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남부 인구 10만명의 소도시 에를랑겐에는 CT와 MRI를 생산하는 의료기기 회사 ‘지멘스 헬스케어’ 본부가 있다. 지멘스 관련 직원이 약 2만명이 여기에 거주한다. 그 식구까지 합치면 도시 인구 절반이 지멘스 사람이다. 에를랑겐은 지멘스로 먹고산다고 보면 된다.


MRI 공장 한쪽 벽면에는 340명 기술자의 이름이 액자에 모셔져 있었다. MRI 제조와 관련해 기술 특허 287개를 출원한 기술자 명단이었다. 그들의 절반 이상이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를 땄다. 공장 한쪽에는 각 분야 최고 기술자들의 실험실이 모여 있어 공과대학 연구실 같은 분위기다. 여기서 기초과학과 엔지니어링이 만나 섞인다.

독일 의료기기 산업은 그런 식의 만남에서 출발했다. 1895년, 독일 물리학자 빌헬름 뢴트겐은 인류 최초로 X-선을 발견했다. 인간의 몸 안을 몸 밖에서 처음 들여다본 것이었다. 이때 뢴트겐은 저명한 전기기술자 베르너 지멘스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내가 X-선을 발견했는데, 인체에 쓸 수 있는 X-선 발생 장치를 만들 수 있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3개월 만에 양질의 엑스레이 기기를 만들어 냈다.

그렇게 실험실의 연구가 응용기술과 조합돼 엑스레이를 넘어 CT와 MRI 개발로 이어져 왔다. 모두 노벨의학상을 안긴 품목들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지멘스는 의료영상 사업 분야에서 줄곧 글로벌 선두 자리를 지켜왔다. 세계 의료영상 기기 판매량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한다. 하루 약 50만 명의 환자가 세계 어딘가에서 지멘스 CT에 몸을 눕히고 있다. 개발부와 마케팅부에는 1,000여 명의 의사들도 근무한다. 학문과 인간의 융합이 독일 의료기기 산업을 이끌고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 굴지의 제약회사나 의료기기 회사 하나 키우지 못했다. 이공계생들은 의대로 가려고 하고, 의대생은 임상의사의 길로만 향한다. 의료산업이 꽃을 피우려면 특성상 이학·공학·의학의 의기투합이 필수적인데도 대학들은 여전히 서로 간에 담장을 쳐놓고 있다. 재충전을 위한 안식년일 때조차 로봇공학을 전공하는 공대 교수가 병원 재활의학과에 근무할 수 없고, 인공관절이 전공인 정형외과 교수가 공대 재료공학 실험실에 파묻힐 수 없다. 대부분 학제가 다르다는 이유로 허용되지 않는다. 학술 업적 평가에서도 공동연구보다 혼자서 한 연구를 더 쳐준다.

융합의 시대에 역행하는 코미디다. 의료분야에서 다양한 융합과 활발한 스타트 업이 안 되는 이유는 또 있다. 신기술 아이디어를 가진 젊은 의대 교수들이 직급 승급에 필요한 논문 쓰는 데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평가와 경쟁력 강화라는 이유로 교수 승급에 합당한 논문 건수와 점수가 최근 10년간 계속 올랐다. 그 과정에서 상당수는 논문을 위한 논문이다. 소수에만 인용되는, 승급을 위한 논문을 쓰기 위해 한창 싱싱하게 돌아가는 뇌를 돌리는 것이다. 너무나 안타깝다.

세상은 의사 CEO 시대로 가고 있다. 생명공학의 종착역인 환자 치료에 전문 지식을 지닌 의사들이 생명공학 산업에 직접 나서야 한다. 요즘 41개 의과대학에 전국의 인재들이 지나치게 몰린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그런 의사들이 생명공학의 전사(戰士)가 되어 ‘바이오 코리아’를 일궈갈 수 있도록 판을 만들어 줘야 한다.

상당수는 크리에이터(creator) 인벤터(inventor) 이노베이터(innovator)로 커야 한다. 인공지능 의사가 등장하고, 유전체 의학과 정밀의학이 헬스케어 판을 송두리째 바꿀 태세인데 젊은 의대 교수들이 논문을 위한 논문을 쓰고 있어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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