달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의사의 입장에서 사실 이런 보호자들이야말로 가장 고마운 분들이다. 그야말로 우리 의료진은 돈이나 다른 걱정 없이 최선을 다하면 되니까 말이다.

입원, 수술을 위한 처방을 전산입력하고, 수술, 마취 관련 동의서 작성을 위하여 보호자들에게 다시 한 번 수술에 관한 설명을 할 때였다. 우리 몸에서 가장 굵은 혈관인 대동맥을 수술하는 만큼 출혈이 될 때는 그 압력으로 인해 피가 천정을 칠 수도 있고 이 급박한 순간에는 긴급 수혈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수술 전 준비로 수혈 처방을 20/20/20, 즉, 적혈구, 혈장, 혈소판을 각각 20 파인트씩으로 준비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런 내용의 출혈 위험성과 수혈 가능성에 대해 설명할 때 갑자기 보호자들이 웅성웅성 거리기 시작하였다. 이왕 수혈이 필요하다면 가족들이 헌혈을 하여 할머니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시라고 보호자들을 진단검사의학과로 안내해드렸고, 나는 여전히 수술 준비로 응급실에서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진단검사의학과에 갔던 보호자들이 우르르 응급실로 다시 돌아왔는데, 정말 서럽고도 크게 흐느끼면서 응급실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줄줄이 들이닥치는 보호자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보호자들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내게로 다가와서는 하소연하듯이 이런저런 말들을 내뱉기 시작하였다. “엄마가 우리를 어떻게 돌보셨는데...”, “아이고,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가 하필이면 피가 왜....수혈도 못 해드리고...”. 보호자들이 산발적으로 내뱉는 말들을 하나둘씩 주워들으면서 나는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게 되었다. 할머니의 혈액형은 Rh-였고, 그 중에서도 수혈받기 가장 어려운 O형이었다. 혈액형 검사 결과가 전산으로 넘어와 내가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보호자들은 검사실에서 먼저 혈액형 검사 결과를 듣고 온 것이었다. Rh-가 열성 유전이기 때문에 자녀분들이 모두 Rh+이고, 따라서 수혈이 불가능할 수도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에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그 순간 내 머리속은 도대체 Rh- O형을 20팩 씩 어떻게 확보하지 하는 난감한 생각으로만 가득할 뿐이었다.

그런데, 좀 더 보호자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가 자식분들의 친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온 자식들이 서럽게 울고불고 하는데!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둘째 부인으로 들어온 할머니와 전처의 자식들이었던 내 앞의 보호자들이 수십 년을 함께 지내는 동안, 자녀분들은 할머니가 당신들의 친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고 지냈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친자식도 아닌 보호자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자녀분들에게 할머니는 그냥 그분들의 너무나 소중한 '엄마'가 되셨던 것이다. 보호자들은 다행히도 80세까지는 건강하게 지내셨던 할머니 덕분에 할머니의 혈액형을 지금껏 모르고 지내오셨고, 할머니가 수혈을 필요로 하는 이 긴박한 순간에 아무도 헌혈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너무 서러우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 친어머니도 아니었던 할머니께 받았던 큰 사랑과 보살핌을 다시금 깨닫고 본인들도 놀라, 앞으로 어쩌면 그 큰 은혜를 갚을 날이 없을 수도 있다는 슬픔에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나는 발끝에서부터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이 올라와 내 몸을 훑는 것 같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정말 이런 사연이 가능한가. 새엄마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진짜 엄마, 자식 간으로 지내는 것이 진짜 가능한가 싶어 멍해질 뿐이었다.

눈물바다인 보호자들에게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집도의를 도와 수술과 술 후 치료를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수술장에 들어갔다. 사실 전공의 1년차는 이런 큰 수술에 보조로 들어갈 수 없는, 이른바 짬밥이 안 되는 위치였는데, 마침 여름휴가를 떠난 수석 전공의를 대신할 인력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제1조수로 수술을 들어가게 되었다. Rh-O형의 피는 구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늦은 저녁 수술이 시작되었는데도, 퇴근을 미룬 진단검사의학과 교수님이 직접 수술장으로 전화를 하셔서 내게서 상황을 전해 들으시고는, 최선을 다해 전국에 혈액을 수배해서 준비해 볼테니 수술 잘 하라는 격려를 해 주셨다. 그 때까지 실제로 구해진 피는 없었지만, 진단검사의학과의 든든한 지원 약속에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위안과 믿음을 갖고 수술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집도를 맡은 교수님께서 수술 직전에 물어보셨다.

“자네, 대동맥류 수술 본 적 있나?”

“없습니다. 처음입니다.”

“그래? 그럼 마음 단단히 먹으라구. 가자, go to the hell!"

Go to the hell이라니, 안 그래도 자질도 안 되는 초짜 나부랭이가 이런 큰 수술에 제1조수로 나선다는 사실에 겁이 나는 마당에, 교수님이 농담이 아닌 정말 지옥문을 여는 영웅 같은 표정으로 결연하게 수술에 임하시니 나는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진짜 한마디로 잔뜩 쫄아 있었다. 보호자들의 부탁으로 할머니를 반드시 살려서 수술장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마음속으로 교수님을 응원할 뿐이었다. 수술이 시작되자 나는 너무나 긴장되었다.

“숟가락!” 대동맥류를 싸고 있던 막을 제거하면서 모두가 긴장해있던 순간, 교수님의 입에서 내뱉어진 말이었다. 초짜인 내 눈에도 갈색 지저분한 뭔가가 가득 들어차있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다. 이어 수술실 보조 간호사의 손을 통해 전해진 숟가락으로 대동맥류 주변의 피 떡 덩어리를 긁어내시면서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야~살았다. 다행히 새어나온 피가 다 굳어있네. 수혈은 어쩌면 필요 없겠는걸?” 수술장 기구 중에 숟가락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충격의 한편으로 할머니는 사실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에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술이 끝난 후, 할머니는 장맛비로 오랫동안 중환자실에 계셨어야 했지만, 결국 보호자들과 함께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실 수 있었다.

할머니는 이후에도 자식들과 손녀손자들과 행복한 삶을 사셨을까. 나는 딸아이를 낳은 이후 그 할머니 생각이 자주 난다. 도대체 얼마나 전처의 자녀들을 사랑으로 품었기에 새엄마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없었던 일처럼 되었을까. 만약 딸아이를 낳고 얼마간 키워본 지금, 다시 그 날의 응급실에서 보호자들의 울음바다 속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더라면 아마도 나는 눈물을 퍽 쏟아버렸을 것 같다. 자식이라는 존재의 소중함과 그런 존재를 내 안에 품을 때 느껴지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절절함, 때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흘러나오는 눈물의 존재를 늦은 나이에, 이제 나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자식을 품는다는 것. 내겐 너무나 감사한 일이고 축복이며, 그러나 무겁고도 엄중한 책무이다.

퇴직하고 1년 남짓 기간 동안 쉬다가 새로운 병원으로 첫 출근을 한 날, 한미수필문학상 수상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너무 기분이 좋았고,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는 듯 한 계시처럼 느껴졌어요.

게다가 이번 수필은, 마감일 하루 전날, 아기 기저귀 값도 벌 겸, 그리고 곧 일 시작하는 저를 대신하여 아기를 돌봐야하는 남편 연습을 시킬 겸, 어느 병원의 주말 응급실 당직을 서면서 아기가 너무 보고 싶은 마음에, 밤부터 새벽까지 환자가 뜸한 틈을 타서 짬짬이 작성한 것을 보낸 것이었는데 예상외로 수상까지 하게 되어서 더욱 기쁩니다.

가끔 글 좀 써 보겠답시고 컴퓨터 앞에 앉아 또각또각 소리 내고 있으면, 외국인인 남편이 다가와서 '너 뭐하는 거니?'하고 물어보곤 했습니다.

옆에 와서 한참을 봐도 뭔가를 쓰고 있긴 한데, 논문은 아니고, 이메일도 아니고. 그런데 자기는 한글을 잘 못 읽고 내용도 파악이 안 되니까요.

'내가 예전에 만났던 환자 이야기나 병원 생활에 대해서 수필 작성하는거야'라고 대답하면, '뭐? 회고록을 쓴다고? 넌 그런 글 쓰기엔 너무 젊은 것 아니야?'며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었답니다.

'나이가 젊다고 기억나는 일화를 글로 못 남기는 건 아니잖아'라고 대꾸해도, ' You are weird'라고 하면서 이상한 사람 취급을 했었답니다.

그런데, 이번에 수필로 상을 타게 되었다고 하니까, 정말 의외라는 듯이 놀라더라구요.

저는 이번 수상의 기쁨을 누구보다도, 건강하게 태어나주었고,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는 저의 예쁜 딸아이와 다시 일을 시작한 저 대신, 육아휴직을 내고 딸아이를 돌보고 있는 고마운 남편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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