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영 화순전남대병원 외과 교수

1.

땅거미가 내려앉은 어느 늦은 여름날. 다섯 살배기 아들 녀석이 친구네 집에 놀러 간 틈을 타 아내와 함께 동네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살림과 육아에 지친 아내는 모처럼 갖게 된 둘만의 여유에 한껏 흥이 났다. 메뉴판을 이리저리 훑으며 여기가 요즘 뜨고 있는 봉선동 핫플레이스라는 둥 여기 와서는 이 메뉴를 꼭 먹어 보아야 한다는 둥 쉴 새 없이 재잘거린다. 저다지도 행복해 하는데 그 잠깐의 여유조차 쉽게 허락해 주지 못하는 것 같아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부쩍 선선해진 저녁 공기 탓에 여름내 거들떠보지도 않던 핫초코를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불현듯 전화벨이 울렸다.

“병원이야? 무슨 일인데?”

전화만 오면 으레 긴장을 하는 건 나나 아내나 마찬가지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쉴 새 없이 병동과 응급실 콜을 받던 전공의 1년 차 시절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퇴근한 외과 전문의를 콜 한다는 것은 그 경중을 따져 보았을 때 결코 만만치 않은 상황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외과 의사 아내 5년 차의 육감은 전화 받는 목소리와 표정만 보고도 응급 상황인지 아닌지를 단번에 눈치 채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이번엔 내 표정이 어지간히도 애매했나 보다. 전화기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무슨 일이냐며 채근한다. 별 일 아니라며 어물쩍 넘어가려는 부질없는 시도와 약간의 실랑이가 이어진 끝에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고야 말았다.

“스무 살짜리 남자앤데, 군대에서 대장암 진단을 받았나 봐. 응급실로 왔대.”

“저런. 젊은 나이에 안 됐다. 그런데 그게 뭐 그렇게 못할 얘기라고 나한테 숨기려고 그래?”

“……크론병이 의심된대.”

2.

내가 크론병 진단을 받은 건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던 전공의 3년 차 봄이었다. 지난 일년간 세 차례나 항문주위농양과 치루로 수술을 받으면서도 나는 나 자신이 크론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아니, 애써 하지 않으려 했다. 크론병의 진행 과정과 예후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외과 전공의로서는 그것이 속 편한 결정이었다. 크론병 환자의 수술 동의서를 받으면서 기계적으로 주저리주저리 읊어댔던 합병증들이 나에게 닥칠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아 보아야겠다는 큰 결심을 한 건 순전히 아내 때문이었다. 치루가 왜 이렇게 자주 재발하는지 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지 캐묻기 시작한 아내를 납득시킬 만한 설명이 궁색해지던 즈음이었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대장내시경 한 번 받고 깨끗이 털어버리자. 차라리 잘 되었다. 애써 외면했던 마음 한 구석 한 점의 의혹까지 말끔히 지워 버리리라.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가정은 현실이 되었다.

3.

“장루를 꼭 만들어야 하나요?”

응급수술을 앞둔 J의 어머니는 간절한 눈으로 나에게 물었다. 서른 살의 크론병 환자.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을 이 젊은이가 남은 평생 가지고 살아야 할 똥주머니를 만드는 수술에 대해 동의를 요구하는 건 참으로 못할 짓이다. 말단 회장의 크론병이 심해져 소장과 S상결장, 소장과 방광 사이에 이미 누공이 발생한 상태라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충분한 의학적 설명을 했음에도, J의 어머니는 묻고, 또 묻다가, 끝내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내었다.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지금 제일 큰 문제는 당신 아들이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아들을 살릴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모진 말이 턱 밑까지 올라오는 것을 애써 삼켰다. 전화를 드릴 때마다 요즘 몸은 좀 어떠냐, 니 건강이 제일 걱정이다, 몸 챙겨가며 일하라는 말씀을 반복하시는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병실에서 만난 J는 오히려 담담했다. 장루를 만들어야 한다는 설명에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의연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건 분명 어머니 옆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과장된 태연함이었다. 나는 J의 눈동자 속에 드리워진 감출 수 없는 그늘을 보았다. 수술에 대한 두려움. 장루에 대한 거부감. 미래에 대한 절망감. 그 모든 것을 가슴 속에 담아 두고 두 모자는 애써 담담함을 꾸며내고 있었다. 그것은 흡사, 설사와 체중감소로 힘들어 하면서도 난 괜찮으니 엄마 건강이나 걱정하시라며 매번 엄마를 안심시키던, 바로 내 모습이었다. 병실의 무거운 공기를 더는 견딜 수 없어 수술하면 괜찮을 거라는 영혼 없는 위로를 남기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4.

J의 뱃속은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응급으로 말단 S상결장루 조성술과 소장결장 우회술을 시행한 것이 불과 사흘 전이었다. 장의 염증과 부종이 심하다 보니, 우회술로 연결시켜 준 소장과 횡행결장의 문합부가 미처 아물지 못하고 누출이 발생한 것이다. 아직 채 아물지도 않은 복벽에 다시 전기소작기를 가져다 대는 순간, 악취와 함께 복강 내에 고여 있던 대변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절대 동요하지 않으리라 다짐에 또 다짐을 하고 들어왔건만, 허사다. 다양한 종류의 복막염 환자를 마주하면서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났다고 자부했지만, 누워 있는 환자가 크론병이다 보니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 배를 내가 가르는 기분. 내 뱃속에 똥이 새고 있는 듯한 오싹함. 여느 수술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손끝의 미세한 떨림과 터질 듯한 심장박동을 나 자신에게까지 숨길 방도는 없다. 대체 나는 왜 외과 전문의가 되어 또 하필이면 대장항문을 세부전공으로 선택하여 스스로를 옥죄고 있는 것인지. 패혈성 쇼크 상태로 수술대에 누워 있는 환자는 물론이거니와 불현듯 떠올라 집중력을 흩뜨려 놓는 오만 가지 잡생각과도 사투를 벌이고 나니 수술은 무사히 마쳤으나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내일 퇴원하겠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상태가 안정되어 가던 입원 36일째,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져 가는 얼굴로 J가 말했다. 백팔십이 훌쩍 넘는 키에 몸무게가 37킬로그램까지 줄어들어 꺾어 놓은 나뭇가지마냥 침대에만 누워 지내던 중이었다. 패혈증에서는 완전히 회복되어 재활치료와 약간의 영양보충 외에는 딱히 해 줄 것도 없는 상황이긴 하였으나, 길어진 와병으로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면서도 환자 스스로 퇴원을 먼저 요청하다니, 이런 경우는 드물다. 환자의 갑작스런 퇴원 요구에 당황한 나는 원하는 대로 하시라고 더듬대며 겨우 한 마디 내뱉고는 도망치듯 병실을 빠져 나왔다. 병실에 더 머물렀다가는 가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간다니 얼씨구나 좋다는 속내를 들킬 것만 같았다. 한 달이 넘도록 회진 때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스스로를 괴롭히던 복잡한 상념들도 내일이면 거짓말처럼 사라지겠지. 퇴원이라니, 정말 감사한 일이다. J에게도, 나에게도.

5.

옛말에 중이 제 머리를 깎지 못한다고 했다. 외과 의사는 제 몸은 물론이거니와 가까운 가족의 몸에도 직접 메스를 대기를 꺼린다. 환자와의 과도한 교감 때문이다. 어머니의 배를 가르면서도 냉정함을 유지하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상당수의 의사들은 내 가족의 집도의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수술실 밖에서 마음 졸이는 보호자가 되기를 선택한다.

환자와 교감할 줄 아는 의사가 참된 의사다. 의과대학 학생일 때 그렇게 배웠고, 10년여의 아직은 길지 않은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나친 감정이입은 냉철한 판단을 저해한다는 점이다. 매 순간순간 가장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하는 외과 의사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가깝지만 너무 가깝지는 않도록 환자와의 거리를 적당히 유지하는 것. 앞으로 평생 크론병 환자를 다루어야 할 입장에서 짊어져야 할 숙제다.

J가 퇴원 한 달여 만에 60킬로그램이 되어 외래에 나타났을 때 J의 두 손을 맞잡고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지만 끝끝내 참은 것도 환자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무의식의 발로가 아니었을지.

나는 글을 좀 더 잘 쓰고 싶었다. 꼬박꼬박 일기를 쓰던 유년시절부터 결정적인 한 문장을 쓰지 못해 논문을 더 이상 진척시키지 못하고 며칠을 끙끙대기 일쑤인 지금까지, ‘어떻게 해야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라는 물음은 해결되지 않는 삶의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작가들은 나에게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어떻게 사람의 머리에서 이다지도 기가 막힌 수사와 유려한 문장들이 창조될 수 있는 것인가. 내 문장들은 무미건조하고 투박하기 짝이 없는데. 일찌감치 재능 없음을 인정하고 이과로 돌아서길 천만다행이지. 꼭 해야 하는 말만 요약해서 쓰는 것이 몸에 밴 ‘천생 이과생’인 내가 문학을 꿈꾼다는 건 언감생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수상은 더욱 반갑고, 기쁘다.

<교감>은 문학상 공모를 염두에 두고 쓴 글은 아니다. 크론병 환자를 수술하고 치료하면서 느낀 복잡한 감정들을 어떤 형태로든 정리해 둘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썼던 글이다. 사실, 이 글을 한미수필문학상에 응모해 보기로 결정하기까지는 많은 고민과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글을 읽게 될 누군가는 나의 치부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나의 병이 널리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의사도 병도 있고 감정 조절에도 애를 먹는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욕구가 조금은 더 컸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잘한 선택이었다.

수상 소식을 듣고 부모님과 장인, 장모님께서 누구보다도 기뻐해 주셨다. 하지만 내용이 내용인지라, 글을 읽고 괜히 걱정만 더 깊어지시지는 않을까 벌써부터 우려가 된다. 특히 우리 엄마. 오해하지 말아요. 내가 괜찮다고 하는 건 정말 괜찮아서 괜찮다고 하는 거야. 내가 알아서 잘 하고 있으니 엄마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엄마 건강이나 챙기세요.

마지막으로, 남편 하나 믿고 광주까지 따라와 준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 자리를 빌어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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