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사 신문 김선영] 얼마 전 대장암이 간으로 전이되어 온 40대 여자분을 외래에서 보게 됐다. 소견서에는 2주 전부터 신우신염을 의심하고 항생제를 쓰다가 호전이 안 되어 추가 검사 중 발견됐다고 적혀 있었다. 젊은 여성이 옆구리가 아프다고 하니 비교적 흔한 질환인 신우신염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늑척추각압통도 간을 뒤덮은 종괴 때문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환자의 등만 두드려보는 것이 아니라 눕혀서 복부진찰을 하고 신체의 모든 부분을 자세히 볼 시간이 있었다면, 늑골 아래로 단단히 만져지는 간비대를 발견하기는 어렵진 않았을 것이다. 2주 정도 진단이 늦어진 것이 환자의 운명을 바꾸진 않았을 것이나 처음엔 좀 당황스럽기는 했다. 어떻게 이걸 처음에 신우신염이라면서 치료를 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청년의사 신문 김선영] 진행암을 진단받고 항암화학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가 진료를 다른 의사에게 보고싶다며 거부하는 일이 최근 일어났다. 담당하는 전공의는 그 말을 전하며 얼마나 난감했겠나. 그러나 예상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면 그분에게 미안한 일이겠지만 사실 그랬다. 모든 환자에게 좋은 의사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나의 진료 방식을 싫어하는 분들도 분명 있을 테니 말이다. 이 일을 예감한 이유는 환자에게 최근 기대여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환자는 열심히 이 힘든 치료를 받고 견뎌내면 완치가 될 것이라 믿고 있었고, 나는 그 기대를 무참하게 깨었다. 물론 그럴 의도는 아니었고 최대한 점진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방식을 좋아
[청년의사 신문 김선영] 환자분들이 “선생님이 제 주치의시니까..”라고 말씀하실 때가 종종 있다. 아, 이 분은 나를 주치의로 여기고 있구나. 감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스럽다. 암 전문병원의 종양내과의사인 나는 이 방면에 특화된 전문의이지, 환자의 건강문제를 통합적으로 돌보는 주치의로서 적합한 의사는 아니다. 4년간의 내과의사로서의 수련과정을 거쳤고, 환자를 개별질환의 집합체가 아닌 한 인간으로 보라는 가르침을 수없이 들어왔지만, 그 이후의 10년은 항암화학치료를 받는 암환자만 보아왔기 때문에 주치의로서의 종합적인 관리를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요즘은 혈압약을 어떻게 쓰는지, 당뇨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최신지견에 대한 감각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암성통증이라면 내가 조절해드려야겠지만 골관절
[청년의사 신문 김선영] 선택진료비가 폐지되면서 그 반대급부로 의료의 질 향상을 위한 각종 수가가 신설되고 있다. 암 진료 영역에서는 9월부터 항암화학요법 주사관리료와 부작용/치료반응 평가료가 신설됐다. 의료진 입장에서는 평가료를 지급하는 기준에 아쉬움이 다소 있기도 하고, 평가료를 지급받기 위해 오더를 따로 넣어야 하는 불편함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의료의 질 향상을 위한 것이라고 하니 약간의 불편함은 감수하고 있고, 의무기록도 더 열심히 작성하고 있다. 12월부터는 암환자 교육상담료 수가도 신설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지급하는 심사기준에 대해 들었을 때는 현실과 동떨어진 무리함에 기가 막힐 뿐이었다. 초회 교육은 약 4만원, 재교육은 약 2만원으로 수가가 정해졌다. 금액은 기존의 약 5만원
[청년의사 신문 김선영] 사실 나는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할 것이라고는 대입원서를 쓰기 전까지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사람을 대하는 것에 서투르고, 눈치가 없으며, 내향적인 성격이라 사람을 대하는 일을 업으로 삼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의대에 들어와보니 나보다 더 심한 사람들도 많긴 했지만….아무튼 어느덧 세월이 흘러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선택한 전공이 하필이면 종양내과다. 늘상 하는 말이 암입니다, 완치가 어렵습니다, 몇 개월 남았습니다, 힘들어질거에요, 이런 말이다. 내게 종양내과의사가 어떤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물론 많은 역할들이 있지만 그 누구도 환자에게 하고 싶어하지 않는 말을 대신 하는, 또는 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겠다. 타인과의 의사소통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전
[청년의사 신문 김선영] 얼마전 ‘국민이 마루타인가, 우려’라는 제목 아래 모 시민단체의 의견을 보도하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정부의 임상시험 글로벌 경쟁력 강화방안에 대한 문제제기다. 해당 시민단체는 ‘임상시험의 부작용이 다수 발생하는 등 그 위험성이 객관적으로 입증되고 있다’면서 ‘중대약물이상반응보고가 2011~2013년 사이 476건이었고, 이로 인한 입원, 생명위협, 사망이 피험자의 건강과 생명에 위협을 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확대에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상시험을 수행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접하면 솔직히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지 아득해져 올 뿐이다. 그러나 일반인의 시점에서 바라볼 때 임상시험이라는 것은 언제나 동반된 위험과 윤리적 문제를 먼저 생각하지
[청년의사 신문 김선영] A님, 당신은 처음 저에게 오셨을 때 당신의 암이 완치가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고 하셨지요. 치료의 목적은 암을 누그러뜨리는 것이지 이것을 다 없애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계신다고 하셨어요. 당신은 보기 드물게 치료의 목표와 본인의 상태에 대해 잘 이해하고 계시는 환자였어요. 그러나 여느 다른 분들과 같이, 끝이 언젠가 올 거라는 생각을 하고 싶진 않은 듯 보였어요. 언제나 병이 진행될 수 있다는 데 불안감을 느끼시고, 항암치료가 독성으로 연기되는 것을 걱정하시면서, “제때 맞춰 주사를 맞아야 할 텐데” 하시며 초조해하시는 모습에 저도 같이 조바심이 났었나 보아요. 약이 잘 안들을 경우, 암이 진행해서 몸 상태가 나빠질 경우, 스스로의 몸을 가눌 수가 없고 누군가
[청년의사 신문 김선영] “진행암이어서 완치는 어렵습니다.” “그럼 TV에 나와서 ○○환을 먹고 말기암이 완치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뭐에요?” “ 글쎄요…. 실제로는 병원에서 한 치료로 효과를 보신 분이었을 수도 있고, 실제로는 말기암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요. 그런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나면 환자들 대부분은 석연찮은 표정을 지으면서 침묵한다. 표정에 묻어나는 생각들을 읽을 수 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의사는 말이 안통하는군’, ‘그럴 줄 알았다… 그럼 그렇지’ 등등. 나도 정말 궁금하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완치가 되었다는 것일까? 상식적으로 어떤 성분인지도 불분명하고 십중팔구 건강식품 정도로 허가를 받았을 ○○환이 그렇게 대단한 항암효과가 있다고 짐
[청년의사 신문 김선영] 비행기 기내에서 닥터콜을 받고 응급상황을 늠름히 해결한 선생님들의 미담이 가끔 언론에 오르내린다. 나같은 경우는 다행히(?) 항공여행 중 닥터콜이 있었던 경우는 없었고, 그 외에 병원 밖에서 응급상황을 겪은 일도 거의 없다. 다만 조금 겸연쩍은 일을 이번 봄 제주도 여행에서 겪었다. 여행 마지막날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데, 건너 테이블에 앉아있던 (되돌이켜보면 병색이 짙어서 휴양지의 밝은 분위기에서 확 눈에 띄었던) 할머니께서 갑자기 어지러워하며 식탁에 엎드리고 계셨다. 딸로 보이는 중년 여자분은 119를 불러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나는 솔직히 뭘 해야 할지 좀 당황하긴 했지만 일단 할머니께 가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증상으로 보아 기도폐쇄는 아니었고, 호흡
[청년의사 신문 김선영] 대장암을 주로 보는 나는 50여시간 가까이 주입되는 항암제 정맥주사를 처방하는 일이 종종 있다. 예전에는 다 입원해서 주사를 맞았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는 인퓨전 펌프라는 지속적 약물주입장치가 도입돼 집에서도 항암제 투여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이는 진통제나 항생제 투여에도 종종 쓰이는 방법으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일회용 장치여서 위생적이고 간편하다. 오심이나 구토도 이 방법으로 하면 훨씬 덜한 느낌인데, 항암제 유발 구토에는 환경 및 심리적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병원에 갈 생각만 해도, 병원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을 시작하는 환자들이 집에서 주사를 맞으면 안정을 되찾는다. 처음엔 어떻게 집에서 주사를 맞느냐고 손사래를 치던 환자들도 해보니 괜찮더라면서 왜 진작 이렇
[청년의사 신문 김선영] 작년 가을에 참석한 해외학회에서 일본인 의사들과 만나 회의 후 식사를 같이 할 기회가 있었다. 공통의 화제를 생각하던 중 문득 한국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한 곤도 마코토 박사가 떠올랐다. 곤도 마코토 박사는 일본의 방사선종양학과 의사로서 ‘암은 방치해두는 게 낫다’, ‘항암제는 효과가 없다’,‘건강검진은 백해무익하다’는 주장을 책으로 써 논란을 일으켰다.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된 책이 9권정도 되는데, 제목을 보면 그가 주장하는 바를 대략 알 수 있다. ‘의사에게 살해당하지 않는 47가지 방법’, ‘항암치료는 사기다’, ‘당신의 암은 가짜암이다’, ‘시한부 3개월은 거짓말’ 등이다. 여러 출판사에서 경쟁적으로 그의 책을 번역해 출간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 출판계에선 비교적 잘 나
[청년의사 신문 김선영] 다년간 종합병원 봉직의로서 일하다보면 전공의선생님들에 대한 불만을 많이 듣는다. 환자들에게서도 듣고 간호사들에게 듣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간호사들은 사정을 모르지는 않기 때문에 완곡하게 표현하기는 하나, 어쨌든 환자에게서나 간호사에게서나 대개는 의학적 처치 및 결정에 대한 것보다는 태도에 관한 불만이 많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나 역시 그런 의사이기는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환자와 동료의료진을 대하는 태도를 고쳐보도록 해라’고 쉬이 말할 수가 없다. 환자를 위해 열심히 이것저것 챙기고 찾아보고 해도 돌아오는 건 편의점 직원을 대하는 태도와 그리 다르지 않다. 간호사들에게서 들려오는 밑도 끝도 없는 보고들은, 사실 보고라기보다는 ‘책임지라’는 말로 들린다. 잘 모르는
[청년의사 신문 김선영] 두께가 5~6cm 정도는 되어 보이는, 무거워서 한손에 잡히지도 않는 부담스러운 차트. 지친 표정에 경계가 가득한 눈빛을 담고 있는 환자 또는 보호자. “영상 다 올라오려면 (외부병원 영상이 우리병원의 영상정보시스템에 업로드 되려면) 몇 분 더 기다려야 한대요”라며 난처한 웃음을 짓는 외래 담당 간호사. 이차의견(second opinion) 환자다. 지금 받는 치료에 대해 다른 병원 의사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서 온 분이다. 지방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수도권의 유명병원에 가봐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오신 분들도 있고, 우리 병원보다 더 큰 소위 Big 5라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오신 분도 있다.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의사들은 이런 환자들을 그리 환영하지 않는다. 파악하는데 오
[청년의사 신문 김선영] 2014년 늦은 가을, 신해철씨 사망을 즈음해 이전부터 책장에 꽂아만 두고 있던 ‘존스홉킨스도 위험한 병원이었다’를 꺼내 읽었다. 저자 피터 프로노보스트는 중심정맥관감염과 탈수로 사망한 조시 킹이라는 어린이가 겪은 비극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책을 썼다. 일명 ‘종현이법’이라고 하는 환자안전법이 4년간의 제정운동을 통한 기나긴 논의와 조정을 거쳐 지난해 12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종현이도 한국의 조시 킹이 될 수 있을까. 진정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사실 빈크리스틴 사고는 종현이 이전에도 몇 건이 더 있었다. 일부 병원에서 재발방지를 위한 시스템개선을 해왔던 것이 사실이지만, 개별 사건과 개별 병원의 차원에 국한된 예방활동에 그쳐왔다. 이번에 국회를 통과한 환
[청년의사 신문 김선영] 암환자들, 아니 정확히 말해 암생존자들은 늘 재발의 공포 속에 살아간다. 암수술은 대개 상당부분의 정상조직까지 손상되는 큰 수술이고, 일부 고위험군의 경우 방사선치료, 항암화학치료까지 보통 6~8개월, 길게는 1년까지 걸리는 고난의 여정을 거쳐야 한다. 당연히 그 보상으로 완치라는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만, 암이라는 질병은 그런 인내와 정성을 배반하기 일쑤이다. 재발이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접하고 소위 ‘투사(projection)’라고 부르는, 자신의 불행을 누군가의 탓을 돌리는 반응이 일어나는 것은 흔한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대상은 당연하지만 의사가 된다. “지난번까진 괜찮다가 왜 갑자기 재발이래요? 지난 검사에서 뭔가 놓친 거 아닌가요? ” “좀더 검
[청년의사 신문 김선영] 최근 대한의사협회와 서울시의사회가 차등수가제의 폐지를 주장했다. 일부 국회의원들과 보건복지부장관도 이에 공감을 표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차등수가제는 의사 일인당 하루 진료건수가 75명을 넘어가면 건강보험 급여비 지급을 삭감하는 제도로 2001년에 만들어졌으며, 의사의 적정진료를 유도하고 환자집중을 분산시키겠다고 도입한 정책이다. 그러나 누가 보더라도 진료의 질 향상보다는 재정절감이 우선인 정책이었다. 대중에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차등수가제는 의원급에만 적용되는데다가, 정부 유관기관인 보건사회연구원도 2009년 연구보고서를 통해 ‘차등수가제로 인해 진료의 질이 높아지거나 환자의 집중도가 완화되고 있다는 증거가 없다’고 밝혔을 정도였다. 이러니 의사단체가 차등수가제를 문제 삼는 것은 당
[청년의사 신문 김선영] 요즘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이 배우는 수학책(과거 슬기로운 생활 또는 산수로 불렸지만 수학으로 바뀌었다)을 보노라면 나에게도 쉽지 않은 문제가 있다. 두 자리 수의 덧셈을 여러 방법으로 하는 것을 연습하는 단원이 좋은 예다. 34+28은 30+20, 4+8 십의 자리와 일의 자리를 각각 더해서 50+12=62가 될 수도 있고, 34+20을 먼저 하고 54 +8을 해서 답이 62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34+8을 먼저 해서 42에다 20을 더해서 62가 될 수도 있고, 28+30을 먼저 하고 58에 4를 더해서 62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더하는 방법의 경우의 수는 교과서에서 제시하는 방법보다 더 많다. 현재 교과서는 앞의 두 가지 방법만 가르친다. 또 시험문제는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