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야 산다④ 부산대병원, 국내 최초 왓슨 온콜로지·지노믹스 모두 도입

혼돈의 병신년(丙申年)이 지고 정유년(丁酉年) 새해를 맞았지만 대내외적인 상황은 여전히 녹록치 않다. 많은 기업들이 새해를 맞으면서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며 변화와 혁신을 강조했다. 이는 의료계도 마찬가지다. 청년의사는 새로운 시도로 변화를 추구하는 사례들을 찾아 그들의 노하우를 공유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부산대병원은 부산·경남권을 대표하는 병원으로 꼽힌다. 1,400여 병상 규모에, 한해 방문하는 외래환자 수만 80만명을 웃돌 정도로 환자들도 많다. 그만큼 이 지역에서 부산대병원의 입지가 공고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부산대병원이 최근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인공지능(AI)을 진료현장에 도입한 것이다. 그 시작은 KTX를 타고 수도권으로 원정진료를 떠나는 환자들을 붙잡아 보자는 고민에서 출발했다.

부산대병원은 지난 1월 25일 IBM 왓슨 온콜로지와 왓슨 포 지노믹스를 도입해 유방암 환자를 대상으로 진료 시연을 했다.

서울로 서울로…한해 진료비 절반은 타 지역에서 유입

지난해 9월 부산대병원에는 정밀의료센터가 들어섰다. 4차 산업혁명 등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춰 차별화된 의료서비스, 특히 지역 거점 정밀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이어 올해 1월에는 IBM의 ‘왓슨 포 온콜로지(Watson for Oncology)’와 ‘왓슨 포 지노믹스(Watson for Genomics)'도 도입했다. 지난해 가천대 길병원에서 왓슨 포 온콜로지를 도입했지만, 유전체 데이터를 분석하는 왓슨 포 지노믹스까지 도입한 것은 국내에서는 부산대병원이 최초다.

부산대병원은 왓슨을 활용해 유방암, 위암, 대장암, 폐암 등을 진료하고 있다. 주로 암 분야 다학제위원회를 중심으로 왓슨이 제공한 정보를 활용하고 있지만 개별 의료진도 언제든지 왓슨을 이용할 수 있다.

부산대병원은 다학제위원회가 아닌 의료인들도 개별적으로 왓슨을 활용할 수 있도록 6개월이 넘는 시간을 내부 의료진과 지원 인력 교육에 주력했다. 또 기존 진료 정보를 활용해 모의 테스트도 했다.

부산대병원이 왓슨을 도입한 가장 큰 이유는 지역 환자들의 원정진료 때문이다. 사실 암과 같은 중증질환을 비롯해 심지어 만성질환 환자들까지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원정진료를 떠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부산대병원만의 문제도 아니다.

2015년 전체 진료비(64조8,300억원)의 51.5%(33조4,167억원)는 환자들이 다른 지역에서 쓴 진료비였다. 이중 서울대병원 등이 있는 서울 종로구로 유입되는 비용이 가장 많다는 분석 결과도 나왔다(국민건강보험공단의 ‘2015년 지역별 의료이용 통계연보’).

부산대병원 정주섭 정밀의료센터장

이에 부산대병원은 수준 높은 의료서비스로 승부를 보기로 했고, 왓슨 도입도 그 차원이다.

부산대병원 정주섭 정밀의료센터장은 “지역 내 환자들이 KTX를 타고 서울에 가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왓슨을 도입한 것도 환자들이 신뢰를 바탕으로, 안심하고 지역 내에서 적기에 최상의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사명감 때문”이라며 “그간 꾸준히 의료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을 해왔고, 최근 화두로 떠오른 4차 산업이 그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미국에서 이미 도입하고 있는 AI 분야에 우리가 먼저 발을 내딛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부산대병원이 왓슨을 도입했다는 소식에 의료인들은 물론 전국에서 환자들의 문의가 이어질 만큼 관심이 뜨겁다.

온콜로지로 못다 푼 숙제, 지노믹스에 기대

부산대병원은 왓슨을 환자 진료뿐만 아니라 연구에도 적극적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일차적으로는 온콜로지를 통해 복잡한 암을 진단하고, 치료할 때는 임상가이드라인에 기초한 최신 정보를 반영할 수 있다. 만약 암이 재발하거나 전이된 환자에 대해 온콜로지로 치료 옵션을 제공받을 수 없다면, 지노믹스를 사용해 유전자 서열과 의학정보를 분석해 맞춤형 치료를 제공받을 수 있다. 즉, 왓슨은 보다 많은 암 환자들에게 진료의 정확도와 치료효과를 높여주고, 진료를 보는 의사에게 방대한 분량의 연구결과와 데이터를 단시간에 제공하는 진료 보조 역할도 하고 있다.

특히 온콜로지와 지노믹스 두 가지 방식이 결합된 왓슨은 임상적으로 유용한 데이터를 제공하기에 그 가치가 높다. 정주섭 센터장은 “왓슨은 연구를 목적으로 도입하는 만큼 병원 내 연구비 예산이 투입됐다. 진료할 때 의료진이 할 수 있는 오류를 막고 유전체 정보나 AI관련 연구 과제를 공모해 논문을 쓸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방암 환자 진료시 왓슨 온콜로지를 활용하고 있는 모습(왼쪽부터 황유경 간호사, 강태우 교수).

환자 당 진료시간 30분...그래도 왓슨 때문에 즐겁다

왓슨은 벌써부터 병원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의료진 사이에서 AI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지만, 이제는 의료진 간 협진이 강화되고 연구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는 게 병원 측 설명이다.

현장에서 왓슨을 가장 많이 활용하고 있는 유방외과 강태우 교수는 “왓슨을 진료에 활용하려면 환자 1명을 진료하는 데 20~30분씩 걸리는 게 예사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서 힘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변화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부산대병원 유방외과 강태우 교수

현재 왓슨은 다학제 진료를 통해 의료진 간의 이견이 있거나 왓슨의 플랫폼에 맞는 경우에 한해 제한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왓슨을 활용하기로 결정되면, 사전에 온콜로지에 환자의 기본 정보와 질환정보를 입력해 적합한 치료방법을 조회한다. 왓슨은 수많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추천하는 치료’, ‘해 볼만한 치료’, ‘하지 말아야 할 치료’에 대한 정보를 준다. 그러면 의사는 그 중 국내 허용되는 치료인지, 사용되는 약제인지, 급여는 되는지 등을 따져서 최종 의사결정을 한다.

왓슨의 자연어 인식 기능을 이용, 환자 진료 경과기록지를 입력해 의료진과 간호사 등이 환자 정보를 직접 입력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최소화 했다. 하지만 여전히 외국어로 표기되고 건강보험제도 등 한국 현실이 고려되지 않는다는 어려움도 있다.

강태우 교수는 “왓슨 진료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진단과 수술 후 다학제 진료를 열어 조직검사 결과와 환자 상태를 설명하고, 주치의가 생각하는 치료방향을 설명한다. 이후 왓슨에서 정보를 조회했을 때 큰 틀의 치료방향에 차익 있는지를 본다”면서 “왓슨은 주로 현재 많이 쓰이는 항암제 등을 제시하는데, 우리나라의 문화적 또는 인종 차이를 감안해야 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예를 들어 왓슨이 최우선으로 추천한 결과라고 하더라도 국내에서는 건강보험 적용이 되지 않아 약값으로 1,000만원이 든다고 하면 쉽게 선택할 수 없다”면서 “국내에서 쓰지 않는 약제이거나 수십년 전에 썼던 약제일 경우, 그 이유나 배경을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도 왓슨이 제공한 정보는 의사에게 진료의 정확성을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되고, 치료가 어려운 환자의 유전자 분석을 통해 제2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게 강 교수의 설명이다.

강 교수는 “인공지능은 재미있고 도움이 되는 도구다. 무한한 가능성도 가지고 있어 우리 병원 시스템에 잘 활용해 암 재발이나 치료방법이 없는 환자들을 위한 맞춤형 치료법을 찾을 수 있다”고했다.

부산대병원의 진료정보, 정책 입안에 활용될까

부산대병원은 빠르면 2년 뒤 왓슨을 활용해 진료한 사례들을 분석해 전문가들에게 공개할 계획이다. 과연 인공지능 적용 전과 후 의료진의 진료 행태 차이가 얼마나 있는지, 왓슨으로 본 국내 의료정책의 개선점은 무엇인지도 도출할 수 있다.

부산대병원은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그리고 한국 의료의 발전을 위해 인공지능을 활용한진료 데이터를 분석할 계획이다. 정밀의료센터가 진행하고 있는 차세대염기서열분석기법(NGS) 기반 연구에도 왓슨이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를 통해 돌연변이 유전자에 대한 최적의 표적 치료제를 찾을 때 부산대병원은 부산, 울산, 경남 지역에서 선두 주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다.

정주섭 센터장은 “비록 지금은 진료 시 의사 판단에 대한 재확인을 하는 정도로 큰 변화는 없지만, 앞으로 왓슨을 활성화 하면 지역을 거점으로 다른 병원들도 인공지능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며 “병원 데이터가 쌓이면 오히려 서울 지역에 있는 의료진이 부산으로 와서 연구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국립대병원으로서 쌓은 데이터는 보건복지부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활용할 데이터가 될 수 있고 국가가 보건의료정책을 입안하는 데에도 선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날을 기대해 본다”고 말했다.

부산대병원이 왓슨이라는 날개를 달고 어디까지 날아오를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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