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우 강동경희대병원 외과 조교수

외과 전공의 4년차 어느 날 새벽 2시,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당직실에서 자고 있을 아랫년차 전공의와 수술실, 마취과, 또 어디다 연락해야 되더라. 교수님께서는 이미 연락 받으셨겠지만 전화 한 번 드려야지. 주섬주섬 옷을 입고 양치만 쓱 한 다음 집을 나서며 생각했다. 요즘 왜 이렇게 카데바(장기 기증이 가능한 뇌사자)가 많은 건지. 어제도 간이식을 두 건이나 하느라 오늘 겨우 집에 와서 눈 붙인 건데.

나는 당시 이식 파트에 배정되어 치프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사실 이식에 큰 관심은 없었다. 전문의를 따고 군대에 다녀올 때쯤 어떤 파트를 할까 고민하겠지만 최소한 이식은 아니었다. 이식은 ‘외과 내의 내과’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각종 내과적 지식, 특히 면역과 관련된 공부가 어렵고도 양이 많았으며, 그렇다고 상대적으로 수술의 술기가 쉬운 것도 아니었다. 안경에 붙은 루뻬(Loupe, 확대경)를 통해 머리카락 굵기의 실을 가지고 자그마한 혈관을 꿰매는 작업은 고도의 섬세함을 요구했고, 대부분의 이식외과 의사는 수술실 밖에서 그 섬세함에 상응하는 예민함을 분출하기 마련이었다.

예상치 못한 스케줄도 많은 이들이 이식에 투신하는 것을 막는 이유 중 하나였다. 뇌사자는 왜 항상 내가 주 10일 근무를 하다가 (1주일은 7일인데 그 중 10일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근로 시간으로 계산하면 주 14일 근무도 가능하다!) 딱 하루 퇴근할 때 등장하는가. 나는 심지어 내가 조금이라도 밥을 먹고, 쪽잠이라도 자는 모습을 보기 싫은 전능자가, 뇌사자를 잘 모아놨다가 꼭 내가 쉬려고 할 때에 맞춰 하나씩 풀어놓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나마 생체 이식(살아있는 사람이 기증자가 되는 것)은 미리 스케줄이라도 맞춰서 수술을 진행하니 예상이 가능한 편이지만, 뇌사자 이식은 늘 응급뿐이다. 언론은 장기기증 이야기가 나오면 삭막한 세상 가운데 온정이 여전함을 역설하고, 기증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중 기사거리가 조금만 있어도 아름답게 장식해서 퍼뜨리는데, 정작 피곤을 떨쳐내지 못한 몰골로 수술실, 병동, 외래를 오가는 이식외과 의사들에 대한 미담은 연예인의 육아 관련 소식만큼도 보도되지 못한다.

그래서, 경제적인 이유나 유명세가 인생의 주된 목표였던 사람들은 애초에 외과를 전공하지 않는다. 다른 과를 전공하는 것이 반드시 돈과 명예를 추구한다는 식의 흑백논리가 아니라, 외과를 통해 그런 산출물을 얻기 힘들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공부해서 어떤 전공을 택하든, 그리고 그 근거가 무엇이든, 누가 상관할 수 있겠는가. 설사 그 목표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고 해서, 비난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겠는가. 내가 사명감이 있어 이 길을 선택했다고 해서 칭송 받아 마땅하고, 반대로 편하고 쉬운 길을 가는 사람들은 비난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피해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막상 외과를 시작해보니 외과가 꼭 외롭고 힘든 길만은 아니며 재미와 보람이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을 이겨내게 해준다는 사실을 경험해왔다. 하지만 그래도, 이식은 안 할 거라 다짐했고, 결국에도 안 했다(필자는 현재 대장암 분야를 전공하고 있다).

같은 시각, 새벽 2시. 당시 내 환자의 이야기다. 50대 아주머니 장씨는 부리나케 짐을 싸고 있었다. 속옷, 치약, 칫솔 넣었고…비누는 거기 있으려나? 귀중품 따위는 원래 없었다. 9년 간 머릿속으로 그려왔던 상황이 왔건만, 역시 같은 세월 동안 방 한 귀퉁이에 놓여있던 여행용 가방에 물건들을 집어넣는 손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도 없는 집 안, 볼 사람이 없는데도 괜히 이마에 땀이 흘렀다. 하나밖에 없는 딸은 시집 가서 4살짜리 아들을 키우며 힘겹게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는데, 굳이 거기다 연락해서 부담을 얹어줄 필요는 없었다. 그나마 시집이나 보내고 난 다음에 남편과 갈라섰으니 다행이었다.

남편이 집을 떠난 지는 벌써 4년이 되었다. 배운 게 없어 몸으로 일해야만 벌이가 가능했던 남편과 마트 계산대에 종일 서서 일하는 장씨의 만남은 애초부터 분홍빛은 아니었다. 중매로 만나 살을 맞대고 살아보니 정이 들고, 정이 드니 아이가 들어서고, 그렇고 그런 부부가 되어간 것이다. 그러나 수입은 러닝 머신 위를 달리듯 제자리인 반면 물가는 한 번 올라가면 떨어질 줄 몰랐고, 딸아이가 자라나면서는 돈 들어갈 데가 많아져 정치인들이 이야기하는 살림살이라는 것이 정말 나아지기는 하는지 의심스러울 때쯤, 장씨는 신부전을 진단받았다.

처음에 몸이 부을 때는 너무 오래 서서 일하느라 그런가 싶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서서 손님들이 올려놓는 물건들에 귀상어 같이 생긴 인식기를 갖다 대면 가격이 나왔다. 삑삑거리는 바코드 인식음을 열 시간 넘게 듣다 보면 한 칸 방뿐인 집에 와서도 귀에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그나마 일을 안 나가는 어느 날, 규모가 제법 되는 동네 내과에 그냥 약이나 받으러 가볼 요량이었다. 재미있었던 건 병원에서도 아픈 사람들 명단에 바코드를 붙여놓았던 것이다. 여기서도 그 인식기를 갖다 대면 삑 소리가 울리나? 물건처럼 사람도? 장씨는 피식 웃음이 나왔더랬다.

“소변은 하루에 몇 번이나 보세요?”

“…음… 그게…”

몇 번이더라. 가만 있자. 장씨는 당황스러웠다. 마지막으로 오줌을 싼 게 언제인지, 어디서인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제는 화장실에 갔나?

“지금 크레아티닌 수치가 상당히 높습니다. 빠른 시일 내로 투석을 시작해야 돼요.”

“투석.. 투석이 뭔데요?”

그 주 안에 모든 일이 준비되었다. 왼쪽 팔에다 동정맥루를 만들어 투석용으로 확보했고, 동네 인공신장실도 예약했다. 그리고, 다니던 마트에 일주일에 3일, 매번 4시간씩 근무시간에 투석하러 나와도 되겠냐고 문의했더니 내일부터 아예 그만 나와도 된다는 답이 신속하게 돌아왔다. 이 모든 일이 채 두 주도 지나지 않아 일어나고, 지나가버렸다. 물은 하루에 한 통, 소금은 매우 조금 먹어야만 했다. 어차피 비싸서 살 수도 없는 토마토, 과일, 견과류는 먹지 말라고 하기 전에도 원체 먹지 못했었다. 치료비가 들기 시작하자 아껴야 마땅한 살림에 남편의 담뱃값이 되려 올라가기 시작했고, 정 때문에 살던 남편도 그 주, 장씨가 투석을 시작하던 그 주부터 떠날 마음을 먹었을지 알 수 없을 일이다. 아니, 그랬다면 딸아이가 시집갈 때까지 버텨주지 못했겠지. 오히려 자신이 몹쓸 병에 걸려 남편과 아이에게 부담을 주고 결과적으로 가정을 깨뜨렸다는 좌절감은 장씨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새벽 4시 반. 환자가 병원에 도착했다. 아침 공기가 제법 쌀쌀했지만 2시의 그 전화를 받고 나오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장OO 환자분, 장기이식 코디네이터입니다. 뇌사자가 발생했고 환자분께서 현재 가장 적합하시니 얼른 입원 준비해서 오세요.”

9년. 장기이식관리센터(KONOS)에 이름을 올린 지 9년 만이다. 신장 이식을 기다리며 일주일에 세 번씩 투석해오던 생활도 이제 끝이다. 살아있는 기증자는 아예 찾을 생각도 안 했다. 요독으로 인해 몸에서 이상한 냄새도 나고, 투석하는 사람이 찾을 일자리도 없어 일상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남편은 조금씩 지쳐갔을 게다. 장씨는 발병 후 5년이나 함께 살아준 것만으로도 남편에게 감사한 마음이어서, 감히 남편에게 콩팥 하나를 달라고 할 면목이 없었다. 딸은…하나뿐인 내 귀한 딸은, 세상 모든 부모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딸에게 주면 줬지 결단코 딸에게서 받아 수명을 늘릴 생각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뇌사자가 나타나면 받기로 대기 순서에 이름을 올렸고, 평균 10년 정도 걸린다는 말을 듣고 그 때까지 내가 살 수 있을까 싶었더랬다. 기대를 접어야지 하면서도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르니 여행 가방을 늘 준비해놓고 살아오던 차에 이 새벽에 전화가 온 것이다.

수속을 밟고 이것저것 검사를 하니 벌써 해가 밝았다. 개인 정보 보호 원칙에 따라 원래 기증자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지만, 감사한 마음 외에 악용할 여지가 없는 환자들에게 의료진이 살짝 대략의 사정만을 귀띔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장씨는 교통사고를 당한 젊은이의 신장을 받기로 되었는데, 부모와 남은 가족을 생각하면 슬프다가도 덕분에 자신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면 고마웠다. 유족들을 만날 수 있다면 땅에 이마가 닿도록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절할 텐데.. 언론에서 가끔 미담으로 소개되는 장기기증자들이 이렇게 위대한 사람들이구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구세주들이구나. 장씨 눈에는 미안함 때문인지 고마움 때문인지 이유를 분간하기 어려운 이슬이 살짝 맺혔다..

아침 9시. 나는 HLA matching(인체백혈구항원)을 재확인하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C1번 방은 recipient(받는 사람), C2번 방은 donor(주는 사람)였다. Donor는 내 또래의 젊은 남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통사고를 당했다는데, 외관 상으로는 대부분 멀쩡해 보였다. 이 사람 부모도 참 마음이 찢어지겠구나, 나름 30여 년을 살아온 사연과 굴곡이 있을 텐데 어쩌다 여기 누워있나. 나는 생각했다. 의료는 사람을 대한다는 이유로 까페, 호텔과 같은 서비스 업종과 유사하게 취급될 수 없다. 서비스 업종이 요하는 것은 사람이 아닌,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화이지만, 의료가 대하는 존재는 사람 그 자체이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다. 오늘도 병원을 오가는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질환으로 불리는 대신, 그들의 부모가 지어준 그들만의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 그들의 정체성은 병실 호수와 침상의 순서가 아니라, 그들이 걸어온 삶의 궤적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식은, 환자의 이름과 삶의 궤적이,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의 인생이, 다른 과나 파트에 비해 더욱 잘 보이기 마련이다.

12시. 수술은 무사히 잘 끝났다. 간과 신장 한 쪽은 대기하고 있던 다른 병원 사람들이 가져갔고, 나머지 신장 한 쪽은 장씨에게 알맞게 들어갔다. Perfusion(관류)도 좋았고, Hyperacute rejection(초급성 거부반응)의 증거도 없어, 장씨는 집중관찰실로 곧장 옮겨졌다. 첫 수술부터 들어오느라 1년차 전공의가 장씨에게 수술에 대한 설명을 했을 테니, 그 곳에서 나는 장씨와 맨 정신으로는 - 마취된 상태를 예외로 한다면 - 처음으로 대면한 셈이다.

“안녕하세요, 제가 이식외과 Chief입니다. 환자분 수술은 아주 잘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내일 소변이 잘 나오고 크레아티닌이 떨어지는지 기다려봐야 합니다.”

“오줌이... 소변이 드디어 나오나요?”

“대부분 잘 나옵니다. 기다려보세요.”

소변이라. 장씨는 마지막으로 오줌을 쌌던 게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났다. 아주 어릴 적 이불에 오줌을 싸면 옆집에 소금 얻으러 간 적이 있었고 너무 오줌을 참으면 오줌소태 생긴다는 엄마의 말씀도 기억나지만, 도통 마지막 오줌이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남편이 떠나기 전이었을 텐데.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손을 씻으며 나는 신장 이식을 받은 환자들 중 아예 소변이 한 방울도 안 나왔던 사람들의 한결 같은 순응도를 떠올렸다. 아직 투석까지는 안 받고 소변을 일부 보는 환자들은 이식을 받고 나서 소변량이 약간 늘어나고 오히려 면역억제제를 먹게 되어 불편한 부분도 있다는 이야기를 가끔 하는데 반해, 전혀 소변을 보지 못하던 환자들은 이식 후 소변을 마음껏 볼 수 있게 되어 뛸 듯이 기뻐하는 경우가 100%였다. 그들에게 면역억제제의 불편감 따위는 비타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새삼 고마운 일이다. 물을 마시면 멀쩡히 소변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또한 이를 상기시켜주는 신부전 환자들과 여전히 평생 업으로 삼기엔 꺼려지지만 이식이라는 파트의 매력이. 다른 이의 아픔에 빗대어 나의 건강함을 감사하는 것은 일견 이기적인 동기가 바탕에 깔려있는 듯해도, 실은 의사인 내게도 언젠가 어떤 종류의 아픔이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겸손하게 해주는 의미가 크다. 현실에 감사하며, 동시에 충실하자. 지금 나는 아픈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 돌봄을 소명으로 받아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언제든지 나도 환자의 자리에 눕게 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 소변을 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저녁 8시. 한나절이 지나고, 드디어 장씨의 Foley bag(소변줄 연결 주머니)이 터질 듯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환자분, 소변 잘 나오네요.”

나는 맑은 소변이 가득한 주머니를 들어서 보여주며 씨익 웃었다. 살짝 염려가 비치던 장씨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내가 무슨 큰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잘 나오는 소변을 보여줄 때면 정말 뿌듯하다.

“앞으로 며칠 간 계속 이렇게 나올 거예요.”

“오줌이… 나오네요… 흐흑…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지금이야 반갑지만 며칠 지나고 소변줄 빼고 나면 화장실 오가느라 괴로우실 걸요?”

장씨의 눈에서도 물이 흘러내렸다. 처음에 두어 방울, 한 줄기 하던 것이 마침내 소변 줄기만큼이나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의미인지 그냥 쏟아져 내렸다. 9년 전 신부전을 진단받던 것이 서러웠는지, 투석을 시작하면서 쫓겨나다시피 나온 마트에 서운했던 건지, 남편이 떠나갈 때도 되려 미안해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이 불쌍하게 여겨진 건지, 아니면 이렇게 오래 기다린 끝에 입원하면서도 어린 손자 돌보느라 잠든 딸을 새벽에 차마 깨울 수 없어 혼자 끙끙대며 짐을 싸서 입원하고 수술까지 받은 스스로에 대한 안타까움과 대견함 때문인지,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몰랐다. 오줌 싸면서 울고 있는 장씨 본인도 몰랐고, 콧날이 시큰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괜스레 가운 주머니 안의 볼펜을 만지작거리던 나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작년에 이어 또다시 장려상을 받게 되었네요. 한미수필문학상, 중독성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 욕심 없이 시작했던 공모가 내년에는 우수상, 대상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변해가는 것 같아요. 진료 현장에서 드라마 같은 이야기들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어서 소재는 무궁무진하지만, 상을 바라는 욕심이 글을 비틀고 과장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다스려야겠습니다.
작년에 군의료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을 담아 수상의 영예를 안았던 것과 달리, 올해는 문자 그대로 ‘기억에 남는 환자와 있었던 일’을 담아 봤습니다. 외과 전공의 시절, 구구절절한 사연 없는 환자가 없지만 이식 파트는 특히 기억에 남는 이들이 꽤 있었습니다. 오랜 투병에 장사가 없다는데 신장 이식 환자들은 이식 전까지 수 년에 걸쳐 투석을 하시면서 가족들이 지치고, 최악의 경우 가정이 깨어지는 일도 있습니다. 간혹 뇌사자가 아닌 생체 기증에 의한 이식을 할 때도 공여자를 정하는 과정에서 가족 간에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있지요.
모르겠습니다. 일반화하기 어렵지만 질환의 종류와 예후에 따라 사람의 반응이 달라지는 건지, 돈독했던 관계가 나빠지는 건지, 본래부터 가졌던 성품들이 어려운 상황을 맞고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건지. 제 인생 하나도 복잡하고 정의 내리기 어려운 판에 환자 한 명 한 명의 인생을 어찌 감히 분류하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사정을 들어주고 당장 눈 앞의 질환을 낫게 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그 분들의 깨어지고, 멀어지고, 고립된 여러 관계와 형편들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글, 수상 소식은 올해에도 신년을 여는 고마운 인사였습니다. 청년의사와 한미약품, 그리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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