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김동환이비인후과의원

창밖에 낙엽이 떨어지니 곧 하얀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이제 나에게도 신체적 변화가 일어나 머리카락은 가을바람과 함께 자연과의 동화를 위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고 그나마 남아 있는 머리카락도 자연의 순리대로 곧 하얗게 변할 것이다. 또한 나의 기억도 차츰 가물가물하여 불과 며칠 전 일도 흐릿할 때가 많다. 이 또한 자연의 순리이겠지. 하지만 순리에 맞서 아직까지도 나에게 생생한 기억이 마음속에 남아 있는 추억이 있다.

그 당시 나는 국가 병원에서 전공의 트레이닝 과정이었다. 이비인후과 전공의로 입국한 지 얼마 안 되어 윗사람 눈치 보는 것 이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는 픽스턴(전공의 대우)이라는 햇병아리 시절이었다.

스텝 선생님의 회진에 맨 앞에는 인턴 선생이 병실문을 열어주면서 보호자를 밖으로 내 보내면 1년차 전공의 한명이 그 뒤를 쫓아 치프 선생이 스텝 선생님 앞에서 환자에 대한 브리핑을 편하게 하도록 미리 준비한 차트를 들어서 보여 드리고, 맨 뒤에는 또 다른 전공의 1년차가 오더를 받아 적고 병실 뒷정리를 하면서 나오는 것이 회진의 일상이다.

병실 뒷정리라는 것이 회진의 진행이 빨리 되도록 환자가 스텝 선생님께 하는 질문이 길어지면 재빨리 나서서 질문을 막고 대신 그 질문을 받아 간단히 답하고 얼른 후미에 뒤처지지 않게 쫓아가야만 회진이 원활하게 된다.

그날 나는 후미를 쫓아가면서 뒷정리를 담당하는 예비 1년차였는데 후두암으로 후두 전적출술을 시행한 환자 앞을 회진할 때 초등학교 5학년이 스텝 선생님께 함부로 질문하기에 내가 얼른 가로 막고 스텝 선생님을 다음 환자에게 보낸 후 “너, 보호자 전부 병실 밖으로 나가랬는데 왜 여기 있니?”하고 좀 야단치듯 이야기하니 “새로 오신 지 얼마 안 되신 선생님인가 봐요? 우리 아빠가 후두 수술하여 말을 못하니 회진 때 저는 여기에 항상 있어야 돼요”하고 아랑곳하지 않고 당돌하게 맞받아친다.

“그래? 그럼 무얼 묻고 싶은지 이따 나한테 보호자 오시라 그래” 하니 "내가 보호자이니 제가 수술하신 주치의 선생님께 질문을 하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방해 놓으셨잖아요?" 하길래 "야! 꼬마야 모르는 소리 말아. 수술은 스텝 선생님이 하셨지만 니 아빠는 내가 관리하니 내가 주치의다. 내가 새로 온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인수인계가 다 안 되었지만 오늘부터 내가 새로운 주치의이니 모든 문제는 다 나한테 말하란 말이야. 그리고 너 같은 꼬마 아가씨 말고 엄마 오시라해."

“맨날 스텝 선생님께 혼나시는 선생님이 주치의라구요? 그리고 엄마는 도망가서 없으니 제가 보호자에요.”

“아니! 요 꼬마 녀석 버릇없이 날 놀려? 내 이따 회진 끝나고 다시 올 테니 그때 혼 날 줄 알어” 하고 서로간의 짧은 언쟁에서 벗어나 얼른 회진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다시 병실로 가서 그 꼬마 보호자를 만났다.

“그래, 아까 뭘 묻고 싶었는데?”

“앞으로 아빠의 경과, 그리고 어떤 검사를 추가로 해야 하는지, 또 입원비는 얼마나 나올지 알아야 하잖아요?”

“야! 그걸 미성년자인 너에게 어떻게 설명하니? 엄마는 도망가서 없다고 치더라도 고모나 삼촌, 하다못해 할아버지나 할머니도 없니?”

“아무도 없어요. 수술 보호자 동의서도 시골 우리 옆집 아저씨가 잠깐 서울까지 올라와 대신 써 주시고 가신 거여요.”

“수술 끝나고도 방사선 치료도 해야 하고 또 보험이 안 되는 검사도 많은데 어떡하려고 그래?”

“뭐, 잘 되겠죠! 그런 걱정은 제가 할 테니 아빠나 잘 치료해 주세요.”

그날 그렇게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를 쏘아 붙였다.

그 후 환자는 수술 부위도 잘 아물고 방사선 치료도 잘 견디면서 치료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다. 다행히 환자가 의료보호 환자라서 치료비는 어느 정도 혜택이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보호라도 보험이 안되는 검사가 많아 꽤 애를 먹었다.

“꼬마 아가씨, 다음 주에 검사 있는데 돈 구해 올 수 있니?”

이 말하기가 가장 싫었지만 그래도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시골 동네사람들이 성금으로 모아준 돈이 좀 있는데 이제 거의 다 떨어져가요.”

“큰일이네. 아직도 계속 검사할 것이 많은데….”

어느 날 늘 밝은 미소의 꼬마 아가씨가 울상이 되어 복도를 지나 가길래 “어이! 꼬마 어딜 갔다 오는데 얼굴이 우거지상이냐?”했더니 “원무과에서 또 다시 중간정산하라고 오라고 해서 갔는데 앞의 두 번은 겨우 정산했는데 이번에는 돈이 없어 못한다고 하니 원무과 아저씨가 막 혼 냈어요.”

“그래? 너도 기운이 빠지겠지만 나도 힘들어지네. 다음주 검사는 어쩌냐?”

“어쩌죠?”

“내가 한번 원무과 갔다 와 보지” 하고 원무과로 갔다.

“그 환자 형편이 도저히 안 되니 일단 검사 먼저 하고 나중에 돈 받읍시다” 하고 내가 사정을 하니 “아이고, 선생님은 아직 초보이셔서 잘 몰라서 그렇시는데요. 그 사람들 나중에 돈 떼먹고 도망갑니다. 저희가 잡으러 가야 합니다. 저희가 힘듭니다. 자꾸 닦달하면 돈 구해 옵니다.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선생님은 빠져 주세요.”

“걔는 초등학교 5학년 애입니다. 걔가 어디 가서 돈을 구해 옵니까?”

“그럼, 저희 보고 어떻게 하라구요? 저희 임무가 돈을 철저히 수납하는 것인데 돈 받지 말라는 얘기입니까? 아니 그럼, 선생님이 보증이라도 서실래요?”

“그래요. 내가 보증 설 테니 일단 검사부터 진행합시다”고 내뱉으니 원무과 직원도 당황해 했지만 나도 순간적으로 ‘어! 이건 아닌데. 일단 내뱉었으니 할 수 없네. 완전히 엮였네’ 하는 생각이 얼핏 지나갔다.

원무과를 나서면서 마침 그 앞을 지나가는 윗년차 전공의를 만났다. “야! 너는 어딜 쏘아 다니냐!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왜 제때 보이지도 않아. 너 오늘 우리랑 같이 점심 먹을 생각 말고 혼자 빨리 밥 처먹고 밀린 일이나 해” 하고 쏘아 붙였다.

“네, 알겠습니다. 저 혼자 밥 먹고 밀린 일 다 처리하겠습니다” 하고 밥 먹기 전에 병실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마침 그 꼬마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너, 어디가니?” “그냥, 답답해서 산책가요.” “밥은 먹었니?” “네.”

사실 이 꼬마는 형편이 어렵기에 병원에서 나오는 환자식을 아버지와 나누어 먹는다.

“너 밥 먹어도 배 고프지?”

“아뇨, 괜찮아요.”

“나, 오늘 일 잘한다고 칭찬받아 기분 좋은데 불고기 먹으러 갈까?”

“선생님이 칭찬을 다 받아요?”

“그래, 기분이 좋아 한턱 쏠 테니 가자!”

밀린 일과 혼날 것은 나중일이고 휴게실에 가운을 집어 던지고 꼬마 손을 잡고 병원 앞에 불고기집으로 갔다. 3인분을 시켰는데 밥을 먹었다던 꼬마는 나보다 더 먹었다. 공기밥도 한 그릇씩 배불리 먹었다.

“정말, 오랜만에 배불리 먹었어요.”

“맛있었니? 내가 다음에 또 사 줄게.”

“괜찮아요. 아니, 싫어요. 선생님께 부담 드리는 것도 싫고, 아빠 혼자 병실에 두고 나 혼자 먹기도 싫어요. 나중에 아빠 퇴원하면 아빠랑 자장면 사 먹을래요.”

“학교도 못 가고 친구도 보고 싶겠구나?”

“……” 시무룩한 표정에 내가 괜한 걸 물어 보았구나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밸런타인데이가 왔다. 정식으로 1년차 전공의가 될 날도 얼마 안 남았다. 하지만 2월부터 거의 공식적인 1년차 일을 시작한다. 그래서 아침 일찍 모든 병실 환자를 불러 드레싱을 해준다.

이날은 대부분의 젊은 여자 환자들이 당시에 제일 비쌌던 1,000원짜리 큰 초콜릿을 드레싱치료를 마치면 내 가운 주머니에 넣어 주곤 했다. 그리고 간단한 인사말을 적기 위해 작은 카드를 준비하여 초콜릿 포장지에 스카치테이프로 붙여 주는데 그 내용은 대부분 “치료 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밸런타인데이 잘 보네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이윽고 제일 마지막으로 후두암 환자의 드레싱을 마치고 나가려는데 병실 밖에서 지켜보던 꼬마 아가씨가 초콜릿을 쑥 내민다. 300원짜리 가나초콜릿이다.

“이게 뭐니?”

“오늘이 무슨 초콜릿을 주는 날이라고 들어서 병원 앞에 슈퍼에 가서 하나 샀어요.”

“너 밸런타인데이도 다 아는구나.”

“그런 어려운 이름은 모르고요. 병실에 있는 언니들이 초콜릿 주는 날이래요.”

“너에게는 300원도 클 텐데. 돈 좀 모아서 자장면 사먹지 그랬어. 아무튼 고맙다.”

초콜릿을 주머니에 넣는데 꼬마가 “와! 선생님 가운 양쪽 주머니에 큰 초콜릿이 가득 차 있네요. 내꺼만 제일 작네요. 아무래도 선생님은 제 것은 안 먹고 딴 사람 줄 것 같네요. 선생님 지금 제 초콜릿을 까서 하나 드세요. 지금 안 드시면 딴 사람 줄지도 몰라요.”

“그래, 알았어, 바로 하나 먹을게.”

곧 바로 포장지를 까서 8조각의 판으로 된 초콜릿중 하나를 부러뜨려 입에 넣었다.

“야! 달고 맛있네. 너도 하나 먹어라.”

“저는 싫고요, 그리고 이것도 드릴께요” 하고 리본 모양으로 접은 쪽지를 하나 주고 도망치듯 병실로 가버렸다. 쪽지를 펴니 병원마크가 있는 메모지에 (아마 간호스테이션에서 메모지 하나 달라하여 얻은 듯) ‘선생님! 아빠와 저에게 너무 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고맙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 순간 그동안 목욕 한번 제대로 못하고 1년차로 일하면서 겪었던 고단함과 스트레스가 싹 가시듯 풀려 몸이 날아가는 것처럼 가벼워졌다.

이틀 후 후두암 환자의 퇴원 일정이 결정되었다. 7일 후에 퇴원시키기로 하였다.

내가 꼬마를 불렀다.

“이제 일주일 후면 퇴원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퇴원예고를 원무과에 하면 그동안 밀린 돈 갚으라고 매일 병실에 찾아와서 닦달을 할 텐데 돈 구할 수 있니?”

“……” 퇴원이라는 나의 말에 겨울에서 벗어난 봄의 햇살처럼 밝았던 아이의 얼굴에 돈 이야기가 나오니 금세 곧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은 먹구름의 얼굴색으로 변했다.

“너 이따 밤에 나하고 말 좀 하자.”

그날 저녁 나는 꼬마를 항상 잠겨 있는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데려가 “꼬마야 잘 들어. 너, 병원 복도 제일 끝 쪽 계단 알지? 거기는 밤 12시에 계단 내려가는 문을 잠그거든. 내가 모래 한밤중에 열쇠를 수위실에서 구해 올 테니 그 문을 통해 빠져 나가라.”

저 아랫 계단에서 비쳐 올라오는 가냘픈 빛으로 사람 얼굴도 구분하기 힘든 컴컴한 옥상 아래 계단에서 갑자기 꼬마의 동공이 확대되고 놀란 심장박동 소리가 나의 눈과 귀로 전달되었다.

“저보고 아빠 모시고 도망가라구요?”

“그래.”

“아니 그럼 입원비는요?”

“여기는 국가병원이야. 환자가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 것은 말이 안돼. 다 국가에서 책임지니 걱정 말아. 내가 아빠에게도 말씀 드릴 테니 짐 잘 챙겨 놔.”

“저 이렇게 그냥 도망가도 돼요? 입원비 안 내고 도망가려고 촌지 드린 것 아닌데…."

“야! 그게 무슨 촌지니! 그리고 너 촌지 뜻이나 제대로 아는 거야? 병실에 오래 있다 보니 별 희한한 소리를 보호자들에게서 들었구나? 그냥 그건 선물이라 하는 거야. 마음의 선물. 그리고 선물 때문에 보내는 것 아니야. 이게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이깟 초콜릿 하나 때문에 내가 너를 도와주는 줄 알어? 너와 아버지가 불쌍해서 도와주는 것도 아니야. 이건 국가가 경제적으로 조금 어려운 환자를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인데 좀 시스템이 부실해서 내가 대신하는 거니 미안할 것 없어. 니가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돈을 갚으면 돼” 하고 그 꼬마에게 환하게 미소를 띄어주곤 다시 속삭이듯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잘 들어. 절대 너희 집으로 가면 안 돼. 집으로 가면 원무과 아저씨들이 찾아낼 거야. 어디 갈 곳이 없니?”

“아빠랑 상의해 볼게요.”

다음날 내가 말을 할 수 없는 아빠에게 설명을 하자 환자분은 종이에 적으면서 다른 동네에 먼 친척이 사는데 시골이라 빈집이 몇 군데 있다고 그 동네에 가서 빈집을 구해 당분간 살겠다고 했다. 암의 추적 관찰은 당분간 우리 병원에서는 힘드니 어디 근처에 큰 병원이 없냐고 물으니 50 Km 이내에 안동이 있다하여 안동병원에 가서 가끔 관찰만 하라고 수술소견서와 수술한 병원에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추적 관찰을 못 하니 대신 좀 잘 봐달라고 사과문을 따로 써서 드렸다.

그 다다음날 새벽 3시에 나는 병원 정문 수위실에 가서 낮에 아무래도 비상계단에 소지품을 떨어뜨린 것 같으니 한번 찾아봐야겠다고 하고 열쇠를 빌리려고 갔는데 마침 수위 아저씨가 골아 떨어져 주무시고 계셨다. 다행히도 평소 잘 아는 수위 아저씨라 들켜도 상관이 없겠지 하고 탁자에 놓인 열쇠꾸러미를 집어 병실로 왔다. 이비인후과 병동은 큰 중환자가 없어 나이트를 하는 간호사는 1명인데 마침 그 날은 나이 많은 간호사여서 그녀 역시 일을 빨리 끝내고 간호사실 안에서 밑에 문 받침대로 문을 겨우 살짝만 열어 놓은 상태로 의자 두개를 붙여 놓고 잠시 눈을 붙였는지 그녀 역시 자고 있었다. 새벽 3시는 밤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잠에 취해 가장 힘든 시간대인 것을 노렸는데 역시 잘 맞아 떨어졌다.

1시간 전부터 다른 환자 눈에 안 띄게 이불속에서 환자복을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있으라고 미리 일러두었다.

비상문을 열고 환자와 꼬마를 빨리 내려가도록 했다.

조용해야 하고 시간이 촉박하여 다른 말을 할 틈도 없었다. 환자가 고맙다는 표시로 90도로 두 세번 인사하고 꼬마는 내 귀에 대고 “고맙습니다”라는 말만 했고 한시가 촉박하니 나는 얼른 손짓으로 빨리 내려가라 했다. 어둠속에 자취가 감추어지고 다시 비상문을 잠그고 병동을 지나가니 아직 간호사는 졸고 있고 (환자의 콜이 없으면 보통 4시까지 자는 습관을 내가 평소에 잘 알기에) 얼른 뛰어간 수위실 역시 아저씨가 아직 곯아 떨어져 있다. CCTV 도 없던 그 시절에 완전 범죄에 성공한 것이다.

다음날 병동이 발칵 뒤집어졌다. 일단 나이트 간호사는 수간호사에게 엄청 깨지고 있었다. 비상문이 잠겨 있으니 간호스테이션 앞으로 환자가 지나가면서 탈출 했을 것인데 그것도 못 발견하고 졸았냐고 혼나고 있었다. 그녀에게 약간의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불쌍한 환자를 위해 너그러이 용서하기를 빈다는 나의 무언의 메세지가 그녀 마음속에 무의식적으로나마 전달되기를 빌었다.

나도 아침 회의시간에 스텝 선생님께 어제 밤 사이에 환자가 몰래 도망갔다고 보고했다.

묵묵히 보고를 받으시고 아무 말씀 없이 “아침 회진이나 돌자”고 하시어 다들 일어나 회진을 돌았다. 그 환자가 있던 빈 침대를 휙 지나갔다. 꼬마의 잔상이 나의 뇌리를 스쳐간다.

하루 지난 그 다음날 오후 스텝 선생님이 갑자기 자기방으로 슬쩍 나를 아무도 몰래 끌고 들어가신다.

“니가 보냈지?”

“네”

“야! 암 수술환자 나중에 재발되어 문제 생기면 나는 모른다. 니가 다 책임져라.”

“선생님께서 수술 잘 하셨잖아요. 재발 안 되게.”

“어디 가라고 병원 소개는 해 주었니?”

“네, 안동병원 소개해 줬고 우리 욕 안 먹게 편지 잘 써서 전달해 주라고 주었어요.”

“이거 잘 한 건지 나는 모르겠고 나는 이 일 일체 모르니 니 혼자 다 책임져라.”

“네,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그럼, 나가서 일 봐.”

그날 원무과도 난리가 났다.

“아이고, 선생님이 괜히 보증 서 주어 우리까지 고생시키네요. 집이 강원도 쪽에 가까운 경상북도 두메산골이라는데 거기까지 가서 못 찾으면 이거 우째 해야 됩니까?”

“돈이 없어 도망간 사람들이 호텔이나 여관에서 살겠어요? 집에 있을 테니 잡아서 돈 받아 오세요. 저도 설마 그 사람들이 이렇게 도망칠 줄 알았나요?”

원무과 직원의 원망 섞인 말투를 뒤로 하고 시치미를 떼고 그 자리를 얼른 피했다.

그 다음날 스텝 선생님이 다시 나를 조용히 방으로 호출 하신다.

“야! 너 그 환자 검사비 보증 섰다며? 이거 의국비에서 10만원 보태주니 보태라.”

“감사합니다만 보증 선 금액은 18만원인데요?”

“이게, 이거라도 보태주었는데 거 되게 말 많네. 니가 좋은 일 하려고 했으니 그만큼 손해도 봐야지.”

“알겠습니다. 이거라도 감지덕지입니다. 신경 써 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방문을 나서는데 “그리고 나머지는 미수금으로 처리했다. 니가 물어야 할 돈은 없다.”

나는 다시 한번 씩 웃으면서 목례를 하고 나왔다.

경상북도 두메산골까지 내려간 원무과팀은 1박 2일이나 그곳에 머물며 그 동네를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못 찾고 허탕만 쳤다고 나중에 소식을 들었다. 나도 그 후 다시는 환자와 그 꼬마의 소식을 접하지 못 했다. 다만 몇 달 동안은 제발 무사히 잘 숨어 지내길, 그리고 제발 암이 재발하지 않기를 빌어 주었다.

그리고 다음해, 또 다시 그 다음해, 매년 밸런타인데이가 오면 그 꼬마와 초콜릿 생각이 난다. 밸런타인데이가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주변 사람들에게 휩쓸려 무심코 따라한 행동이지만 꼬마의 마음속에는 나에게 깊은 감사의 선물을 하고 싶었던 그 마음을 나는 잘 안다. 그래서 그 고마워하는 꼬마의 마음이 나의 가슴속으로 깊게 파고 들어가 매년 한번씩 그 마음의 의미를 내 나름대로 되새겨보게 된다. 그 꼬마가 아니더라도 밸런타인데이가 되면 초콜릿을 선물하는 환자가 꽤 있었다. 시대가 변해 초콜릿도 점차 고급스러운 것을 준다. 하지만 그 정성과 마음을 어찌 이 꼬마에 견주겠는가.

요즈음은 나도 나이가 들어 이제는 초콜릿 선물하는 사람이 없다. 점차 세상은 각박해지고 더군다나 부정청탁 금지법(김영란법)으로 스승님께 캔 커피 하나 드리는 것도 조심스러운 세태라서 순수한 정과 결합된 미풍양속까지 버려야 할지 참으로 안타깝다. 이제 또 밸런타인데이가 올 것이다. 이제 결혼을 하고 중년부인이 되었을 그 꼬마 아가씨가 주었던 그 순수한 선물과 쪽지가 내 마음속에 깊이 박혀 좋은 추억거리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제가 전공의 시절에는 경제가 부흥하여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시기였지만 여전히 가난한 사람이 많았고 당시에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가 막 시작하는 단계이고, 의료보호라는 극빈자를 위한 요즈음의 의료급여 제도가 있었지만 국가재정의 한계로 자격이 되어도 선택되지 못해 혜택을 못 받는 사람도 많았고 (의료보호도 소위 백이 있어야 쉽게 될 수 있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또한 의료보호에 편입되어도 당시에는 거의 기본적인 진료 및 수술비 일부만 혜택이 있어 장기 입원환자나 검사 혹은 수술 재료가 많이 들어가는 큰 수술은 많은 부담을 져야 했었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열심히 치료해서 낫게 해 주는 것이 제일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주치의라면 적어도 환자의 또 다른 외적, 내적 고민까지 그 아픔을 함께 해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이 글을 쓴 저는 이비인후과이기에 큰 수술이 상대적으로 적어 이렇게 환자를 이스케이프 시키는 경우가 적었지만 장기 입원 환자가 많은 내과나 큰 수술을 한 외과의 경우는 남 몰래 환자를 도와주는 경우가 제 동료의 경우만 봐도 꽤 많았습니다. 물론 환자 스스로 야반도주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많은 경우가 환자와 동고동락하며 환자의 속사정을 잘 아는 전공의 1년차 주치의가 환자의 심정과 심경을 파악하여 도와주는 것입니다.

병든 환자의 치료뿐만 아니라 그 환자의 속사정까지 헤아려주는 따뜻한 배려는 윗선에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알아서 했고 요즈음 사회에서 의료인들이 인문학적 소양과 인성이 부족하다고 인문학을 배워야하고 인성교육을 시켜야한다고 떠들고 있지만 당시 우리는 환자의 아픔을 통해 사회성을 배우고 저절로 인성과 소양을 갖추었다고 자부합니다.

의사뿐만 아니라 어려운 환자를 위해 방사선을 몰래 찍어준 방사선기사나 혈액검사를 꽁짜로 몰래 해준 임상병리기사, 그리고 도망가는 것을 보거나 알아도 모른 척 해준 간호사, 다들 따뜻한 의료인이고 진심어린 정성으로 해 주었다고 자부합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병원에 손해를 끼쳤으니 범죄인 것은 사실이나 국가가 책임져야 할 일을 시스템이 제대로 안되어 못해 준 것을 저희가 대신 해주고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저는 의약분업 이전에 개업하였는데 당시 개업하기 전에 어떤 선배 병원에 잠시 진료를 도와주러 나갔는데 선배의사 책상서랍에 제약회사에서 받은 약 샘플이 많은 것을 보고 이 선배가 치사하고 옹졸하게 샘플 받은 것을 환자에게 약 주면서 팔아먹고 이익을 챙기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 샘플약을 모아 놓았다가 잘 낫지 않는 의료급여 환자가 오면 무료로 나누어 주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 또한 의사가 환자만 치료해서는 되는 것이 아니고 환자의 마음까지 들여다 볼 수 있는 소양을 갖추어야 대의가 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미수필 문학상의 취지가 날로 멀어져가는 환자와 의사의 관계 회복을 위해 제정되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의사가 환자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배려해 준다면 의사와 환자의 관계도 예전처럼 회복되고 더불어 의사의 위상도 높아질 것입니다.

저는 어렵고 좋은 일을 하신 많은 분을 생각하면 하찮은 빙산의 일각이고 형편이 어려운 많은 환자에게 드러내지 않고 많은 도움을 준 의사 선생님과 의료인 여러분께 그 영광을 돌리고자 합니다. 후원해주신 청년의사신문과 한미약품의 발전을 기원 드리며 뽑아주신 심사위원님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한미수필문학상이 앞으로도 좋은 작품이 많이 나와 우리사회에 따뜻한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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