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많은 연인들이 손잡고 거리를 거닐거나 예수님의 탄생을 축복하면서 선물을 주고받는 날. 그러나 당직 레지던트였던 나는 당직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콜이 없다니 드문 한 때였다. 대충 당직실 책장에서 집어든 책이 신생아 심폐소생술이었는데, 넘기다 보니 머릿글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껏 내가 생각해온 가장 아름다운 머릿글은 모든 의대생들이 읽는 기본중의 기본, 해부학 교과서 책 Ciba의 것인데, 그 책의 머릿글은 한 페이지 전체 흰 여백 가운데 ‘To my wife, Vera’라고 단 한 줄이 써 있다. 해부학 책
“문둥병 환자에게 쓰는 약을 처방해 주세요.”피부병 치료를 하면서 가끔씩 듣는 말이다.내가 개인 의원을 연 곳은 인천의 부평으로, 병원 뒤편에 작은 야산이 있다. 이 산의 반대편에는 서로 마주보는 앞산이 있고, 이 둘이 둘러싸고 있는 공간에 허름한 동네하나가 위치한다. 과거 나환자 정착촌인 성계원이 있던 곳이다. 작은 야산만이 있는 평범한 지역이지만 한적한 산중에 존재하는 마을이 연상된다. 지금은 부평 농장이라 불리며 작은 공장지대로 변해 있다. 앞 뒤 산으로 둘러 싸여있고 입구는 양옆으로 길 하나씩 만이 있다. 여기를 오고 가려면
1그는 어머니에 대해 쉴 새 없이 물어본다. 어머니가 깜빡깜빡 하는 게 요새 들어 심해졌다며 MRI를 찍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좋은 약이 새로 나온 것이 없느냐고, 차라리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가보는 것도 생각하고 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어머니가 기력도 약해지고 식사도 하지 않고 엉뚱한 말만 해서, 이억장이 무너진다고. 질문이 황당하기도 하고 무례하기도 하지만, 그의 심정이 이해되기는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답변을 할 틈은 주어야 할 텐데.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자신의 말만 끊임없이 이어 나간다
피천득 선생님은 수필 에서 “아사코(朝子)와 세 번 만났는데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고 했지만 내게는 세 번째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따르릉’ 전화 소리에 냉커피를 마시려다가 전화를 받았다. 시간은 9시가 갓 지나고 있었다. 진료 시작이 9시 30분부터여서 직원들은 출근을 아직 안했지만, 나는 개업한 지 얼마 안 되서 정리할 것이 많아 일찍 출근했다. 시원한 커피한잔 하면서 더위 좀 식히고 정리 하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계속 울려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OOOO 의원입니다.”“저기요, 엊
“전이는 피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른 이에게 영향을 줍니다. 왜 환자-의사 관계에서는 그것을 원치 않지요?” (영화 ‘패치 아담스’ 中)의사들이 전이(transference: 정신분석학에서는 보통 환자가 이전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경험했던 생각 혹은 감정이 치료자와의 관계로 전치되는 현상을 의미하나, 여기에서는 환자와 의사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감정 이입을 의미한다)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것이 환자에 대한 임상적 판단을 흐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는 환자의 치료 과정 중 언제나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어
HD #1 (hospital day : 입원 1일째)“선생님! 헤모리지 환자 왔습니다!” (헤모리지 : 뇌출혈 환자를 말한다.)응급실 인턴이 마침 응급실에 있던 신경외과 2년차인 나를 다급하게 불렀다.“33세 남자환자로 그... 하다가 갑자기 의식불명이 있었다고 합니다.”“네? 무슨 소리에요?”“네. 그... 복상사로...”“뭐라고 복상사? 인턴 선생님! 환자가 죽었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그냥 성관계라고 하면 되잖아요.”이렇게 희한한 노티가 유성민 환자와 그 아내인 윤아와의 첫 만남이었기에 나에게는 더 기억에 남는 환자와
평범한 봄날의 오후였다.진료실 벽면의 창문으로 나른한 햇살이 느릿느릿 들어오고, 공기마저 나른하여 대기실에 환자들 뿐 아니라 나 역시 하품을 참기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외래에 틀어진 음악마저 잔잔한 클래식이라 그날따라 참으로 조용하고도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진료 시작 전 타온 커피는 그 느릿한 흐름에 맞춰 어느새 식어빠져 씁쓸하기만 해서, 이 진료만 끝나면 식은 커피대신 새로 물을 담아와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OOO님, O번 진료실 들어가세요.”오른 편의 커피잔을 보다가 열리는 진료실 문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순간, 육중한
1.“몇 일전 잘려나간 아버지의 두 다리를 찾아주세요.”두 아들과 할머니는 두 눈에 눈물을 머금고 말한다.“왜 그러시는데요? 며칠 전 다리 절단 수술을 할 때 이미 폐기물 처리되어서 아마도 찾기 힘들 겁니다.”“꼭 찾아주세요. 아버지께서 잘못되시면 저 세상 가시는 길 두 다리로 가실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말끝을 흐리는 아들과 듣는 나,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잘려나간 다리를 찾을 필요 없습니다. 할아버지를 반드시 살리겠습니다.’동시에 주황색 의료용 폐기물 봉지에 덩그
“알코올 중독자에게 술을 자제하라고 말하는 것은 전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설사병에 걸린 사람에게 똥을 자제하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중)환자분이 진료실에 고구마를 들고 왔다. 수줍게 내민다. 맛있어요, 한번 드셔 보세요. 몇 년 전, 술 때문에 입원하셨던 분이다. 그 이후로 2년째 술 안 드시고 있다. 항상 선생님하고 약속 지키느라 술 안 먹고 있다고 하신다. 혼자 사는 그 환자분은, 관심 가져주는 누군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혹시, 약속할 상대가 없어서 그동안 술을 못 끊었을 수도.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을 것이다. 거울을 당장 볼 수 없었으니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 그 당시 내 안색을 살핀 누구라도 평소 웬만한 일에는 잘 놀라지 않는 내가 사색이 된 진풍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생리 현상 탓에 다급히 뛰어 들어간 화장실에서 마침 비어있던 한 칸에 느긋하게 앉아 즐기는 사색(思索)이 아니라, 모든 칸이 꽉 차있을 때 절망과 함께 찾아오는 바로 그 사색(死色) 말이다. 외래에서 조금 전 촬영한 복부 엑스레이 사진을 설명하려고 환자와 그 남편에게 모니터를 보여주면서 나는 그 때까지 10여 년의 의사 생활 중
영상 판독을 영어로 ‘reading’이라고 한다. 환자의 영상 검사 사진을 해석한다는 뜻이다. 어떻게 아프게 되었는지 직접 보지도 않은 환자의 사진을 보고 판독하면서 가끔 생각하곤 한다. ‘차트에 쓰여 있는 몇 줄을 보고 아픈 사람에 대해 판단을 하는 게 옳은 진료를 하는 것일까?‘. ’나는 사진의 패턴을 기계적으로 읽고 있는 것일까? 환자를 생각하고 읽어야 하는데...‘.영상의학과 의사는 질병이 있는지 없는지 누군가의 낮과 밤을 구분해주는 시계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니치 천문대처럼 표준시를 제시해 주면 좋으련만 판독을 하면서
요즘에는 유독 타임 워프(time warp)와 관련된 드라마가 많이 나오는 것 같다. 조선의 한의와 현대의 의사가 타임워프를 통해 만난다는 ‘명불허전’이라는 드라마와 꿈을 통해 미래를 바꾼다는 ‘당신이 잠든 사이에’.모두 현실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오늘의 비극적인 현실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동화적인 소망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인기를 끄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내 삶에서도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현재로서 전혀 없겠지만…나는 2017년이라는 자체를 내 삶에서
1.그림은 빛이 바래있었다. 어둡고 침울했다. 어디에도 이 그림을 그린 작가가 우리나라 근대 미술의 대표라는 것을 알려줄 만한 것이 없었다. 도화지에다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은 이중섭의 시대별 작품들 중 덩그러니 떨어진 외딴 섬 마냥 한 쪽 구석에 전시되어 있었다. 작품에 대한 짤막한 소개를 지나치지 않은 것은, 거리를 지나가다 보이는 병원 간판을 놓치지 않는 직업병 때문이었으리라. 「이중섭의 주치의 유석진 박사 소장 작품」 해방 후 중섭은 그의 아내 야마모토 아사코를 일본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지독한 가난
외과의사는 수술한 환자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속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그녀의 처음 상태를 종이에 그렸다면 배 안이 종양으로 두텁게 겹쳐서 정상 조직의 밑그림이 거의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2년 전 그녀는 복통으로 응급실에 왔다. 대장은 꽉 막혀 대변을 볼 수 없었고, 막힌 대장의 상부는 팽창하여 터지기 직전이었다. 골반에 큰 종양이 발견되었다. 종양의 범위가 너무 커서 종양이 처음 생긴 부위를 특정하기 어려웠지만, 생긴 위치로 볼 때 대장암 혹은 난소암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두 가지 종양은 완전히 절제하지 못하더라도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