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영의 모노태스킹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영어는 족쇄다. 영어를 잘하기 위한 한국인들의 노력은 눈물겹다.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배우고, 초중고생은 물론 대학생들도 학원에 다닌다. 직장인들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없으면 전화나 인터넷을 통한 공부라도 한다. 영어라도 잘하면 뭐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기러기 아빠가 되는 사람들도 많다. 영어 못해서 겪은 설움 한 자락 없는 사람이 없고, “내가 영어만 좀 잘했더라면…”이라는 말은 “내가 왕년에…”와 더불어 가장 부질없는 넋두리 중 하나다.

과연 그럴까? 우리가 영어‘만’ 좀 잘했더라면 ‘훨씬’ 잘 먹고 잘 살았을까? 영어만 좀 더 잘했더라면 지금 우리가 이룬 경제성장보다 더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뒀을까? 지금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영어 잘하는 한국인이 많으니, 앞으로 우리나라는 더욱 더 잘나가게 될까?

다른 능력이 별 볼일 없어도 영어만 할 줄 알면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일부 직종에서는 여전히 영어를 잘하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하지만, 대부분의 직종에서 영어는 그저 부차적인 능력일 뿐이다. 사기를 친다면 모를까, 말솜씨가 아무리 뛰어나도 형편없는 물건을 많이 팔 수는 없다. 물건으로든 콘텐츠로든 기술로든, 상대방을 감동시키려면 첫째는 제품 그 자체가 우수해야 한다. 의사소통 능력은 둘째다.

사실 한국인에게 언어 장벽은 때론 보호막이기도 했다. 우리는 영어를 배워 전 세계를 누볐지만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들은 이 나라에 들어와 정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를 언어 장벽 탓으로 돌리면 마음도 편했다. 뭔가 잘 안 풀릴 때마다 “영어만 좀 잘했더라면…”이라는 말로 자위할 수 있었다.

과거에 영어가 그토록 중요했던 진짜 이유는 ‘선진 문물 습득’의 도구였기 때문이다. 유형이든 무형이든 우리의 콘텐츠가 너무도 부족했던 시절, 영어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는 극명했다. 선진국에선 이렇게 한다더라, 이 한마디면 일단 기가 죽었고, 영어만 할 줄 알면 대충 베껴다가 비싸게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는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우리가 가진 콘텐츠가 엄청나게 많아졌고, 우리 콘텐츠에 관심을 보이고 구매를 원하는 외국인도 크게 늘었다. 여전히 영어가 중요하긴 하지만, 과거와 달리 앞으로는 우리의 것을 밖으로 내보내는 수단으로서의 비중이 더 커졌다는 말이다. 단지 언어 장벽 때문에 저평가 당하는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청년의사가 최근 영문매체 Korea Bio Medical Business Review(KBMBR)를 창간한 배경에도 이런 문제의식이 있다. 한국의 헬스케어 분야는 국제 경쟁력이 충분하지만 언어 장벽 때문에 오히려 저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의료기관, 제약/바이오기업, 의료기기업체, 심지어 의료정책까지도, 한국의 헬스케어는 언어 장벽을 넘어 해외로 뻗어나갈 잠재력이 충분하다. 내가 만나본 숱한 외국인들도 한국의 병원/기업/정책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 영문으로 된 정보가 너무 빈약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곤 했다.

KBMBR은 영어를 선진 문물 수입의 도구가 아니라 우리 콘텐츠 수출의 도구로 사용하는 역발상으로 만들어진 매체다. 해외 환자 유치를 희망하는 병원들과 세계 시장을 노리는 기업들에게 든든한 우군이 될 것이고, 한국에 대한 정보에 목마른 외국인들에게는 희귀한 정보의 샘물이 될 것이다.

언제나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을 고민하겠지만,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는 데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언어 장벽을 역으로 활용하여 장점은 과도하게 드러내고 단점은 비윤리적으로 숨기는 일부 사람들(일부 공무원, 일부 정치인, 일부 의료기관, 일부 학자, 일부 국내기업, 일부 다국적기업의 국내법인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에게는 불편할 수 있는 내용들도 가감 없이 소개할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국내의 문제점을 속히 해결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정식 창간을 앞두고 두어 달 정도 파일럿 운영을 해 본 결과, 오랜 궁금증 하나가 풀렸다. 평소 갖고 있었던 “왜 우리나라에는 이토록 영문 미디어가 적을까?”라는 의문의 해답은 간단했다. 해외에 소개할 콘텐츠가 없어서도 아니고 그런 콘텐츠를 원하는 수요가 없어서도 아니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언어 장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시작한다. 21세기 선진 대한민국의 핵심 성장 동력으로 꼽히는 헬스케어 분야에서, 적어도 하나쯤은 영어로 된 미디어가 존재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숱한 시행착오가 예상되지만, 많은 분들의 관심과 지원을 부탁드린다.

우리가 전 세계에 널리 알려 드릴 터이니, 병원들은 의료 서비스의 수준을 더 높이시고, 기업들은 더 좋은 제품들 만드시고, 연구자들은 더 좋은 논문들 많이 쓰시라. 그리고, 외국인들에게 거짓말 많이 했거나 숨기는 것이 많았던 분들은 긴장하시라. (또한 한국말 못하는 기자로부터 연락을 받아도 당황하지 마시라.)

저작권자 © 청년의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