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보고해도 피드백 없는 인증원에 불만

일선병원, 자율보고 후 '위험한 병원' 낙인 두려움 커

지난 11월 29일 보건복지부 방문규 차관 주재로 ‘1차 국가환자안전위원회’가 열렸다. 위원회에서는 ‘환자안전기준’을 심의, 확정하고 7월 29일부터 시행된 환자안전법 이행 상황을 점검했다.

위원회는 차관을 위원장으로 의료기관 단체(대한의사협회, 대한병원협회, 대한간호협회 등), 노동계·소비자단체 등의 추천인, 환자안전에 관한 전문가, 복지부 공무원 등 15인으로 구성해 최소 매년 1회 이상 개최된다.

첫 위원회는 ▲보건의료기관의 시설 및 장비에 관한 기준 ▲보건의료기관의 관리체계에 관한 기준 ▲보건의료인의 보건의료활동 기준 등을 담은 환자안전기준을 확정했는데, 앞으로 이 기준은 모든 의료기관에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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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회는 환자안전법상 시스템 구축 현황도 점검했는데, 우선 의료기관평가인증원이 전담하고 있는 자율보고학습시스템의 경우 11월 17일 현재까지 236건이 보고됐다.

보고 주체는 상급종합병원 및 종합병원이 197건으로 83%를 차지했으며, 보고자는 전담인력이 223건(95%), 환자 및 환자보호자는 5건(2%)을 보고했다.

보고내용으로는 낙상이 121건(51%)으로 가장 많았으며, 투약오류가 74건으로 뒤를 이었다. 의료기구와 검사 관련 보고는 모두 한자리 수에 불과했다.

앞으로 보고학습시스템을 통한 보고가 많아지면 이를 바탕으로 2017년 중 환자안전지표가 마련되며, 환자안전종합계획은 2017년 4월까지 관련 연구용역이 끝나면 2017년 중 수립할 예정이다.

환자안전법 시행 4개월이 된 상황이지만 지금까지는 시행을 위한 준비기간이었고 이제야 본격 시행을 위한 첫발을 내딛은 셈이다.

매달 60여건 자율보고, 낙상이 절반 이상은 문제
지난달 29일 복지부 발표에서 가장 관심을 끈 부분은 환자안전법 시행 후 자율보고 건수가 얼마나 되느냐였다. 자율보고시스템을 전담하고 있는 인증원이나 복지부가 환자안전법 시행 후 4달이 지나도록 보고 건수 등을 공개하지 않아 궁금증이 컸기 때문이다.

29일 발표된 보고 건수는 236건으로 월 평균 약 60건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이 정도면 적지는 않은 수치라는 평이 많았다.

인증원 관계자는 “건수 자체는 해외에서 자율보고시스템을 처음 도입했을 때보다 많다. 적다고 볼 수 없다. (아직 본격적으로 시스템이 가동되지 않은 시점에서) 고무적”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복지부 발표에서 나타난 것처럼 보고 중 가장 많은 사례가 낙상이라는 점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있다. 환자안전과 관련해 의료기관 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사항과 의료기관이 해결할 수 없는 사항이 있는데, 낙상의 경우 의료기관 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보이기 때문이다.

대학병원 한 환자안전 전담인력은 “환자안전보고가 법 시행 후 많다고 하지만 절반이 넘는 것이 낙상 관련 보고다. 사실상 낙상의 경우 의료기관 내에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예방할 수 있는 문제다. 애초에 자율보고시스템을 왜 만들려고 했는지를 생각하면 조금 아쉬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의료기관 환자안전 전담인력은 “환자안전 관련 사고는 의료기관 내에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의료기관이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인증원에 자율보고를 하는 이유는 의료기관이 자체적인 환자안전 활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건을 겪었을 때를 대비하는 것”이라며 “환자안전법 시행 초기이기 때문에 건수가 많은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계속해서 이런 식의 보고만 된다면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인증원 피드백 부족 해결해야
낙상 등 비교적 처리가 수월한 사항 외 환자안전법 태동의 직접적 원인이 된 빈크리스틴 투약 오류 등의 사건이 더 보고되고 알려지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 현장에서 원하는 목소리는 자율보고에 대한 인식변화와 인증원의 제대로 된 일처리다.

전자의 경우 환자안전법 제정과 자율보고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을 때부터 언급돼 왔던 것이고 문화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당장 해결될 순 없다. 정부의 적극적인 홍보와 시민사회단체의 활동 등으로 통해 점차 인식을 개선하는 것이 최선이다.

반면 후자의 경우 자율보고시스템을 위임 운영하고 있는 인증원의 태도와 일처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율보고를 한 측에서 봤을 때 ‘보고를 통해 뭔가 변하고 있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주지 못한다면 지금보다 보고 건수가 줄어들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 국립대병원 환자안전 전담인력은 “의료기관 내에서도 환자안전 관련 보고를 받으면 일이 어떤 식으로 논의돼 어떤 식으로 개선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피드백을 준다”며 “하지만 인증원에 자율보고를 했을 때 그런 피드백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이미 환자안전활동을 활발히 해 오던 기관의 경우 제약회사, 정부단체 등을 상대해야 해결 가능한 사례들을 인증원에 보고하게 되는데, 이 경우 지속적인 피드백이 없으면 ‘역시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하기 쉽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인증원 관계자는 “의약품과 관련해 혼동이 생기는 문제 등은 제조사나 식품의약품안전처 등에서 처리해줘야 하는 문제들인데 이런 경우 의료기관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힘든 경우”라며 “(이런 사건이 보고되면) 피드백을 위해 관련 부처, 학회, 단체 등과 상의할 부분이 많다. 이제 시행한 지 4개월 정도다. 보고된 후 협의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부분이 있다. 피드백이 중요하다는 것은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직은 시행 초기기 때문에 현장에서 반응할 정도의 피드백이 없지만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점차 개선하겠다는 것이다.

이 외 환자안전사고에 대한 제대로 된 실태조사 없이 무조건 자율보고를 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는 지적도 있다.

한 의료기관 환자안전 전담인력은 “우리나라는 환자안전사고와 관련해 어떤 문제가 얼마나 발생하는지 제대로 된 통계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환자안전사고를 자율보고하라고 하면 누가 보고하겠냐”며 “정부 주도의 제대로 된 실태조사를 한 후 ‘이러이러한 사고가 많으니 주의해 보고해달라’고 초기에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환자안전 보고, 지원부터 해달라
환자안전법 시행 전부터 환자안전 전담인력을 채용하고 있던 상급종합병원이나 종합병원과 달리 중소병원들은 아직 환자안전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입장이다.

한 중소병원 관계자는 “환자안전법 시행이 필요하다는 점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전담인력을 몇 명 이상 둬야 하고 각종 보고도 하라고 하는데, 지금처럼 아무런 지원도 없는 상황에서 그런 활동을 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정부에서는 의료기관 질을 평가해서 수가를 더 주는 것이 결국 환자안전활동에 지원하는 것이라는 취지로 이야기하지만, 이정도 가지고 안 하던 환자안전활동을 전담인력까지 둬서 하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고 덧붙였다.

한 국립대병원 환자안전 전담인력도 작은 병원의 고충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사실 국립대병원이나 대형병원들만 해도 지금까지 해온 활동이 있기 때문에 환자안전법이 시행되고 크게 바뀌는 부분이 없다. 하지만 중소병원들의 경우 지금까지 하지 않던 활동을 갑자기 하려면 부담이 될 것”이라며 “대형병원의 경우 환자안전팀에 지금까지와 다르게 예산도 주고 하지만 중소병원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환자안전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돈이 든다는 것을 누구나 아는 상황에서, 실질적인 보상 없이 환자안전을 강화하기 위해 활동을 열심히 하고 보고도 열심히 해달라고 아무리 이야기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이다.

답답한 전문가들
자율보고시스템을 위임 운영하고 있는 인증원에는 현재 이 시스템 운영과 관련해 5명의 직원이 있다. 인증원은 인원은 적지만 인증원 외부에 있는 환자안전 전문가들을 활용해 충분히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인증원 관계자는 “기관에서 사업을 진행할 때 전문가들이 모여서 일을 하면 좋겠지만 여건이 그렇지 못하다. 인력구성은 5명이지만 외부 전문가들과 협력하는 구조를 통해 (전문지식 부족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내년부터는 인증원 내부에서도 인증사업과 환자안전 관련 조직을 완전히 나눌 생각이다. 이를 위한 장기적인 계획이 세워져 있지만 아직 공개할 단계는 아니다. 인증원이 중심이 돼 관련 학회, 단체 등과 함께하는 구조를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인증원의 이같은 바람은 잘 실현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환자안전법 제정에 큰 역할을 한 한 전문가는 환자안전법 시행 후 인증원에서 뭔가 자문을 요청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탄했다.

이 전문가는 “인증원에서 자율보고시스템 운영을 위탁받긴 했는데 내부 인력들이 전문성 있는 인사들이 아닌 것 같다. 의료기관 내에서 실제 사례를 분석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라며 “관심은 있는 사람들이지만 전문가라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 전문가는 “내부적으로 전문가가 부족하면 외부에 있는 분들에 자문을 구하는 등 활발한 보완 노력을 해야 하는데, 별로 그런 움직임도 없다. 인증원 내 책임자의 경우 관련 학회 등에서도 활동하는데, 학회에도 잘 참석하지 않는다. 소통이 별로 없다”고 덧붙였다.

환자안전법이 가야할 길
환자안전법은 빈크리스틴 투약 오류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故 정종현 군이 남긴 유산이다. 다시는 종현이 같은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게 모든 의료기관이 힘을 합해 자율보고시스템을 만들고 정부에서는 이 보고를 바탕으로 탄탄한 감시체계와 경보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하지만 시행 4달이 지난 시점에서 환자안전법 시행의 중추를 담당해야 하는 의료기관은 아직도 정부와 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 의료기관 환자안전 전담인력은 “지금 같은 상태라면 환자안전법의 핵심인 ‘자율보고를 통한 감시체계 구축’은 시작도 하기 전에 흐지부지될 가능성도 있다”며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첫 시작부터 시스템을 꼼꼼히 챙겨서 법이 올바른 방향으로 시행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복지부는 11월 29일 첫 국가환자안전위원회 개최 후 “아직 환자안전법체계가 완전 정착되지 않은 시행초기이므로 예단하기 어렵지만 환자안전 전담인력 배치 등 일부 미진한 부분이 있어 홍보와 독려 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한 “국가환자안전위원회 설립과 환자안전기준 마련을 시작으로 신속히 환자안전법 시스템이 구축돼 원활히 작동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복지부가 이 약속을 지키는 것이 환자안전법이 국내에 뿌리내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복지부가 이 약속을 지켜야 아직 정부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일선 의료기관들도 환자안전법에 녹아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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