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리우데자네이루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이번 여행지는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에 이은 우리나라 지구 반대편에 있는 라틴아메리카로,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여행 6일째, 지금까지의 여유는 잊어버려야 할 모양이다. 드디어 빡쎈 일정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날은 오전 6시23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로 리우로 이동하기 때문에 4시 반에 숙소를 나서기로 했다. 현지가이드가 출국장까지 일행을 배웅해주었고 탑승수속은 순조로웠고 역시 프로다운 면모를 가졌다. 하지만 이번 비행에서도 사건은 빠지지 않았다. 계류장까지 걸어가야 비행기를 탈 수 있었는데 탑승이 시작되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항공사에서 승객들에게 우산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물론 비행기에 탑승하면서 돌려주는 거지만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일행 중에 자리가 이중으로 지정된 분이 있었던 것도 사건이라면 사건이다. 당연히 먼저 앉은 사람이 임자, 뒤에 나타난 사람은 다른 자리로 안내되어 갔다. 하나 더, 다른 일행들은 모두 쌍쌍으로 앉았는데, 제일 먼저 탑승수속을 한 아내와 나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나누어 앉았다는 것.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브라질은 8백51만㎢면적으로 남아메리카대륙의 48%를 차지하여 가장 크고, 러시아, 캐나다, 중국,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번로 큰 나라이다. 에콰도르와 칠레를 제외한 남아메리카의 모든 나라와 국경을 나누고 있다. 수도는 브라질리아이다. 북쪽 지역은 아마존 강이 흐르는 세계 최대의 열대우림이 들어있는 아마존 분지이고, 남쪽으로는 브라질 고원이 펼쳐진다. 2억 5백50만 명이 살고 있으며(2016년 기준) 아메리카대륙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고 있다. GDP는 2조 3,668억 달러(2012년 기준)로 세계 7위이나 1인당 GDP는 12,086달러로 세계 81위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삼바와 카니발의 본고장이며 축구의 강국이다.(1)

브라질이라는 이름은 브라질나무라고 부르는 아라부탄의 수액을 ‘브라지레’라고 부른데서 유래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염료로 사용하는 이 나무의 붉은 수액을 ‘타오르는 불꽃같은’이라는 뜻의 ‘브라지레’라고 하였고, 아라부탄을 ‘불타는 숯처럼 붉은 나무’를 의미하는 파우 브라질(pau-brasil)이라고 불렀다.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차지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Bartholomeu Diaz)가 희망봉을 발견하였고, 1498년 5월 20일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하면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가는 동방항로를 통한 무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1500년 4월 바스쿠 다가마의 항로를 따라 인도로 향하던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Pedro lvares Cabral)가 폭풍을 만나 항로를 벗어나 도착한 곳이 브라질이었다. 그는 이곳을 ‘안전한 항구’라는 뜻으로 포르투 세구루(Porto Seguro)라고 명명했다.(2)

브라질의 원주민은 베링 해를 건너온 아시아 사람들이라고 보는데, 이들이 북아메리카에서 남하하여 브라질 땅에 들어온 것은 기원전 8천년 무렵이다. 안데스산맥의 페루를 중심으로 한 잉카제국은 브라질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유럽인들이 도착했을 때 브라질에 살던 원주민의 규모에 대한 연구를 종합하면 최소 약 240만 명에서 최대 약 850만 명이었을 것이라고 추산된다. 포르투갈은 브라질 발견 초기에는 브라질을 식민지보다는 무역대상으로 생각했는데, 해외 식민지에 정착시킬 인구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요새화된 정착지를 설치하고 브라지레 채취에만 집중하다가 이내 대규모의 토지와 노예를 필요로 하는 사탕수수 경작으로 정책이 바뀌었다. 유럽인과 동행한 각종 전염병으로 원주민 수가 격감하자 식민당국은 모자란 일손을 아프리카에서 끌어온 노예로 충당했다.

7시20분 비행기는 리우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안착을 했음에도 박수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르헨티나와 다른 분위기이다.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를 받았기 때문일까? 이베리아반도에 있는 본국들이 힘을 겨루던 것처럼 두 나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19세기 말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을 지낸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 (Alejo Julio Argentino Roca Paz)는 반란을 일으킨 원주민을 진압하면서 박멸하는 등 아르헨티나를 백인중심의 국가로 변모시켰던 것과는 달리, 포르투갈은 사탕수수농장을 운영하기 위하여 파라과이 부근까지 진출하여 과라니족을 붙잡아다 노예로 삼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들여와 공존의 길을 모색하였던 것도 차이점이다. 그래서 브라질 사람들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건반지고 지나치게 격식을 따진다’며 비난하고,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브라질 사람들을 ‘더운 나라의 나태함에 빠져 마냥 빈둥거리는 열등한 민족’이라고 경멸해왔다는 것이다. 두 나라의 앙숙관계는 축구시합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두 나라가 붙을 때는 물론이고 상대국과 경기를 하는 나라를 무조건 응원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한국이 아르헨티나와 붙으면 브라질은 무조건 한국을 응원하는 식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두텁게 쌓인 두 나라 사이의 앙금을 풀어내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고 한다.(3)

비행장에서 만난 현지 가이드는 현재 리우의 상황이 아주 복잡하다고 했다. 리우카니발을 50여일 앞두고 14,000명이 탄 유람선이 들어왔을 뿐 아니라 비행기로도 벌써 20,000명이 들어와 있는 상황이라서 전투적 자세로 관광지를 돌아보아야한다고 강조했다. 리우에서의 첫 번째 일정은 세계 최대의 예수그리스도상이 서있는 코르도바 언덕에 오르는 일이다. 코르도바 언덕에 오르는 일은 오늘 일정 전체가 달려있어 가히 전투관광의 꽃이라 할만하다. 이곳에 오르려면 언덕 중간에 있는 빠예네라까지 전차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2량뿐인 전차를 타기위하여 뙤약볕 아래서 하염없이 기다려야한다. 하지만 우리는 언덕 아래 산타테레자에서 17인승 벤으로 갈아타고 빠예네라까지 올라갔다. 문제해결능력이 뛰어난 한국 가이드들 특유의 발상이 낳은 쾌거이다. 빠예네라에서 다시 국립공원 전용벤으로 갈아타려면 역시 길게 줄을 서야하는데 우리는 하늘이 도왔는지 도착하자마자 전용벤을 탈 수 있었다. 기적 같은 일이다. 언덕에 올라보니 그래도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코르도바 예수상의 건립에는 복잡한 사정이 숨어있다. 1850년대 라자리스트회(Vincentian) 수도사 페드로 마리아 보스(Pedro Maria Boss)가 페드로2세 황제의 딸 이사벨이 브라질을 섭정하게 된 것을 기리기 위하여 코르코바두산에 예수상을 세우자는 제안을 한 바 있다. 하지만 1889년 공화정으로 바뀌면서 정경분리가 되었고, 예수상건립안은 없었던 것이 되었다. 1920년 리우의 가톨릭계가 도시의 상징으로 예수상을 건립하자고 제안하고, 리우데자네이루 대교구가 나서서 조각상 주간(Semana do Monumento) 행사를 주관하여 제작비용을 모았다. 마침 1922년은 브라질이 포루투갈로부터 독립을 선언한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1822년 9월 7일 페드루 4는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브 연합왕국으로부터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며, 초대 황제 페드루 1세로 즉위한 날이다.

아르데코형식의 코르도바언덕의 예수상(Christ the Redeemer)는 브라질 기사 에이토르 다 시우바 코스타(Heitor da Silva Costa)의 설계로 폴란드계 프랑스 조각가 폴 란도프스키(Paul Landowski) 가 제작한 것이다. 티후카삼림(Tijuca Forest) 국립공원에 있는 해발 700m의 코르코바도(Corcovado)산 정상에 8m높이의 좌대를 만들고 그 위에 30m 높이에 펼친 양팔이 29m에 달하는 예수상을 세워 리우데자네이루를 굽어보도록 하였다. 예수의 형상은 강화시멘트를 부어 만들었고, 그 표면에는 활석의 일종인 동석(凍石 saopstone)을 3-5cm 크기로 만들어 붙였다. 구엘공원에서 만날 수 있는 공법이다. 25만달러의 제작비용이 들어간 예수상 건립작업은 1922년부터 1931년까지 9년이 걸렸고, 1931년 10월12일 봉헌식을 치렀다. 2008년 강력한 폭풍에 벼락에 떨어져 손가락과 머리 그리고 눈썹 등이 손상되어, 2010년에는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벌었다. 세척을 하고 모르타르 새로 충전하여 표면의 동석을 교체한 것이다.(4)

잘 알려진 것처럼 코르도바의 예수상은 멕시코의 치첸이사, 이탈리아의 콜로세움, 중국의 만리장성, 페루의 파추픽추, 요르단의 페트라, 그리고 인도의 타지마할과 함께 새로운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선정되었다.(5) 새로운 세계 7대 불가사의는 스위스에 있는 ‘새로운 7대 불가사의(New 7 Wonders)’ 재단이 1999년부터 200여개의 유적지를 접수받아 21개의 후보지를 선정한 다음 인터넷과 휴대전화 메시지를 이용한 여론조사로 선정하는 방식으로 2007년 7월 7일 결정되었다. 당시 브라질에서는 코르도바 예수상이 새로운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선정되기 위하여 민간은 물론 대통령까지 나서서 투표참여를 촉구했다는 뒷이야기도 있다.(6)



많은 사람들이 예수상처럼 팔을 벌리고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우리의 가이드는 자신만의 회심의 촬영장소에서 인증샷을 찍어주었다. 회심의 장소는 아마도 그의 영업비밀일 터이니 공개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코르도바의 언덕에 올라보니 눈아래로 코파카바나해안, 하트호수 등 리오가 한 눈에 들어온다. 리우를 ‘산과 바다 사이의 카리오카 경관’이라고 하는 이유를 이곳에 올라와서 보면 이해가 된다. 예수상 좌대에 있는 작은 성당을 비롯하여 코르도바언덕을 빙 돌면서 리오의 모습을 기억에 담고서 10시40분에 하산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날 우리 일행이 얻은 엄청난 행운은 기다리는 시간이 전혀 없었다는 것 외에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도 포함된다. 며칠을 이어온 비가 마침 멎은 덕이고, 덤으로 리오의 해변까지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것은 이어진 비에 매연이 씻겨나갔기 때문이다. 코르도바언덕에서 예수상을 제대로 볼 확률은 다섯 번 올라야 겨우 한 번 볼 수 있다는 백두산 천지확률보다 5배나 희소하다 하니 우리는 리오를 25번이나 찾은 셈이다. 우리는 포상을 받아 마땅하다.

브라질전통의 츄라스코를 점심으로 먹는 것이 포상이었다. 소고기의 부위를 포르투갈어로 외우는 것이 어렵다보니 6번 8번 등으로 주문했기 때문에 어느 부위가 맛있었는지 기억은 분명치 않으나, 등심 우둔 등이 부드러웠던 것 같고 오히려 우리네가 좋아하는 갈비는 기름이 많고 질기기조차 했다.


참고자료

(1) 위키백과. 브라질.

(2) 김영철 지음. 브라질의 역사 19-44쪽, 이담북스 2011년.

(3) 2002년 8월 6일자 프레시안 기사. 아르헨이 브라질을 ‘형님’으로 모시는 사연.

(4) Wikipedia. Christ the Redeemer (statue).

(5) 위키백과. 새로운 세계 7대 불가사의.

(6) 하나블로그. 세계 7대 불가사의이자 브라질의 상징... 코르도바 예수상의 숨겨진 비밀.

저작권자 © 청년의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