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성 조선대병원 류마티스내과 교수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의 눈에는 미련이나 원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듯한 한없이 평화롭고 온화한 시선만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말할 힘도 없는 그의 말라버린 입술의 침묵 대신 눈가에 젖은 촉촉한 이슬이 그 동안 고마웠었다고, 그리고 미안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괜찮다고 편히 가시라고 눈빛으로 화답했다. 그 어떤 강렬한 언어보다도 더 훌륭히 공감되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할아버지를 처음 만난 건 10여년 전 나의 내과 전공의 시절, 그가 난치병인 류마티스관절염을 진단 받으면서부터다. 60이 넘은 나이에도 단단하고 다부진 체격에 군데군데 보이는 문신과 강렬한 인상은 한 때 뒷골목을 전전했을 법한 사람이었음을 짐작케 했다. 첫 인상의 예상대로 그는 퉁명스런 말투와 거친 행동으로 가끔 다른 의료진이나 환자들과 문제를 일으키곤 하는 이른바 ‘진상’ 환자였다. 막무가내로 진료 대기 순서를 바꾸어 달라고 난동을 부리기도 하고 진료비가 너무 비싸다고 버티기도 했으며, 약을 먹어도 증상 호전이 없다고 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한번은 정기적으로 주사 치료를 해야 하므로 병원 내 주사실을 이용해야 하는데 간호사가 신참이었는지 여러 번 주사 바늘을 찔러대는 바람에 얼마나 노발대발 화를 냈던지 겁에 질린 간호사가 울면서 찾아 온 적도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보호자라곤 할머니와 어린 손녀딸 둘 뿐, 이들은 할아버지의 행동에 난감해 하며 대신 사과하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는 보호자인 가족들에게도 욕설을 하며 함부로 대하곤 하였지만 할머니는 변함없이 남편을 걱정하고 때론 내게 조심스레 다가와서 비밀스럽게 귓가에 말하곤 하였다.

‘교수님! 사실 우리 영감이 마음은 따뜻한 분이요. 성질이 급해서 그렇지.’

‘그럼요 할머니 저는 괜찮습니다.’

할머니와 손녀딸은 한결 같이 걱정스럽고 애정 어린 눈빛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나는 적절한 거리를 두고 사실 불편한 마음과 원망어린 시선으로 경계하며 진료 하였다. 무리한 요구를 하면 가차 없이 거절하기도 하였으며 때론 큰 소리로 질책하기도 하였다. 사실 수많은 외래환자들을 대하다 보면 너무 힘들기에 왜 하필 저런 환자가 나에게 와서 이러는지 내심 오지 말고 다른 병원으로 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얼마나 세월이 지났을까? 만성질환인 류마티스관절염의 특성상 2~3개월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진료 일정을 잡기에 그런 그와의 만남은 차츰 익숙함으로 변했고, 이 세상에 ‘악인은 없다’고 했던가? 전에 볼 수 없었던 할아버지의 선한 모습을 때론 발견하기도 했다. 때로는 사탕이나 초콜릿을 슬며시 두고 가시는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 물론 가끔씩의 난동은 일상이 되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미운 맘은 어쩔 수 없었다. 어느 덧 미운 정이 들어 버린 것인지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은 빨리도 지나가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항상 따라오시던 할머니는 보이지 않고 손녀딸과 병원을 방문하셨기에 연유를 묻자 1개월 전 갑자기 폐렴으로 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이다. 준비하지 못한 이별에 그토록 당당했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양 어깨는 축 처지고, 목소리에는 힘도 없었으며 얼굴은 수척해져 있었다. 너무 외롭고 힘들어 매일 우울증약을 먹고 할머니 산소에 가서 울고 온다고 하셨다. 나는 상투적인 위로의 말만 되풀이 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그토록 모질게 대했던 할머니에게 너무 의지하며 살아서일까? 슬픔이 너무 큰 나머지 이후 할아버지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전보다 병원에 방문하는 횟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면역력이 약해지셨는지 관절염뿐만 아니라 폐렴으로 수차례 치료 받기도 하셨다. 기침, 가래가 잦아지더니 수개월 전 부터는 숨쉬기가 힘들다는 말씀을 되풀이 하곤 하였다. 여러 조치에도 불구하고 호흡곤란은 점점 심해져 결국 입원 치료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입원 당일 단순 흉부 X-ray 촬영 결과 상태가 매우 심각하여 폐의 컴퓨터단층촬영(CT) 검사를 추가로 시행하였다. 그런데 ‘아뿔사’ 결과는 미만성폐포출혈(Diffuse alveolar hemorrhage)이 강력히 의심되었다. 이는 류마티스관절염 환자에서 극히 드물게 발생하는 합병증인데 폐 전체에 출혈이 발생하여 호흡곤란과 저산소증으로 치료에도 불구하고 사망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질환이다. 유일한 보호자인 손녀딸을 불러 당장 중환자실로 옮겨 기관 내에 관을 삽입하고 기계호흡을 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사망할 수 있다고 설명하는데 한사코 그건 안 된단다. 돌아가셔도 좋으니 함께만 있게 해달라고 고집을 피우다 제발 부탁이라고 애원 까지 한다. 사실 기관 내 삽관을 하고 기계호흡을 하게 되면 환자가 말을 할 수 없게 되고 중환자실로 옮겨야 하므로 보호자들과 격리될 수밖에 없다. 수개월 전 할머니를 비슷한 상황에서 인공호흡만 하다 일언반구 말도 없이 떠나보내고 유일한 혈육인 할아버지마저 그렇게 보내고 싶지는 않다는 거였다. 이런 경우 의사가 의학적 소견에 반하여 보호자의 뜻에 무조건 동의 하기는 쉽지 않다. 의사로서의 윤리적인 의무, 책임뿐만 아니라 자칫 법적인 문제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이전에 이런 부탁을 받는 경우 단호하게 거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의학적으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해봐야 한다는 나의 지속적인 설득에도 불구하고 뜻을 굽히지 않는 손녀딸의 확고함에 나는 많은 고민 끝에 그 뜻을 존중하기로 하였다. 응급상황을 대비하여 병원에 양해를 구하고 2인실로 옮겨 손녀딸과 둘만 있을 수 있게 배려하였다. 기관 내 삽관하여 기계호흡을 안하는 대신 산소 마스크로 대체하여 자유롭게 말씀을 할 수 있게 하면서 경과를 관찰하기로 하였다.

매일 찍는 흉부 X-ray 결과 페음영은 날로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폐출혈이 더 심해져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넋 놓고 있을 수 없어 고용량 스테로이드에 면역억제제, 면역글로불린주사 및 강력한 항생제 등을 추가로 투여했지만 백약이 무효했다. 수시로 드나들며 그의 상태를 주시하였다. 하지만 손녀딸의 지극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상태는 갈수록 눈에 띄게 악화되었다. 의학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너무 힘들어 할 때 진정제를 투여하여 고통을 조금 덜어 줄 뿐 이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차가운 그의 손을 잡고 온기를 전해줄라치면 본인의 운명을 예감하셨는지 내 두 손을 꼭 부여잡고 ‘어째 교수님 힘들 것지요?’ 하고 물으신다. ‘어르신 힘 내셔야지요’라는 의미 없고 습관적인 대답만 할 뿐이다. 그럴 때마다 힘없는 손짓으로 병실 구석에 있는 과자봉지와 음료수병을 가리키신다. 힘들 텐데 먹고 쉬었다 가라는 손짓이다. 그에게는 최선의 배려요 나에게는 과분한 대접이다.

힘들어하는 신체와 달리 마지막을 함께 보내는 할아버지와 손녀딸의 모습은 정말 다정해보였다. 둘만 있을 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는데 본의 아니게 대화 내용을 엿듣게 되었다. 그동안 부모 없이 힘들게 손녀딸을 키웠던 이야기, 젊었을 때의 고생들, 아내에게 너무 모질게 대했던 것, 주위사람들에게 했던 잘못들에 대한 미안함 등을 진솔하게 늘어놓는 그의 표정엔 회한보다는 온유함이 가득했다. 마치 대죄를 속죄하는 고해성사를 마치고 나온 사람의 후련한 표정이랄까? 두 사람의 잔잔한 대화가 이어지는 그 방의 분위기는 참 따뜻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병실을 나오며 손녀딸은 우리 할아버지 힘들지만 않게 해 달라 부탁한다. 그날 밤 그는 의식이 희미해지며 잠꼬대처럼 할머니가 언제 오냐는 말만 되풀이 하였다. 흐려져가는 동공의 초점 속에 그와의 짧지 않았던 인연이 막을 내리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늦가을 밤 겨울을 재촉하는 차가운 바람이 앙상한 가지에 겨우 붙어 있던 마른 나뭇잎들을 우수수 떨어뜨리고 있었다. 바람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다음날 이른 아침 휴대폰 벨이 울렸다. 그 할아버지를 담당하는 내과 전공의 선생님이었다. 슬픈 예감은 항상 비켜가지 않는다. 예상대로였다. 손녀딸은 슬픔 속에서도 그 이별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우리에게 연신 고마웠다는 말만 반복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장례를 치른 지 1주일 쯤 지나서 일까? 여느 때처럼 아침 외래 진료를 위해 앉았는데 진료실 책상 위에 과자선물세트와 음료수 1박스가 편지와 함께 놓여 있었다. 그 할아버지의 손녀딸이 놓고 간 것이다.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할 수 있게 해 줘서 감사하다는 내용과 내가 회진 때마다 과자와 음료수를 받지 않고 나가는 게 마음에 걸려 꼭 전해 주어야 한다는 유언과도 같은 할아버지의 부탁이었다는 내용이었다. 발신지가 하늘나라인 내 생애 첫 선물이다.

의사는 섬세한 감성으로 사소한 일상마저도 특별한 경험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 나의 지론이었다. 힘들어 하는 누군가에게 나를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는 그런 의사이기를 다짐 했던 새내기 의사 시절이 문득 생각났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특별한 것마저도 무덤덤하게 의미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타성에 젖어 내 환자의 죽음마저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결코 짧지 않았던 의사생활, 그동안 수없이 바라보았던 여느 환자들의 죽음과 달리 할아버지와의 이별이 조금은 특별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와 보냈던 시간의 무게? 첫 만남부터 시작된 애증의 관계? 애틋했던 보호자들?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던 치료과정? 물론 그런 배경들도 일조하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시선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섬세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된 그 시간과 기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것은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 시간은 어느덧 무뎌진 내 마음의 눈을 다시 크게 뜨라고 재촉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진 그 시간에 감사하다.

연구실 블라인드를 올리자 창가로 따스한 햇살이 내려쬐고 하늘은 청명하다. 어제와 같은 가을 하늘이련만 유난히 파랗다. 우울했던 마음에 조그만 위로가 된다. 저 하늘처럼 누군가에게 소박한 위로를 줄 수 그런 의사이기를 소망해 본다. 그와의 추억이 무척이나 그립다. 물끄러미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려본다. ‘그곳의 가을도 끝나가지요?’

군의관 시절 사병들 유격훈련 지원을 나갔다 새벽 2시에 우연히 깨서 바라본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과 그 새벽 고요함. 그 장엄한 자연의 위대함에 알퐁스 도데의 ‘별’을 떠올리며 남몰래 울컥했던 문학소년 같은 감성을 지녔던 시절도 있었다.

대학교수로 아니 교수 흉내를 내면서 근무한 지 벌써 7년. 환자를 보는 일 이외에도 학생들 교육, 강의 준비, 팔자에 없는 늦공부에, 쓰고는 있지만 내가 보기에도 민망한 연구논문, 기타 행정적인 업무들. 그런 일들에 파묻혀 오랫동안 의사임을 잊고 살아왔던 것 같다. 벌써 40도 훌쩍 넘어버린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고 했던가? 어느 날 문득 거울속에 비친 나의 얼굴이 소박한 위로를 주는 순수함으로 채워가기는 커녕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차 탐욕스럽게 변해 가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소재로 글을 쓴다는 것이 고인의 숭고한 죽음을 모독하거나 내가 모르는 그만의 삶의 의미를 훼손하거나 폄하시키지 않을까 걱정되고 고민되어 펜 들기를 주저하였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어떤 내적 충동 이랄까? 오랜만에 누군가의 죽음을 섬세하게 바라보며 무언가 기록에 남기고 싶은 충동이 강렬히 밀려왔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내가 잠시 잊고 살았던 나의 삶의 의미를 되찾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도 좋고 학자도 좋고 연구자도 좋지만 ‘그래! 나는 의사였지, 나는 사람 냄새 나는 의사를 꿈꾸어 왔었어’ 기억의 저편에 희미해져 버린 순수했던 감성을 끄집어내어 다시 추억하고 다시 설레여 내 얼굴을 소박하고 순수함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이 아직 늦지 않았다고 채찍질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밤에 쓴 연애편지는 아침이 되면 찢어 버린다고 한다. 그런 느낌! 내성적인 성격 탓일까? 나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읽게 하고 평가 받는다는 건 참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 글 또한 내가 나에게 쓴 나의 고백이었지 누군가에게 읽게 할 목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글을 투고 했던 것은? 솔직히 공명심! 더불어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내가 나에게 하는 고백이지만 이 또한 한번쯤은 다른 이에게 어떤 평가를 받는지도 궁금하였다고나 할까?

문학을 사랑했던 어린 시절 마음속 스승이셨던 그 쟁쟁한 심사위원님들께서 보잘 것 없는 내 글을 읽어주셨다는 자체만으로 감사하고 가슴 떨리는 영광이다. 결과가 발표되고 여러 사람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으니 뭔가 우쭐해지고 ‘붕’ 떠 있는 느낌이다. 겸손의 미덕을 내 자신 스스로에게 각인 시켜본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나는 가톨릭 신자이다. 나의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부여하신다. 인간적으로는 아무리 하찮은 만남과 이별이라 할지라도 어김없이 의미를 부여하신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숨어있는 무언가를 찾아내기를 바라신다. 상투적이지만 그것은 바로 위대한 ‘사랑’이다. 대부분 내 마음의 눈이 멀어져 바라보지 못할 뿐 그분께서 주신 사랑은 나의 모든 만남과 헤엄짐 속에 여전히 빛나고 있다. 하여 나는 아베 피에르 신부의 이 말씀을 가장 좋아한다. ‘삶이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주어진 얼마간의 자유시간’이다.

상을 받았다는 아빠의 자랑질(?)에 뭔지도 모르고 아빠 최고라고 마냥 기뻐하던 두 딸은 벌써 잠이 들었다. 딸 바보 아빠여서일까? 자고 있는 두 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내가 꿈꿔왔던 바로 그 얼굴 그 모습이다.

겨울의 한가운데 의외의 수상소식에 잠시 들떴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랑하는 두 딸 글라라와 안젤라, 아내 마리아, 부모님과 나의 사랑하는 모든 가족들과 수상의 기쁨을 나누고 싶다. 더불어 교우회 모임 때마다 마음속 진솔한 얘기들을 기꺼이 함께 나누어 항상 힘이 되어 주신 우리 조선대병원 가톨릭 원목실 신부님과 수녀님, 회장님 및 교우회 모든 식구들과 항상 뒤에서 응원해주는 사랑스런 조선대학교 의과대학 학생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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